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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8화 (28/225)

28화 조선을 만나다 (9)

다행히도 수석식 권총은 제대로 작동했다. 탄은 언제나 약실에 장전해 두었기에, 그대로 끼우고 쏴버렸다.

탕!

한 발을 몸통에 적중시켰다. 하지만 구루시마 소진이라 자칭한 자는 멈칫하기만 했다.

그대로 계속해서 달려들기라도 하면 답이 없었기에, 부리나케 약실을 돌려가며 연달아 세 방을 더 날렸다. 그제야 칼을 든 무사가 쓰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휴우, 이제 진짜 끝인가?”

놀란 병사들은 뒤늦게 주변을 경계한다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전투가 끝난 줄 알고 선실에서 올라왔던 사람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안심시켰다.

“이제 진짜 끝났습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요시히메였다.

“총도 대단하지만, 기세를 올리며 달려드는 무사를 쏘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그야, 아야!”

대꾸를 하려고 했지만, 말을 마치지 못했다. 대화를 하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손가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맨손으로 뜨거운 약실을 만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뭐야, 화상이잖아. 잠시 기다려.”

그녀는 어딘가로 뛰어갔다가 잠시 후, 손에 냉수 한 사발을 들고 돌아왔다. 화상의 치료법이야 뻔한 것. 나도 요시히메가 시키는 대로 찬물에 손을 담갔다.

그동안 그녀는 다시 붕대를 가져와서 손가락에 감으려 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놔두죠.”

화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물집도 없이 약간 발개진 상태에 불과했기에, 나는 굳이 더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약간 쓰라리긴 해도 참을 만한 것 같았다.

“기다려. 혹시 모르니까, 치료할 수 있을 때 최대한 해 두는게 좋아.”

요시히메는 막무가내로 내 손에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이런 건 번거로운데······.”

“그래도 나을 때까지 꼭 해. 얼마 안 걸릴 거야.”

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단조가 포로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가지고 왔다.

“이자가 구루시마 소진이 맞다고 합니다.”

“누구지?”

이요 수군과 연관된 일은 대부분 그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적장이 구루시마 성을 쓰는 걸 보면, 이요의 고노 가문 산하인 구루시마 수군 소속인 것까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구루시마 가문의 방계인데, 나름 능력이 있어서 구루시마 인근 해역을 맡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대의 총책임자겠네.”

“그렇습니다.”

몇 척이 도망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배는 아군이 나포한 상태였다. 이제 구루시마 수군의 본거지는 우두머리도 잃었고, 지키고 있는 병력도 변변찮을 터. 계획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았다.

미요시 수군이 인근 해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거점이 필요했다. 구루시마 수군의 본거지를 함락시키면, 따로 군항을 공들여 구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자의 목을 내걸고 항복을 요구해 보면 어떨까?”

스즈키 시게히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도 지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이 주장에는 단조도 동의했다.

“지금 구루시마에 있는 놈들의 거점은 텅 비다시피 했을 겁니다. 잘하면 싸우지 않고도 섬을 차지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구루시마 소진의 목을 내밀고, 구루시마에 항복을 요구했다. 성을 지키던 몇 안 되는 이들은 순순히 문을 열었다.

뒤따라온 미요시 수군이 이 섬을 접수하고 거점으로 삼았다.

손실이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재정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부상자 치료와 선박의 수리를 겸해서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무르기로 했다.

“그 철포 좀 볼 수 있을까?”

구루시마의 저택에서 쉬고 있는데, 스즈키가 찾아와 내가 사용한 철포를 궁금해했다. 하지만 나로서도 쉽게 보여 주거나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안 돼.”

“역시 그런가······. 그럼 어디에서 만들었는지라도 말해 줄 수 있어?”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질문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스즈키는 몸이 달았는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심지도 없이 사격이 가능한 데다가, 속사가 가능한 철포라니. 이건 대단한 거라구.”

“물론 대단한 건 맞아.”

몇 가지 한계를 제외하면, 백년은 이른 개념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이마이 소큐조차도 한번 만든 다음에 질색을 할 정도였으니, 사실상 양산은 불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물건이라고 한다면, 욕심에 눈먼 자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사이카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스즈키에게 떡밥을 던졌다.

“사카이로 돌아가게 되면, 이걸 만든 장인을 소개해 줄 수는 있어.”

“정말?”

스즈키 시게히데는 마치 뼈다귀를 눈앞에 둔 강아지 같았다. 만약 꼬리가 있었다면 그 회전력으로 공중에 뜰 수도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잘하면 사이카슈를 통째 수하로 들일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맨입으로는 안 되지.”

“고용주 나리, 말씀만 하십쇼.”

“진정해. 아직 사카이로 돌아가려면 멀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말을 흐리자 상대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적당히 기다려서 초조하게 만든 다음, 뒷부분을 이었다.

“이 총을 만든 장인은 같은 물건을 다시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거든. 설득하려면 어지간한 수단으론 어렵지 싶어. 뭘 준비해 가는 게 좋을지, 나도 생각을 좀 해야겠어.”

거짓말은 아니다.

이마이 소큐는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 권총을 한번 만들어보고서는 양산할 수 없는 물건이라고 선언까지 한 상태였다.

“역시, 그렇게 자존심 강한 장인이라야 네가 썼던 철포도 만들 수 있겠지. 좋아.”

그는 내 말을 듣고 선선히 물러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다음, 나는 품에서 다시 권총을 꺼내들었다. 아까는 겨를이 없어서 넘어갔다가 그대로 까먹었지만, 사용한 이상 손질을 해야 했다.

총신과 약실을 분리해서 황동솔로 그을음을 털어내고, 목면 조각으로 말끔하게 닦아냈다. 마지막으로 기름칠까지 한 다음, 다시 약실에 탄을 채워 넣고 뚜껑을 닫아 밀봉했다.

할 일은 모두 마쳤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다시 한 번 권총을 살펴보았지만, 뭔가를 빼먹진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게 무엇이었는지는 잠자리에 들고 나서 알 수 있었다.

영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피가 튀는 전장과, 구루시마 소진의 목, 그리고 목 없는 시신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잠을 청하려 애썼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운 건 아니었다. 그는 흉흉한 살기를 뿌리며 나를 죽이려 했다. 그러니 내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딱 수면을 방해할 만큼의 불쾌함이 남은 것 같았다.

“산책이라도 나갔다 올까.”

찬 바람에 머리라도 식히면 잘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마당으로 나갔다. 장마도 끝나고, 태풍도 지나간 가을의 밤은 쌀쌀했다.

차라도 한 잔 마시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소에키라면 좋은 상담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달이 중천에 뜬 시간. 한창 자고 있을 시간에 찾아가기는 곤란했다.

마침 보름달이 떠 있었기에, 달구경이나 하면 좀 숙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을 감상하다가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나는 스즈키나 그 부하가 호위를 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요시히메 님?”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이었다. 덕분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살짝 길어진 단발머리를 그대로 하고, 평상복의 수수한 차림으로 천천히 마당을 거닐던 요시히메가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어,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녀는 내 쪽을 보다가 다시 하늘에 뜬 달로 고개를 돌렸다.

“달을 구경하시는 중이셨습니까?”

“응.”

잠시 정적이 흘렀다. 딱히 할 말은 없었고, 그녀도 마찬가지일 터. 우리는 조용히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러던 중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누우면 낮의 광경이 계속 떠올라서,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습니다.”

“전장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

“네.”

말하는 투는 상당히 익숙한 경험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그녀도 요시오키로 위장해서 출전까지 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저쪽이 습격을 해 온 거잖아?”

“그렇지요.”

따지자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린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쪽의 준비태세와는 별개로, 저쪽의 적대적인 의도를 가지고 공격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리 선단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어.”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네 손으로 직접 사람을 쏘기도 했으니, 더 마음에 남았겠지.”

“그런 건······.”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적을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 딱히 그 일이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시히메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닌 거 같아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경험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겠어?”

듣고 보니 옳은 말이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곱씹을수록 긴장이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요시히메는 한번 내 쪽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미소와 더불어 달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보였다.

“이제 슬슬 졸린 거 같네.”

아닌게 아니라 그 말대로 서서히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그 기색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면, 요시히메의 상담이 효과가 크긴 컸던 것 같았다.

“네······.”

“먼저 들어가. 나는 달을 좀 더 구경할 거라서.”

예의상 그럴 수는 없었지만, 쏟아지는 잠에 못 이긴 척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꿈 한번 꾸지 않은 편안한 밤이었다.

*       *       *

이틀이 지나고, 다시 바다로 나섰다. 이번에는 지난번 항해와는 달리, 넓은 바다로 직행했다. 하지만 아무도 습격하지 않았다.

“아예 덤빌 생각이 없는 거 같은데?”

실전 지휘를 맡은 스즈키는 허탈해했다.

대놓고 구루시마 본가가 있다는 고고지마 앞바다를 지나갔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항구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다면, 이쪽으로서도 어쩔 도리는 없었다. 결국 안전권에 들어선 뒤, 미요시 수군은 구루시마로 돌아갔다.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단노우라는 모리 수군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서로에게 척질 생각은 없었기에, 통행세를 지불하는 걸로 넘어갔다.

한 차례의 격전을 치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단은 예정에 늦지 않게 하카타에 도착했다.

나는 진작에 거래를 터놓은 하카타의 오도시요리, 스에츠구 코젠을 찾아가 맡겨놓은 물목을 인수받았다.

“미곡이 일만 석인데······. 게다가 구리에, 유황, 물소뿔까지, 일단 준비해 놓기는 했소만.”

“이번에는 미곡만 가져가도록 하지요. 나머지는 다음에 가져갈 테니, 보관만 잘 해 주십시오.”

쓰시마를 먼저 뚫어놔야 했기 때문에, 나는 먼저 쌀부터 실어가려 했다. 그런데 스에츠구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되도록이면 빨리 가져가시구려. 다이묘께서 눈독을 들이시는 터라 상당히 곤란하단 말이외다.”

구리는 몰라도, 유황은 화약 제조에 필요한 전략 물자였다.

모리 가문과 오토모 가문은 한창 북큐슈를 다투는 중이다. 이만한 물자가 쌓여 있다면, 수세에 몰린 오토모 측으로서는 군침을 흘리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일단 쌀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져가는 편이 낫겠군요.”

“제발 좀 그러시오. 미곡뿐이라면 우리도 부담이 덜 할 테니.”

계획을 바꾸었다. 쓰시마에 물자를 쌓아놓고, 미곡을 가져가서 달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오토모 소린보다는 쓰시마 도주를 상대하기가 더 편할 터였다.

필요한 모든 짐을 싣고, 우리는 쓰시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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