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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7화 (27/225)

27화 조선을 만나다 (8)

“무사가 거처하는 성은 개인과 군대를 보호하는 데만 치중했습니다. 하지만 사카이를 두를 성곽은 마을 전체를 보호해야 하지요.”

일본의 성은 철저히 거점 방어에 치중해 있었다. 정확히는 들어앉아 있는 다이묘를 지키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성의 규모는 좁고, 내부는 미로처럼 꾸며 놓아서 진입을 최대한 분산하는 구조. 방어력만 놓고 본다면 나름대로 가치를 인정해 줄 정도는 되었지만, 그뿐이었다.

바다는 수군을 동원해 막는다 쳐도, 사카이를 둘러싼 해자의 길이는 5km를 살짝 넘긴다.

기존의 축성술로 감당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그렇게 하자면,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충분한 원거리 교전 능력, 나머지 하나는 그 능력을 살릴 수 있는 구조의 성곽.”

“창칼이 아니라 철포 위주의 배치를 생각하셨군요.”

이마이 소큐는 뾰족하게 생긴 부분을 보고 떠오르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이 부분을 각면보라고 할 텐데,”

나는 도면 위에 붉은색으로 사선을 그어 가며 설명했다.

“보시다시피 이 형상에서는 사각지대가 없어집니다.”

적군이 성벽에 달라붙기 시작하면, 떨칠 방법이 여의치 않았다. 고작해야 성벽 위에서 기어올라오는 적을 밀어내는 것이 한계였다. 그걸 막기 위해서 돌출부가 생겨났지만, 정작 그 돌출부에 공격이 집중되면 상황은 마찬가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 구조에서는 보 뒤편의 성곽이나 공격을 받지 않는 다른 보에서 화력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바위를 가져다가 쌓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긴 어렵겠지요. 게다가 일전에 하카타를 다녀오면서 보니 대포라는 걸 이용해서 성벽을 무너뜨린다 하더군요. 성벽이 단단할수록 취약하다고 하니 경사진 흙벽으로 짓는 편이, 가성비는 훨신 좋을 겁니다.”

내 말을 듣자 유일하게 이 방식을 이해한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시는 동안 힘 써서 지어놓겠습니다.”

*       *       *

장마도 끝나고, 태풍도 전부 지나간 가을날, 스무 척의 관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이 출항했다.

짐은 하카타에 있으니, 당장 배에 실린 짐은 없었다. 식량과 화약만 넉넉히 실었기 때문에 경쾌한 속도로 바다를 나아갔다.

쇼도시마를 지나자, 한 무리의 선단이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걸 확인하고서 단조를 쳐다보자, 예상대로의 답을 내놓았다.

“저들이 지원군입니다.”

중간에 기착하는 일 없이, 일전에 묵었던 카이간지까지 순식간에 주파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경계해야 할 해역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곶을 돌아서 넓은 바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변했다. 그리고 곧 보고가 하나 올라왔다.

“전방에 소조선 한 척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디 소속인지는 확인했어?”

“세 줄의 물결무늬 깃발이었습니다.”

기함에 승선해 있었던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세 줄의 물결무늬. 구루시마 가문의 문장이었다. 그들이 우리의 목표였다.

“정말 습격해 올까?”

“안 오면 그거대로 좋은 거 아닐까?”

“그렇네.”

만약 별일 없이 지나가게 된다면, 뒤따라 오고 있는 미요시 수군은 헛짓거리를 하게 된 꼴이 된다. 대신에 위험을 무사히 넘기게 될 터였다. 그러나 예상대로 구루시마 수군이 습격해온다면, 이야기는 반대로 된다.

미리 준비해둔 보람과 위험의 감수. 어느 쪽이 가치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선단의 좌측 전방에 상당한 숫자의 배들이 보였다. 그들의 방향부터가 결코 이쪽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전원 전투 준비!”

실전 지휘는 스즈키가 맡기로 했다.

“다시 말하지만, 갈고리가 걸릴 때까지 사격은 금지야.”

“하. 몇 번을 말하는 거야? 나도 충분히 알아들었어.”

철포와 화살에 공격받아도 인명 손실은 일어나지 않도록, 일부러 측면의 선체와 난간을 두껍게 만들었다.

각 배에 나눠서 승선한 사이카슈가 첫 발을 쏘고 나면, 나머지 경비대 소속 철포수들이 순서대로 사격할 예정이었다. 작전에 사카이 경비대의 낮은 숙련도를 반영했다.

스즈키는 나팔총의 위력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가까이에서 사격하는 편이 명중률이 높다는 건 공감하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정말 효과는 있는 거겠지?”

“물론. 나는 목숨이 걸린 일에 장난칠 생각 없어.”

상대의 선단에서 작은 배들이 속도를 내며 따라붙기 시작했다. 역시 이쪽의 발을 묶어둔 다음, 본대가 접근해서 결전을 벌일 의도로 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적이 접현할 때까지 철포 사격은 금물이다!”

스즈키가 악을 쓰다시피하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다가 내게도 한 가지를 요구했다.

“이제 넌 선실로 내려가. 전투 인원도 아닌 자가 나와 있으면 방해가 돼.”

“아니. 이 선단의 책임자로서, 지켜볼 의무가 있어.”

내 말을 들은 스즈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더 이상 대피를 권하지 않았다.

“이번 고용주는 꽤나 용기 있는 분이군. 좋아, 대신에 망루를 벗어나지 마.”

선실 다음으로 안전한 장소가 바로 배에 달린 망루였다. 전장 상황을 확인하기에도 괜찮았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양측 모두 서로에게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주변의 적은 대부분 높이가 낮은 배였기에, 화살의 사거리는 이쪽이 유리한 편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전과나 피해는 나오지 않았다.

- 와아아이이이!

적이 함성을 내지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간간이 철포 소리도 요란하게 들렸다.

아군 배 하나에 적선이 갈고리를 거는 것이 보였다. 다른 배에도 차례차례 구루시마의 소조선이 접근해 왔다.

계획대로 접현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 측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사격을 개시했다.

*       *       *

“이부키지마(伊吹島이취도)에서 파발이 들어왔습니다. 관선 스무 척, 모두 미요시 가문의 기를 내걸고 있답니다!”

구루시마 소진은 모처럼 사냥감을 맞이해서 기분이 좋았다.

비록 방계임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뿌리인 구루시마(来島내도)에서 해적을 이끌고 있었지만, 본가는 고노 가문의 거성과 가까운 고고지마(興居島흥거도)로 옮겨간 지 오래였다.

벽지나 다름없는 섬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차에 만만한 녀석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떤 애송이가 만용을 부리는지는 모를 일. 아무리 체급이 크다고는 해도 고작 스무 척의 관선이다. 그리고 이쪽은 수백 척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없나?”

“반나절 거리에 도합 백 척이 조금 안 되는 선단이 뒤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잡아먹고 빠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구루시마가 보기에 소조선을 먼저 접근시켜서 발을 묶고, 관선이 합류해서 친다면 승산은 차고도 넘쳤다.

“좋다. 전원 출격한다! 소조선이 선행해서 붙잡아 둬라. 아니, 내가 직접 선봉에 서겠다.”

쇼진은 자신의 기함 대신 작고 경쾌한 소조선에 올라탔다.

적은 화살을 어지러이 날릴 뿐, 적극적인 항전 태세를 보여 주지 않았다. 소조선으로 관선의 정면을 가로막으면 그대로 가라앉을 뿐. 이럴 땐 측면으로 다가가 접현한 다음, 육박전을 벌여야 했다.

구루시마 소진은 선봉대에게 평소대로 지시를 내렸다.

“갈고리를 걸어라! 밧줄을 단단히 묶어서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 거다! 철포를 든 녀석들은 도선하는 병력을 잘 엄호해라!”

모든 과정이 구루시마가 계획한 대로 착착 맞아 돌아갔다.

단단히 고정된 상대의 배 위에서 특이한 철포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타다당!

갑작스러운 상대측의 일제사격. 그 한 번으로 접현한 소조선의 병력 절반이 쓰러지는 걸 보고 말았다.

“우리 쪽 철포수는 뭐하고 있나! 엄호하란 말이다!”

처음은 습격의 효과와 우연이 겹친 거라 생각한 구루시마는 병사들을 재촉했다.

하지만 한 번 더 도선을 시도했을 때,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야!”

분을 이기지 못한 구루시마가 악을 썼다.

“조준하기도 전에 나타나서 쏘고 사라집니다.”

“멍청한 녀석들.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곁에 있던 부하 하나가 애써 아군의 실책을 변호하려 했지만, 구루시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몰아붙여! 이제 놈들은 철포를 장전하고 있을 거다. 그 틈에 건너가! 아니, 내가 앞장서겠다. 겁쟁이들은 내 뒤나 따라오라고 해!”

순식간에 수십 명이 쓰러질 정도의 일제사격이라면, 이제 한동안 장전하느라 정신이 없을 터. 이쪽의 피해만 보였을 뿐, 몇 명이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이 뒤집힌 해적 두목은 앞장서서 적선에 건너가려 했다. 거리가 절반쯤 남았을 때, 갑자기 난간 위로 철포를 든 병사들이 나타났다.

“아, 아니······.”

총구의 방향은 자신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지 않아 안심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바다로 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첨벙.

물에 떨어지면서 그는 격심한 고통을 느끼고 정신을 잃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다.

*       *       *

스즈키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맹랑한 고용주는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과연 처음 보는 철포가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밧줄이 걸렸습니다!”

“기다려, 좀 더······. 됐다, 쏴라!”

한 차례의 사격이 끝나고, 다음 조가 재차 적을 쏘았다. 숨었다가 사격하기만을 반복할 뿐이라, 적선의 상태가 어떤지는 직접 볼 수 없었다. 전과가 궁금해진 그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상대를 확인했다.

“사격 중지! 밧줄을 끊고 다음 접현을 준비해라.”

철포수들조차 대충 방향만 잡고 쏜 다음 숨기를 반복했기에, 달라붙은 적선의 상태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조가 지시받은 대로 하려다가 스즈키의 외침을 듣고, 행동을 중단했다.

관선 옆에 붙은 구루시마 소속의 소조선에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신 중에 멀쩡한 사람 형태를 하고 있는 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된 채, 고개를 처박고 벌벌 떨기만 했다.

“뭐 이런······.”

*       *       *

구루시마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모든 걸 잃고 말았다. 이제 남은 길은 하나, 어떻게든 적선에 올라가서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무사가 목숨을 건지려고 바다에 표류했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차라리 전사하는 게 나을 정도로 처참한 꼴을 겪게 될 터였다.

그는 칼을 선체에 꽂으며 가까스로 기어올라갔다. 다행히도 승리에 취한 적들은 그가 뱃전에 올라갈 때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흐흐. 나 구루시마 소진, 한 놈이라도 더 길동무로 데려가겠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철포를 들고 있었지만, 심지는 꺼진 상태였다. 몇 명의 창병이 모여들어 앞을 막아섰지만, 척 보기에도 그들의 자세는 어설펐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들은 한 군데를 보호하듯 막아선 배치를 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잘 차려입은 꼬마 하나. 제법 가치가 있어 보였다.

“오호라. 저놈이라도 죽이면 분이 풀릴 것 같구나!”

구루시마는 몰려드는 창은 칼을 들어 쳐내고 곧장 목표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그 꼬마가 품 속에서 작은 철포를 하나 꺼내들었다. 하지만 역시 불타는 심지는 달려 있지 않았다.

“고작 그걸로 어느 세워······.”

탕!

심지가 화약을 점화시킨 것도 아닌데, 철포가 불을 뿜었다. 하지만 한 발쯤 맞았다고 해서 쓰러질 수는 없는 일. 정신을 차린 그는 마저 다가가려 했다.

탕! 철컥, 탕! 철컥, 탕!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표적으로 삼았던 자는 자신의 철포를 어떻게 조작하더니 연달아서 쏴 댔다.

그것이 구루시마가 이승에서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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