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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6화 (26/225)

26화 조선을 만나다 (7)

미요시 가문의 당주는 전에 마주했을 때보다는 활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느낌은 결코 산 사람의 생기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보다는 회광반조에 가까운 모습 같았다.

그는 내 일행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한참을 살피고 또 살핀 다음에야 자신의 딸인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너에게는 할 말이, 없군. 해봐야 미련만 남겠지. 잠시 나가 있도록.”

나는 그대로 축객령을 받고 나왔다. 원래는 내가 당주의 호출을 받은 쪽이었다. 하지만 자기 딸이 직접 온 이상, 그녀에게 말하는 편이 낫다고 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부녀 상봉이 될 터. 외부인은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도리였다.

밖에는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여전히 입구를 지키고 서서 나가요시의 호위를 서고 있었다.

그는 나를 흘끗 보고도 아무 말 없이 경비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 주군을 잡아먹고, 오다 노부나가에게 도전하다가 패망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마치 충견을 연상시킬 정도로 착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와 접점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침묵이 공간을 차지했다.

졸다 깨다, 다시 깨다 졸다를 반복하고 있으니, 안에서 요시히메가 나왔다.

“이제 가자.”

“제가 인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냥 가라고 하셨어.”

어둡던 밖은 어느새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마냥 기다리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를 챘는지,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요시히메도 자기 가문의 중신에게 맞인사를 건넸다.

“제부, 동생을 잘 부탁합니다.”

요시히메가 열셋이니, 그 동생이면 훨씬 어릴 터. 하지만 실제로도 그가 나가요시의 사위이기도 했고, 신변을 보장해두려는 차원에서 미리 맡기려는 듯한 뉘앙스였다. 아마도 내가 보지 못하는 영역에서 이야기가 다 끝난 것 같았다.

그것이 요시히메가 자기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요시히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밀을 지키기 위한 침묵이라기보다는, 감정에 눌려 있는 것 같았다.

사카이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와서야, 겨우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단조가 내 얼굴에 대체 뭘 발라놓은 거람.”

“잘 숨겨놓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이제 안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는 자기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며 칠한 부분을 벗겨내려 들었다.

“어어어, 아직은 안 됩니다. 보는 눈이 많다구요.”

내가 말리자, 그녀는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나도 한참을 마주했다. 그러자 상대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이런 게 아홉 살짜리야? 어린 아이다운 구석이 하나도 없네.”

“아가씨도 생사의 기로에 서 보셨으면 말을······.”

나도 원래는 이럴 생각이 없었다. 얌전히 때를 기다리다가 흐름을 탈 계획이, 아시카가 막부와 미요시 가문 사이에서 휘말려서 이렇게 된 거였다.

그 생각으로 면박을 주려다가 떠오른 것이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요시히메도 결코 순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아니었으니, 괜한 말을 한 것 같았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닙니다. 그냥 가시죠.”

“뭔데, 입 밖에 냈으면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녀는 나를 계속 독촉하다가 지쳤는지, 그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별채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머리 두건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우물가로 가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변장을 깨끗이 씻어내려 했다.

“으아아, 갑갑해서 혼났네!”

몇 번을 물로 씻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굴과 눈가가 벌게지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녹두를 내다가 다시 박박 긁어내듯 세수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물기를 닦아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불쑥 다가왔다.

“변장이 남아 있어?”

티 없이 깨끗한 얼굴이었다. 전에 남장한 상태로도 대면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다른 여인들처럼 이를 시꺼멓게 해놓지도 않았고, 그야말로 백옥같은 외모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야. 아직 찌꺼기가 남았어?”

그녀가 입을 한 번 더 열고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닙니다. 깨끗하게 지워졌습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후우······. 진정하자. 혹여라도 저 아가씨에게 마음 뒀다간 큰일 난다.’

다행히도 내가 당황스러워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요시히메는 내게 다시 확인하듯 물어보았다.

“정말이야?”

“안에 거울도 들여놨잖습니까. 직접 보시죠.”

내 말을 듣자, 그녀는 안채의 자기 방으로 홀랑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내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       *       *

아쿠타가와 성을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다. 그 동안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노꾼들은 배에 익숙해졌고, 사카이 경비대 중에서 철포에 익숙해진 자들도 늘었다.

- 이제 총을 쏠 줄은 알게 됐으니까,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겠지.

스즈키 시게히데(鈴木重秀영목중수)의 평가였다. 그는 사이카슈 수장의 아들이기도 했고, 스스로도 뛰어난 철포수였다. 자기 자부심이 있는 자였으니, 믿을 만한 말이었다.

일전에 하야시를 시켜서 하카타에 물자를 모아 두도록 한 것도 모두 끝났다고 전갈이 왔다.

배가 뜨기에도 적당한 시기였다. 가을의 바다는 잔잔해서 멀리 나가기도 좋다고 했다.

출항하기 전, 나는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아버지도 이제 이 자리에 함께하고 계셨다. 정확히는 뜻을 같이한다기보다는, 이제 붙잡은 동앗줄을 갈아타신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단조. 그도 내 호출로 동석했다. 조선에 다녀온 뒤라면, 그는 자기 주군이 죽고 없을 상태가 될 터. 요시히메도 타향에 남아 있을 예정이니, 이제 내 수하가 될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알면 안 될 정도의 위험한 말은 나오지 않을 자리였다.

“제가 조선에 다녀오려면, 아마 내년 이맘때쯤에나 돌아올 것 같습니다.”

빠르면 내년 봄에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지만, 바닷길은 생각대로 굴러간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넉넉하게 1년을 예상 기한으로 잡았다.

모두들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지, 입을 여는 대신 긍정의 눈빛만을 빛내고 있었다.

“단조, 아와지 수군의 동원은 어떤가?”

“관선은 삼십 척, 소조선은 오십여 척을 끌어올 수 있다고 하오.”

수군 전부를 동원할 수는 없었지만, 미요시 나가요시의 밀명으로 최대한 많은 수를 데려갈 계획이었다.

그들은 이요 수군과 결전을 벌인 뒤, 그 해역에 남아서 장악하는 역할을 맡게 될 터였다.

아와지 수군의 세력 전부를 들어서 친다면, 삼사백 척은 거뜬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남쪽 해역도 염두에 두어야 했고, 아타기 무네시게의 반발도 고려해서 그렇게 정했다.

“언제까지고 통행세를 물어줘 가면서 다닐 수는 없으니, 차질 없이 준비 해주게.”

“알겠소.”

나는 소에키에게 고개를 돌렸다.

“큐스쿠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제 제자들에게 가르칠 건 다 가르쳐 두었습니다. 고니시 님이나 제가 자리를 비워도 큐스쿠도는 잘 돌아갈 겁니다.”

나와 소에키가 합동으로 세운 식당의 이름이 큐스쿠도였다. 초창기에는 공장의 직공들을 위한 식사 공급을 담당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이제 와서는 사카이에 필수불가결한 거대 외식업체가 되어 있었다.

가재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뜨내기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만약 큐스쿠도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공백은 마을 내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 수도 있었다.

자신 있는 선사의 대답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먼 길을 다녀오실 순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심신의 채비를 모두 갖춰 두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내가 마을 밖에서도 전면에 나설 수는 없었다. 백배 양보해서 쓰시마에서야 총칼로 윽박지른다 해도, 조선에서까지 그러긴 곤란했다.

그래서 소에키 선사가 얼굴마담 역할을 맡기로 했다. 그는 이제 에고슈의 일원도 아니었다. 자신의 여동생과 매제가 본격적으로 사업을 맡으면서, 다소 한가로워진 상태. 게다가 조선의 조정을 상대하려면 교양도 필수적이었다.

마침 조선의 다기에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그들과 말문을 틀 수 있는 적격의 인사였다.

다음은 직조 공장을 맡고 있는 하야시 쿠사로와, 와타다 오리시로, 두 사람이었다.

“두 분은 착실하게 공장 경영에 힘써 주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폭리를 취하지 않고,”

“시장 점유와 사카이 안정에 중점을 두라. 이 말씀 아니십니까?”

그들은 스스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두 분께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군요.”

내 칭찬에 그들은 씩 웃었다.

다음은 아버지와 이마이 소큐였다.

“아버지께서는 소큐 님을 도와주시고, 에고슈를 장악하는 일에만 신경 써 주십시오.”

“무, 물론이지.”

다소 못 미더운 구석은 있으셨지만, 소큐를 돕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관료라도 늘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당에서 설립한 학교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일도 사카이의 수장격인 오도시요리, 이마이 소큐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없는 동안, 실질적으로 모든 일을 총괄할 사람이 바로 이마이 소큐였다. 그에게 품에서 비단 주머니 몇 개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배가 출발하거든, 바로 검은 주머니를 꺼내서 열어 보십시오. 거기에 적혀 있는 대로 하시되, 필요하다면 소큐 님의 주관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생길 일들에 관해 적어둔 겁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사카이에 앉아서 변화에 미리미리 대비를 했지만, 또 한 해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쌓여서 터질지 모를 일이었다.

소큐는 공손함이 느껴질 정도로, 조심스럽게 내가 준 주머니를 받아서 품속에 챙겼다

“그리고 이건 역시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준비해 주셔야 할 것들입니다. 모두 사카이의 오도시요리로서 해야 할 것들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내가 내민 건 상당히 기간을 요하는 구상이었으니, 모두가 에고슈에서 여론을 조성해야 할 터였다.

“아버지께서도 내년에 오도시요리가 되시거든, 이 일에도 신경을 써 주셔야 합니다. 물론 모든 분들께서 뒷받침하셔야 되겠지요.”

“그게 대체 무엇이기에 그리 신경을 쓰는 게냐?”

“이 마을을 방어할 수단입니다.”

도면은 경사진 단면도와 전체적인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곽에서 돌출되는 부분인 보가 네모지거나 둥글지 않았고, 뾰족한 모습을 했다.

“이치노스케. 이래서야 적이 타넘기도 쉽게 생기지 않았소이까?”

단조는 보자마자 단점을 짚어냈다. 하지만 신형 총기를 개발 중인 무기상인은 대번에 그 가치를 알아보았다.

“과연······. 혹시 제게 맡기신 연구거리가 이걸 위한 거였군요.”

“그렇습니다.”

다른 이들은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어리둥절할 뿐, 나서려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단조는 자신이 알 필요가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다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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