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조선을 만나다 (4)
이치로는 그다지 편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가닌자라고 하면 다들 이를 갈아서······. 그래도 사지는 멀쩡하다고.”
안내해준 간수의 말대로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서 중상을 입진 않은 듯했다. 하지만 눈두덩이도 시퍼렇고 입술도 터져 있는 걸 보면, 곱게 놔둔 건 확실히 아니었다.
“도, 도련님······.”
나는 안내해준 사람을 보았다. 그는 처음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만났던 문지기였다.
“아무리 봐도 나는 못 알아볼 거 같은데······. 대체 무슨 수로 이가류 닌자인 걸 알아본 건가?”
“그런 티를 풀풀 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당장은 곤란하지만, 기회가 생기면 차차 말씀드리지요.”
역시 자신들만의 노하우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까지 이야기해 주지는 않을 터. 더 캐물어볼 생각은 관두었다.
당면한 문제는 발각된 닌자였다.
“잠시 나가줄 수 있겠나?”
그는 내 부탁대로 순순히 뇌옥을 나갔다. 이제 이 안에는 나와 이치로, 단둘만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우리 집을 감시했었던 건가?”
이치로는 묵묵부답이었다.
“한 가지만 묻자. 넌 누구의 지시를 받았지?”
“단조 님입니다요.”
역시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도 대비해야 했다. 이가닌자가 미요시 가문과 연관이 있다곤 하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돈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어쩌면 이중, 아니, 그 이상 가는 다중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좀 더 정확한 사실을 밝혀내려면 대질만 한 것도 없을 터. 그러려면 일단 집에 돌아가야 했다.
“널 어쩌진 않을 생각이다.”
이치로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래야 요시히메 아가씨도 날 불신하지는 않겠지. 좀 더 확인해볼 것도 있고.”
정말 이치로가 단조의 부하였다면 섣불리 손대기도 곤란했다.
* * *
돌아가는 길에서는 일행이 셋으로 늘었다. 내 호위로 고용한 사이카슈 소속의 철포수 하나가 따라왔기 때문이다.
스즈키 시게히데(鈴木重秀영목중수)라는 이름을 쓰는 마고이치의 아들은 올해로 열셋이라고 했다.
키는 거의 성장이 끝나서 어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이치로의 수상한 신분을 밝혀낸 것이나 다름없어, 능력은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계약은 쌍무적이었지만, 이쪽이 고용주라는 입장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처음에 상당히 어색해하기에 그냥 말을 터놓기로 했다.
그동안 또래라고 할 만한 대상도 주변에 없었고, 사이카슈의 내막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려면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높으신 분이었군?”
“마고이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실 순 없으니까.”
처음 만났던 문지기이자 뇌옥의 간수였던 간부가 사이카슈 수장의 아들이라 했다.
- 당장 붙여줄 수 있는 인원이 하나뿐일세. 나머지들은 복귀하는 대로 보내주도록 하지.
단조 휘하의 이가 닌자들이 지금은 명백히 내 적도 아니었기에, 나도 급한 건 없었다.
“근데 굳이 저자를 살려둘 필요가 있어?”
“이쪽의 사정이라는 것도 있거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치로는 불안해했지만, 내가 안전을 장담했기에 순순히 따라왔다.
“그래도 이건 좀 말해둬야겠는데······.”
“뭘?
“집에 가면 다른 이가닌자 하나가 더 있을거야. 아마도 이치로의 상관인 모양인데, 아직 적은 아니니까 다투진 말라고.”
스즈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고용주님 말씀이니 자제는 해드립죠.”
* * *
집으로 오자마자 나는 별채를 찾아갔다. 다행히도 내가 찾는 사람은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마당에 들어선 걸 보고도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계속했다.
“단조.”
“무슨 일이시오?”
“이치로가 당신 부하라던데 맞소?”
그는 발각된 닌자를 흘끗 보고, 다시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렇소.”
허탈함이 느껴질 정도로 간단하고 담백한 긍정이었다.
“듣기로, 이가류는 돈을 따라 움직인다던데?”
이 부분만은 확실히 해야 했다.
지금은 어떤 인식인지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후대에 이가닌자와 코가닌자의 라이벌 구도는 에도 막부에 정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코가닌자. 그리고 돈에 따라 움직이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은 이가닌자.
지금은 미요시 가문이 이가닌자를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부 사정이 취약해지고 있다는 건 역시 내부인이었던 닌자들이 더 잘 알 터. 이미 끈을 도쿠가와 쪽에 대고 있다면 나 역시도 주의를 더욱 기울여야 했다.
단조는 다음 질문에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 편이오.”
“당신도 그런가?”
“난 다이부(미요시 나가요시) 님과 종신계약을 한 몸이오. 다른 아이들은 내 마을 출신을 데려다 쓰는 중이고.”
아직 이가류 전체로 놓고보면, 주인이 따로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당신들과 계약을 맺고 싶소만.”
“종신계약을 말하는 거라면, 좀 비쌀 거요.”
그가 제시한 액수는 상당히 컸다. 지금의 나로서도 상당히 부담이 되는 가격이었다.
미요시 나가요시는 젊은 시절에 단조의 인생을 샀다고 했다. 그 계약은 닌자가 죽을 때까지, 혹은 주인이 풀어줄 때까지.
그리고 나가요시는 자신의 직계가 완전히 단절될 판이 되자, 요시히메에게 남은 기간을 넘겼다는 것 같았다.
“아가씨께서 다시 그대에게 넘겨주면 나는 그대로 따라야 할 몸이오.”
“다른 자들은?”
“대부분이 임시요. 이중계약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만······.”
대강 원하는 수준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한쪽에만 의존하는 것도 곤란할 터. 당장은 단조와 그 밑의 이가닌자, 그리고 스즈키 시게히데가 이끄는 사이카슈, 양쪽의 상호 견제가 필요했다.
* * *
“소나무로 배를 만들어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조선공은 내 요구를 이상하게 여겼다.
장마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직 태풍이 완전히 끝날 철은 아니지만, 배를 만들어두는 정도는 가능할 날씨라고 생각했다.
지난번, 벤자이센(변재선弁才船)을 샀던 조선소를 찾아가서 제작을 주문하려 했지만, 지금 조선공의 반응은 영 신통치가 않았다.
“소나무, 단단하고 좋지 않나?”
“아휴, 말도 마십쇼. 단단한 만큼 다루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그래 봐야 결국 나무지. 쇠로 깎고 다듬지 못할 이유가 뭔가.”
나는 한선(韓船, 한국 전통 선박)을 떠올리며 재질을 바꿀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조선공은 한사코 삼나무를 고집하려 들었다.
“톱이나 대패가 견디질 못합니다. 아주 조금만 써도 금세 닳아 없어져 버리는데, 누가 소나무로 배를 만든답니까?”
상당히 의외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듣고 보니 문득 왜검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쇠를 접어가면서 두드리는 공법, 접쇠라고 부르는 제작 방식이었다. 문외한은 이것이 마치 대단한 기술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사실은 사철의 불순물 때문에 부득이하게 취한 수단이라 했다.
싸움용도 아닌 톱이나 대패를 접쇠 기법으로 공들여가며 만들 리는 없었다. 그러니 공구의 품질이 조잡한 것도 이해가 갔다.
일본의 사철은 하필 불순물이 티타늄이나 바나듐 따위 까다로운 성분이 들어있다고 했다.
티타늄의 녹는 점은 섭씨 1,668도, 바나듐은 1,910도.
21세기에서도 생으로 녹여서 다루기보다는 화학이나 전기를 이용해서 가공할 수밖에 없는 원소였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500석짜리 세키부네로 해주게.”
“세키부네,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슈리다이부께도 허락을 받은 일일세. 스무 척 정도가 필요하겠어.”
벤자이센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뱃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은 군선으로 분류되어 함부로 마련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미요시 나가요시에게 적대하는 일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행동을 허락받은 상태였다.
발주 규모를 들은 조선공은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만들자면 시간도 많이 필요할 겁니다.”
오백 석이 스무 척이면 석고로 따져서 총 일만 석이다.
“백 석당 하루꼴로 걸린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삼 개월 조금 넘게 걸리겠군.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해보면 앞으로 배가 많이 필요할 예정이었다. 이 참에 조선업에 직접 뛰어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자네, 이 조선소를 팔 생각 없나? 물론 자네를 포함해서 조선공도 전부 채용하고 싶네만.”
“네?”
“말 그대로일세. 품삯은 후히 쳐주지. 인력도 늘릴 수 있게 해줄 거고. 어떻겠나?”
선원들을 모집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노예를 사들여서 조선소에도 투입할 생각이었다. 크고 작은 전쟁이 이어지면서 팔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리고 기존의 숙련공들을 고용할 돈도 충분했다.
“잘 생각해보게. 직접 경영하려면 돈 나갈 구석이 한둘이 아니잖나?”
“그야, 그렇습니다마는······.”
“자네에게는 달마다 은 10문씩, 나머지 사람들은 연차와 실력에 따라서 결정하면 어떻겠나.”
1년 치 석고로 환산하면 그가 받게 될 양은 열두 석이다. 별 고민없이 월급을 따박따박 받아먹을 기회라는 걸 감안하면, 기술자라고 해도 상당한 액수였다.
“그리고 여기도 대를 이어서 경영한 조선소가 아닌가. 그러니 그 값도 쳐주겠네.”
“기꺼이 그리합지요!”
* * *
배를 찍어낸다고 해도 즉시 전력이 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스무 척은 누구 코에 붙이기도 곤란할 정도로 적은 물량. 모리 수군만 해도 수백 척에 달하는 규모였고, 다른 다이묘들도 비슷한 숫자를 갖추고 있었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특별한 수단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미요시 가문은 시코쿠의 아와(阿波아파, 현재의 시코쿠 동부, 도쿠시마 현 일대)국에서 발원해서 기나이를 정복한 세력. 본거지와 기나이를 긴밀하게 연결하기 위해서라도 상당한 규모의 수군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그 힘을 빌리기 위해 단조에게 말을 꺼냈다.
“아와지 수군을 좀 움직이고 싶소.”
“일단 다이부(슈리다이부, 미요시 나가요시)께 말씀은 드려놓겠소만, 시일이 걸릴 거외다.”
“너무 늦지만 않으면 상관없소.”
아마도 내년, 조선에서 돌아온 뒤에나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가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단조에게 미리 언질을 넣어 두었다.
그가 요시히메의 호위를 맡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미요시 나가요시와 꾸준히 연락을 하는 듯했다. 내 부탁에도 곤란을 표하거나 거절하지 않는 걸 보면, 나름의 수단이 있는 모양이었다.
“수군은 숙부가 관장하고 있어서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요시히메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이부의 명이 있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타기 무네시게도 결국 미요시 가문의 가신 중 하나에 불과했다. 당주가 요구하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터.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내 생각과 조금 달랐다.
“그게······.”
“아가씨.”
단조가 설명하려는 요시히메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내가 들킬 뻔했던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이야. 아타기 무네시게, 그러니까 아버님의 둘째 동생이 문제였지.”
아타기 무네시게(安宅宗繁안택종번)라면, 흔히 아타기 후유야스(安宅冬康안택동강)로 알려진 자다.
그는 잔인한 맏형과는 대조적으로, 인격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래서 나가요시가 더더욱 아꼈다는 일화도 있었다.
마지막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조차도 아타기 후유야스 본인의 잘못이나 실책은 아니었다.
죽음을 앞둔 미요시 나가요시가 그에게 할복을 요구해서 그대로 자결했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죽음을 앞둔 당주가 노망이 들었다는 견해가 대세였다.
“아타기 셋츠노카미(종5위하 摂津守섭진수, 아타기 무네시게)가 말씀이십니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여러 일화를 종합해보면, 아타기 후유야스는 자기 형에게 자결을 지시받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나가요시의 뒤를 이은 미요시 요시츠구(三好義継삼호의계)의 실책과 가신들 간의 내분을 생각하면, 그는 살아서 미요시 가문을 지탱할 만한 인재였다.
“아가씨, 가문의 치부입니다.”
단조는 그 한마디라도 해서 자기가 모시는 분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요시히메는 그대로 무시해버렸다.
“단조가 잘 단속할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어차피 조선으로 떠날 무렵에는 아버님께서 숙청하실 텐데, 아무렴 어때?”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요시히메는 과분할 정도로 내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