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조선을 만나다 (3)
나와 이치로는 꼬박 이틀을 걸어서 방금 이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니 저들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요시 지쿠젠노카미(筑前守축전수, 축전국 태수) 요시오키 님의 양자인 이치노스케 유키나가라고 합니다.”
“미요시?”
다행히도 이름값이 먹히기는 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내 양부가 가짜긴 하지만, 그건 알려지지 않은 사실.
이래 봬도 입적한 직후에 사카이에서는 이 신분으로 행세깨나 하고 다녔다. 그 행동으로 여기까지 내 이름이 알려지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같이 온 사람은 고니시 약종상에서 일해온 야마다 이치로라 합니다. 제가 입적하기 전에 쓰던 성이 고니시고, 제 친부는 약종상의 상방이신데 고니시 류사라는 함자를 쓰십니다.”
필사적으로 내 내력을 대면서 수상한 사람이 아님을 강조했다.
“미요시 가문과 관련이 있다잖습니까. 이자도 이가(伊賀이가)류 닌자일 겁니다!”
“기다려. 첩자랍시고 온 자가 대놓고 그렇게 말하겠나? 게다가 입적은 함부로 입에 올릴 게 아니잖아.”
아무래도 내 노력은 효과와 역효과를 모두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병사들은 미요시라는 이름에 이가류라는 이름을 연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의 우두머리는 좀 더 두고 지켜보자는 입장을 취했다.
“일단 신원을 확인할 때까진 얌전히 있어 줘야겠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 * *
“무슨 돈이 이렇게 많아?”
소지품을 모조리 빼앗겼다. 그 과정에서 내가 들고 갔던 돈도 그들에게 드러났다.
“고용 계약금으로 들고 온 거요.”
“흐음······.”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눈에는 흥미와 호기심, 그리고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여러모로 첩자 취급을 하기에는 아귀가 맞지 않을 터. 발각될지도 모를 간자가 돈을 잔뜩 들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는가.
“몇 살이냐?”
“올해로 아홉이오.”
내 나이를 듣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새파랗게 어린놈이 철포수를 고용하겠다고 온 거냐? 거, 세상 참······.”
“필요하니까 온 거 아니겠소?”
이렇게 대꾸하는 동안에도 몸수색은 계속되었다. 사이카슈(雑賀衆잡하중)의 병사들은 옷가지를 제외한 전부를 몽땅 다 털어갔다.
“여기 품에서 나온 은전 주머니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평범한 소지품입니다.”
“그런가? 알았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 대꾸한 뒤,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장 수상쩍은 구석은 없군. 하지만 네 말과 소지품만 가지고 온전히 믿기도 어렵다. 그러니 알아볼 동안 좀 기다리고 있어라. 사카이에서 왔다고 했나?”
“그렇소.”
“그럼 한 대엿새쯤 걸리겠군.”
이들은 포승줄로 내 손을 묶어놓고 나가버렸다.
뇌옥에는 나 혼자 남았다. 아마도 이치로와는 격리해 둔 것 같았다.
“일단 기다릴 수밖에 없나······.”
하루가 지나고, 갇힌 지 이틀째 되는 날도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쯤, 나를 여기에 가두었던 자가 식사를 가져왔다. 밥은 딱 연명할 만큼의 죽이 나왔고, 먹는 동안에는 손을 풀어주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지?”
그는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말을 걸었다.
“뭐가 말이오?”
“정황 증거가 반반이야. 네가 첩자라는 것과 아니라는 것. 그리고 확증이 하나 있긴 한데······.”
“그럼 풀어줘야 하는 거 아니오이까?”
내 말에 상대는 피식 웃었다.
“그 확증대로라면 너하고 네 일행, 둘 다 죽었어.”
“그, 그게 무슨 말이오?”
“그 이치로라고 했던가? 그놈 이가류의 닌자가 맞던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간수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솔직히 네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별로 믿음이 가진 않아.”
둘 중의 하나가 닌자라면 나머지 하나를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긴 하다. 그런데 이치로가 닌자였다니? 사환으로서 약종상에 들어온 기간이 상당한데, 대체 무슨 이유로 그를 닌자라고 지목한단 말인가.
내 반응에 상대는 친절할 정도로 설명을 해 주었다.
“보통 닌자들은 수상함을 최대한 감추려 하지. 그런데 어떤 녀석들은 제 버릇대로 굴다가 발각되는 경우가 많아. 네 일행도 그래서 걸렸고. 하지만 너는 참 이상하단 말이야?”
“일단 이치로가 닌자인 이유나 좀 듣고 싶소.”
갇힌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돌한 태도라고 해도 좋을 터. 하지만 이미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조금 무례하게 군다고 딱히 바뀌는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정말 몰랐나? 그럼 네가 감시 대상일지도 모르겠는데?”
“뭐요?”
그 말에는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체포당할 때, 미요시라는 말에 누군가가 이가류라고 단정해버리기도 했다.
내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했는지 상대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고 있었다.
“진짜 아닌가. 네 꼴을 보아하니 짚이는 게 있나 본데······. 말해주면 당장 석방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
“있다곤 해도 나와 이치로의 문제요.”
정황을 밝혀내더라도 내가 온전히 내막을 알아야 했다. 당장 저들이 나를 풀어준다 해도, 이치로가 죽어버리면 의미가 없었다. 단조는 아직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웠다. 직접 손에 쥘 수 있는 실마리가 필요했다.
내 말을 들은 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하겠지. 일단 기다리고 있어 봐.”
식사가 끝나자 뇌옥에는 다시 혼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가만히 상황을 되짚어 볼 겨를도 없이 도로 불려나갔다.
“마고이치께서 찾으신다.”
아무래도 내 이야기가 사이카슈의 수장,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영목손일)에게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마고이치의 집무실로 안내를 받았다.
마고이치는 용병이라기보다는 관료나 현대의 변호사 같은 느낌이 드는 자였다.
“하 수상한 시절이라, 결례를 저질렀군. 하지만 사과는 할 수가 없네. 이유는 알 걸세.”
사이카슈는 내 신원에 대한 의혹을 모두 풀어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기네로서도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는 당연했다는 태도였다. 그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미요시의 양자에게 마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해주고 싶진 않군.”
역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철포수를 고용하는 일도 불가능합니까?”
“얼마를 부를지, 그리고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역시 사이카슈도 돈에 움직이는 단순한 용병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독주하는 세력을 견제하면서 자기네 밥벌이를 챙기는 조직처럼 보였다.
역사를 살펴봐도 그런 모습을 보이긴 했다. 대부분의 다이묘가 사이카슈를 고용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항상 독주하는 세력에 대한 포위망에 가담해 있었다.
사이카슈의 용병 이미지 때문에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상당히 안일한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이들로 누군가를 치기 위해 고용하러 온 건 아니었다.
“1년간 철포수 200명, 신병의 사격 훈련과 선박 호위 목적입니다.”
“200명? 사격훈련이야 어려울 건 없지. 하지만 선박 호위는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는데.”
역시 이 시대에 배를 타고 나간다는 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 하지만 바다로 나가면서 인건비가 올라가는 건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직 해전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일본에서 화약 병기를 활용한 전술은 상당한 효과가 있을 터였다.
다행히도 내가 준비해간 액수는 원하는 만큼을 고용할 정도가 되었다.
“계약금은 넉넉하군. 월급은 하루라도 밀리면 바로 계약해지이니 주의하시게.”
거래가 성사되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마고이치의 집무실에는 주인을 제외하면 누구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석방되었으니, 이치로도 풀려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싶었다.
“음? 누굴 찾나?”
“제가 석방되었는데, 제 일행도 같이 풀려나야 하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자네도 속았다는 것 같은데?”
역시 간수가 뇌옥 안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보고했던 모양이다. 사이카슈의 수장은 꾸러미 하나를 내놓았다.
“열어 보게. 그자의 소지품 중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이지.”
꾸러미를 풀어보니, 안에는 큰 원 하나를 둘러싼 아홉 개의 원이 그려진 표식, 그리고 수리검 따위가 들어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하고 꾸러미를 다시 묶어놓자 마고이치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닐세. 자네 일행의 몸에는 문신도 새겨져 있더군. 상당히 오래된 것이니 보면 알 걸세.”
이어서 그는 내게 큰 호의라도 베풀어준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 발밑에 숨어 있던 이가닌자 녀석, 우리가 처리해주도록 하지. 물론 가는 길도 우리가 호위하도록 하겠네. 이미 계약이 끝나지 않았나? 철포수 몇 명 정도는 미리 보내도 상관없어.”
“이치로는 사카이에 있다가 저와 같이 움직였습니다. 같은 이가류라고 해도, 이 마을에 피해를 끼친 당사자는 아닐 텐데요?”
마고이치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내가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불편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그놈을 사도록 하지. 믿을 수 없는 놈이니 자네에게도 좋은 이야기가 아닌가.”
“굳이 이치로를 넘겨받으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가류 놈들이 우리 마을을 침입했어. 사이카류의 계승자로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이야. 같은 닌자끼리는 서로 조심하는 것이 우리 사이의 불문율이라네. 본보기를 보여줘야 하는데, 마침 같은 이가류의 인간이 잡히지 않았나.”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가류가 이가류와 더불어 닌자 유파의 양대 산맥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사이카도 닌자였다고?
“닌자가 꼭 숨어서 누굴 암살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만 하는 건 아니지. 그 자존심 높으신 무사 나으리들이 체면 깎이는 일을 도맡아 하면 그게 전부 닌자야.”
이건 또 의외인 이야기였다.
“물론 우리가 철포만 쓸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간토의 후마(風魔풍마)류가 기마술만 내세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이번처럼 간자를 잡아내는 것 정도는 기본이라네.”
“그렇습니까?”
이들을 좀 더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현대의 군사 조직 내부에도 반드시 공격적 성향의 정보 부대만 있는 건 아니지 않던가.
요시히메를 조선에 무사히 데려다주면, 단조는 내 휘하로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도 곤란한 일. 다른 닌자 조직이 상호 견제를 해준다면 나로서도 보험 하나를 더 들어두는 셈이었다.
게다가 이치로를 압박하기에도 괜찮은 수단이 될 것 같았다.
“한 열 명쯤 더 고용하는 대신에, 이치로는 그냥 보내주셨으면 좋겠군요.”
“열 명을?”
“그렇습니다. 대신에 단순한 철포수가 아니라, 닌자를 상대할 수 있는 자들로 쓰고 싶습니다.”
내 말을 듣더니 마고이치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 녀석이 뭐 자네에게 얼마나 믿음을 주었기에? 하지만 그만큼의 계약을 할 수 있다면, 우리도 감수하지 못할 건 아니지. 호위라도 두려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이상한 사람이로군. 처음에는 이치로가 자네 호위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고······.”
“그렇다면 이참에 서로 신뢰를 쌓아보는 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