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조선을 만나다 (2)
“날이 어두우니 내일 출발하도록.”
알현실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한밤중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요시 나가요시가 권하는 대로 아쿠타가와 성에서 하룻밤을 지샜다.
다음날, 성을 나서려는데, 남장을 한 요시히메와 마주쳤다.
“준비가 다 되는 대로 서신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나 역시 지금 사카이로 갈 생각이니.”
그러고 보니 이 아가씨의 손에 보따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디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적어도 내가 소재를 알아야 조선에 건너갈 때 챙길 것이 아닌가. 아무리 숨어 지내야 하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연락할 수단은 있어야 했다.
내 말을 들은 요시히메는 오히려 의아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지금 너를 따라가려는 것인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당주 입에서 나온 말이 ‘일족들이 기둥을 갉아 먹는다’고 했던가. 역시 내부의 권력다툼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 요시히메를 숨겨 둘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동안 고니시가에 머무르시겠다는 말씀이시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나 요시히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새 아가씨의 뒤편에는 낯선 사람이 하나 다가와 있었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단조요.”
“단조?”
그 이름을 듣고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 되었다.
어제 나가요시는 내게 단조를 붙여 주겠다고 했다. 아마도 요시히메의 호위 겸 내가 제대로 조건을 이행하는지 확인할 감시역인 것 같았다.
“고니시가는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보안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장소입니다.”
무사의 저택은 여러 가지의 장치들이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요새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밟을 경우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제로 인기척을 내게 만드는 마룻바닥 같은 것들 말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집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단조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이미 조치는 끝내두었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나나 가족들이 모르는 사이에 벌써 집을 뜯어고쳐 놓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야 내가 생각하는 보안과 이들이 생각하는 보안에 거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 다른 이의 눈이 닿지 않는 가장 안전한 장소가 바로 고니시 상단이오. 그대와 그대의 집안을 감시하면서 주변의 벌레들은 모두 치워 두었소이다.”
머리로는 주변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동안 감시망의 총책을 맡던 사람에게 듣는 말은 새삼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장 모실 수는 없겠습니다. 적어도 계실 만한 처소를······.”
“그건 아무래도 좋다.”
요시히메는 내 말을 싹둑 잘라먹었다. 전에도 유숙한 적이 있었으니, 우리집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었을 터. 하지만 지금부터라면 상당히 길게 머무르게 된다. 그녀가 전에 머물렀던 사랑채를 이 기간 내내 내줄 수는 없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사랑채를 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괜찮다고 했다. 크고 작고는 상관이 없어. 나와 단조가 머무를 방 하나씩만 주면 된다.”
이 아가씨는 막무가내였다. 단조를 슬쩍 돌아보자 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요시히메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극비 중의 극비인 일이다. 가족들에게조차 대놓고 미요시 본가의 장녀인 요시히메가 머무를 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다른 신분이 필요하겠는데, 생각해 두신 것이 있으십니까?”
“나는 고니시 일족의 먼 친척으로 하지. 단조는 내 심부름꾼으로 하면 될 거다.”
무난한 위장이었다. 친척에게 의탁하러 온 소년과 그 하인,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만큼 편리한 설정은 없을 터.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씀을 올렸다.
“다이부(슈리다이부, 미요시 나가요시)의 지시라······. 그렇게만 알아두마.”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 역시 집의 한구석을 내어줄 뿐, 세세하게 알려 하지 않았다.
* * *
아쿠타가와 성에서 있었던 일은 동지들에게도 희소식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편해진 사람은 소에키 같았다.
“한결 마음의 부담이 줄어들겠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주의해야겠지요. 야마시로파의 상인들에게는 쇼군의 닌자가 붙어 있다고 하잖습니까.”
와타다 오리시로는 자기 주변에도 닌자가 붙었다고 하니 무척이나 놀란 듯싶었다. 예전의 나도 그랬으니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혹시 이 집에도 오다 노부나가의 간자가 있는 건 아닐지요?”
나는 소큐의 집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닌자와 관련된 경험은 미요시 가문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후대에는 오다 노부나가도 닌자를 적극 활용했다는 기록도 존재했다. 그러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여겼다.
“몰론 그럴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애초에 이 근처는 가솔들이 얼씬도 못 하도록 해 두었으니 지금처럼만 하면 될 겁니다.”
사람이 태도를 갑자기 바꾸면, 그것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노회한 무기상인은 처음부터 그럴 여지를 치워 놓으면서 살고 있었다.
차시츠 안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나는 하야시 쿠사로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하카타로 가는 다음 선편에 이걸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직조 공장의 내적인 영역은 와타다가, 외부의 일은 하야시가 담당했다. 그렇기에 하카타의 상인들에게 요청사항을 넣으려면 하야시에게 맡기는 편이 가장 빨랐다.
“이것들이 전부 무엇입니까?”
“조만간 쓰시마를 거쳐서 조선으로 갈 예정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들이지요.”
내용을 훑어본 하야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미요시 가문의 아가씨를 모셔다드리기로 약속하셨으니, 조선으로 건너가시는 거야 이상할 건 없겠습니다마는······.”
“이왕 간 김에 교역을 트면 좋지 않겠습니까?”
교역이라는 말에 다시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모두가 관심을 내비치며 내가 하야시에게 주었던 종이를 돌려 보았다.
와타다가 보고 나서 내게 질문했다.
“굳이 이것들을 가져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목면에다가 비단도 많이 생산되고 있는데, 그걸 가져가시죠.”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교역 대상을 생각하면 초장부터 직조 공장에서 만든 공산품을 들이미는 건 무리였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요. 저쪽에서 필요할 만한 것들을 추려서 물고를 트고, 차차 늘려나갈 생각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미곡을 대량으로 가져가시는 건······.”
소에키는 무사들의 차카이에 불려다니면서 주워들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일본이 조선에게 받은 조공의 답례는 대체로 쌀과 옷감이었다. 목면과 비단은 이제 우리가 우위를 갖췄을 것이 분명하지만, 곡물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나 역시도 조선에 미곡을 들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잖아도 쌀에 미친 민족이 바로 한민족인데, 가져가 봐야 뭐에 쓰겠는가.
“그건 쓰시마를 포섭하는 데 쓸 겁니다. 안정적으로 판로를 마련해 두려면 중간 다리가 든든해야 하니까요.”
예로부터 왜구의 기항지 노릇을 하는 섬이 쓰시마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땅이 척박해서 항상 식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기적인 선편을 연결해서 그들의 수요도 만족시킬 생각이었다.
* * *
“짐을 다 꾸렸습니다요.”
이치로가 내게 나들이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러 왔다. 내게는 구원의 동앗줄이나 다름없었다.
“어디로 가려고?”
요시히메는 심심하다면서 매일같이 나를 호출했다. 지금도 별채의 마당에서 말동무를 해 주는 중이었다.
“기이(紀伊기이)국 히라이(平井평정)에 용병을 고용하러 갑니다.”
“거기면 사이카슈겠네. 지금 네가 조직한 사카이 경비대로도 충분하지 않아?”
이 아가씨는 사카이로 오자마자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공장부터 에고슈 회관까지, 날 길잡이로 세워서 거의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전부터 단조를 통해 얻은 정보가 있어서인지 사소한 점에서도 내가 하는 일의 단서를 짚어내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내가 이마이 소큐와 공동으로 투자해서 창설한 경비대나, 소에키와 합자로 세운 ‘큐쇼쿠도(休食堂휴식당)’의 내막까지 꿰뚫어 볼 지경이었다. 그녀가 내 적이 아닌 것이 다행스러웠다.
- 뭘 그렇게 놀라? 이제 난 이 나라를 떠날 건데, 네가 뭘 하든 신경 쓸 필요가 있겠어?
그것이 내가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한 요시히메의 반응이었다.
“조선으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합니다. 특히 대양으로 나가면 왜구가 많다더군요. 그들을 상대로 하면서 경비대를 대동하는 건 무립니다.”
요시히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눈으로 본 것이 있어서 금방 납득한 것 같았다.
경비대는 문자 그대로 ‘경비’가 한계인 집단이었다. 나중에 따로 훈련을 시킬 수는 있겠지만, 당장의 수준은 그랬다.
“나도 같이 갈까?”
“그, 그건······.”
처음에는 상당히 무게를 잡으며 근엄한 태도를 보였는데, 갈수록 그때의 모습은 사라지고 호기심 많은 10대 소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카이에서 히라이까지는 전부 미요시 가문의 영역이라 안전하게 다녀올 만한 길이다. 하지만 요시히메가 일행으로 붙는 건 별개의 일. 다행히도 응원군이 등장해 주었다.
“여기야 저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지만, 마을 밖으로 나가시는 건 안 됩니다.”
단조가 적절한 시기에 돌아와서 자기 주인을 뜯어말렸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하나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치로가 살기에 많이 민감한 것 같았다.
“히익!”
지금은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이치로가 처음 단조를 마주했을 때엔 경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놀란 모습을 보이곤 했다. 물론 단조가 뿜어내는 기세는 무지막지했지만 내게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단조는 누가 놀라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 주인을 모시고 별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출발하자.”
이번 여행길의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사카이에서 히네(日根일근)을 넘어가면 바로 기이국의 히라이였다. 아직 장마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틀이나 길어야 사흘이면 닿을 거리. 굳이 배를 이용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 * *
사이카슈의 본거지는 기노카와 강을 끼고 목책을 둘러친 마을이었다.
“사이카의 장원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사이카슈의 철포수를 좀 고용하려고 합니다.”
“잠시 기다리시구려.”
문지기는 안으로 들어갔다. 목책은 얼기설기 엮여 있어서 내부가 살짝 보였다. 하지만 외벽의 허술함과는 별개로 경계가 상당히 삼엄했다.
나와 이치로는 적당한 바위에 앉아서 기다렸다. 이치로는 심심했는지 평소의 버릇대로 수인을 만들었다 풀면서 시간을 보냈다.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쯤, 문지기가 대여섯의 병사들과 같이 목책 밖으로 나왔다. 이제 들어갈 수 있나 싶었는데 이들이 느닷없이 철포를 들이밀었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또 기어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