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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0화 (20/225)

20화 조선을 만나다 (1)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지만, 나가요시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명령을 전달한 무사의 뒤를 따라 아쿠타가와 성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하지만 날씨는 여전히 우중충하여 성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병졸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전장에서 적과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저택 앞에 도달하자 요시오키의 가신이 아닌, 나가요시의 수하 다이묘 중 하나가 문을 지키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 미요시 당주가 발탁한 출신 불명의 장수였다. 그가 문지기 노릇을 할 정도라는 건······.

“슈리다이부(종4위하 관위, 미요시 나가요시)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역시 짐작대로였다. 나가요시 역시 후계자의 병세 때문에 와 있던 것일까?

처음 호출을 받았을 때는 양부가 죽기 전에 신변 정리차 부른 거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호출한 사람은 양부가 아니라 당주 본인인 것 같았다.

알현실은 등불에 켜져 있었다. 이제 해는 거의 다 저물어가고 있었고, 구름도 잔뜩 끼어 있어 날이 금방 어두워지고 있었다.

앞을 바라보니, 두 인영이 상석과 그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이는 역시 나가요시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옷차림을 보아하니 여인인 듯했다. 요시오키의 모친인 것일까?

“고니시 이치노스케 유키나가가 주군을 뵙습니다.”

예전에 접견했던 미요시 가문의 당주는 그 기세도 상대를 압도하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빛만 형형히 빛나고 있을 뿐, 어떠한 압박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자기 후계자를 명계로 앞세우려니 마음고생이 심한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오도록.”

나는 시키는 대로 상석에 가까이 다가갔다. 처음 알현했을 때에는 장지문 너머마다 인기척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같은 방에 들어가서 부복하자 상대가 입을 열었다.

“요즘 재밌는 짓을 하고 다니더군.”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함정에 빠질지도 모를 일. 나는 잠자코 내 목줄을 움켜쥔 자의 말을 기다렸다.

“사카이에 직조 공장이라는 것이 세워졌다지? 앙숙으로 유명한 두 상인이 손을 잡고서 말이야.”

“소인 역시 그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나이다.”

내 말을 듣자 미요시 가문의 당주는 피식 웃었다.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네가 눈동자였겠지.”

“무슨 말씀이시온지······?”

“이 히노모토에 거대한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다니, 이 몸조차도 입을 다물지 못할 일이었다. 허나 아무리 커도 용은 용. 눈동자가 있을 자리야 뻔하지 않겠느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아무리 조심했어도 무리였나 보다.

하지만 상대는 내 목줄을 움켜쥔 상태에서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진짜 용건은 따로 있을 터였다.

“고개를 들라.”

나가요시는 내가 자신과 눈을 마주칠 것을 요구했다.

고개를 들어 가까이서 그의 모습을 보니, 먼발치에서 보았던 이상으로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잠시 나와 눈을 맞춘 그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로고. 이 지경에 이르러서 정작 믿을 수 있는 자가 너 하나뿐이라니.”

“소인은 다이부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겠나이다.”

“되었다. 이건 혼잣말이니 넘기도록.”

미요시 가문의 당주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진짜 용건을 이야기했다.

“보아하니, 네 손과 발은 히노모토 전역에 닿는 모양이더군.”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굳이 내가 해 온 일을 완전히 감추려 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직조 공장 배후에 내가 있다는 걸 안 이상, 상대가 알고 있을 부분은 솔직히 인정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겸양 떨 것 없다. 네가 가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상인으로서 너는 실로 천하인이라 해도 좋겠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내가 세를 불리는 이유까지는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미요시 가문은 이제 끝이다.”

상대의 입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어떻게 박자를 맞춰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듯, 나가요시는 자신의 할 말을 이어나갔다.

“일족들은 자기 야심을 앞세워 기둥을 갉아 먹고 있고, 후계자로 세울 이는 어리석지. 이제 미요시 가문은 칼밖에 모르는 머저리조차도 이겨 내지 못할 것이다.”

“요시오키 님을 어찌 어리석다 하십니까?”

물론 입에 발린 말이기는 했다. 그가 곧 죽는다는 걸 아는 입장이었지만, 대놓고 그리 말하기도 어려웠다.

“요시오키? 그 아이는 이 몸의 뒤를 잇지 못한다. 4년 전에 죽은 이가 어떻게 당주가 되겠는가?”

“고작 병으로 누운 것에 불과한데 어찌 진작에 죽은 사람을 만드십니까?”

“아무리 옷을 갈아입었다 하나, 너는 양부도 알아보지 못하는가?”

옆에서 옥구슬 구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자세히 살펴보니 나가요시 옆의 여인은 요시오키와 똑같이 생긴 자였다. 아니, 느껴지는 기세까지 같은 걸 보면 요시오키 본인이었다.

“어찌하여 여장을 하고 계십니까? 소인이 지쿠젠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나이다.”

“여장이 아니라 원래 여인이었느니.”

전혀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그러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오라버니로 살아야 했다.”

차라리 오늘이 만우절이라서 장난질을 치는 것이었다면. 그 정도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시오키가 실은 여자였다고?

“서, 설마······.”

죽음을 앞둔 것도 아닌데,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한 번도 나는 요시오키의 평복을 본 적이 없었다. 알현할 때마다, 양부는 갑옷 차림이거나 예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가끔은 장지문 너머에서 나를 접견하기도 했다.

“자세한 건 알 필요가 없겠지. 너는 시키는 일을 해 주기만 하면 된다.”

나가요시가 내 상념을 끊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당근과 채찍이 골고루 함유된 균형 잡힌 이야기였다.

“이 일만 잘해 주면,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도록 하겠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저자는 그간의 내 행동을 두고 ‘천하인’이라 평했다. 내가 이뤄놓은 것의 가치를 몰라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두고두고 활용가치가 높은 패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무례함조차 잊고 당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몸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안다. 그리고 뒤를 이을 아이들은 하나같이 어리석지. 그들은 지금의 성세조차 이어나가지 못할 터인즉. 악착같이 미련을 남겨 두기보다는 악업을 하나하나 정리할 생각이니라.”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은 선하다고 하지만, 이 효웅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내 생각이 나가요시의 눈에도 보였던 것 같았다.

“역시 믿기는 어렵겠지. 물론 이 몸 역시도 너를 온전히 믿기는 힘들다. 그러니 단조를 붙여주도록 하지. 그를 네 수족처럼 써도 좋다. 그리고 내가 맡긴 일을 온전히 이루면 그대로 부하로 남겨 주도록 하겠다.”

단조. 유명한 닌자인 가토 단조가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미요시 나가요시를 처음 접견했을 때, 우리 집의 감시를 맡고 있었던 당주 직속 닌자인 건 확실했다.

그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건 내 목줄을 정말 풀어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소인이 무엇을 하면 되겠나이까?”

“내 딸, 요시히메(義姬의희)를 미요시 가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데려다주면 된다.”

지금까지 요시오키를 가장한 나가요시의 장녀가 요시히메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찌, 소인에게 이 일을 맡기려 하십니까?”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

나는 순간 문지기로 있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떠올렸다. 지금 이 저택을 경비하고 있다는 건 그도 이 진실의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와도 통했다.

“단죠(종4위하 彈正탄정,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단죠에게 맡기기에는 이목이 너무 많다. 미요시 가문의 중신이 자리를 비우면 세간의 눈이 모이게 되지. 하물며 이미 이 몸의 사위가 아닌가.”

“그럼 소인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네가 스스로 미요시 가문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그동안 정말 숨죽이면서 살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미요시 요시오키의 양자로 입적이 되었지만, 미요시 성 대신 고니시를 자처하지 않았던가.

“또 한 가지는 네가 현명하다는 것이지.”

이 말에는 여차하면 고니시 일족을 멸문시켜 버리겠다는 협박이 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 얼어있을 필요는 없다. 네가 예전에 쇼군에게 달려가는 대신, 이 몸을 찾아온 걸 잊지는 않고 있느니. 네 의리도 눈여겨보았느니라.”

아무래도 목줄을 움켜쥔 사람에게 신뢰 아닌 신뢰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요시히메를 멀리 보내려는 이유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지키고 있을 바깥을 돌아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차라리 믿을 만한 가신에게 시집을 보내시는 편이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밖의 단죠도 다이부의 사위인 줄로 압니다.”

“그간 자기 직계에게 가문을 물려줄 욕심으로 모두를 속였다고 하면, 누가 이 몸을 믿고 따르겠느냐?”

결국 위신과 연결된 문제였다. 비단 미요시 가문만이 아니라, 전근대의 집단 대부분은 개인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체제. 이를 망가뜨리지 않으려면 위아래 모두가 서로에게 신뢰가 있어야 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는 분명히 기회였다. 목줄이 풀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큰 기회.

“그렇다면 정말 소인이 요시히메 아가씨를 안전한 곳에 모셔다 드리기만 하면, 어떤 행동을 해도 상관이 없겠습니까?”

“음, 역시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건 좀 그렇군. 미요시 가문이 끊어지지 않게만 해 줬으면 한다. 남은 자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기만 하니 말이야.”

“그러시다면 제 조건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조건을 걸어? 으하하하.”

나가요시는 앙천대소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내 말을 경시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좋다, 말해 보라.”

“아가씨를 확실하게 미요시 가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모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제게도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셔야 합니다.”

이 기회에 제대로 속도를 낼 참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상락(上洛, 상경과 같은 의미. 다이묘의 상락은 정권을 쥔다는 뜻과도 통한다.)하기까지는 앞으로 5, 6년 남짓 남은 상태였다.

“어디를 염두에 두고 있기에, 그리 거창하게 말을 하느냐?”

“조선, 바다 건너 조선이면 아무도 요시히메 아가씨를 이용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호오······.”

미요시 가문의 당주도 내 말에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미요시 가문과 무관한 자들일지라도, 다이묘쯤 되고 보면 아가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용하려 들 겁니다.”

내 앞의 두 사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아예 이 나라를 떠나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상당히 과격하군. 하지만 확실하겠지.”

상석에 앉은 이는 자신의 딸을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소녀 또한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하옵니다.”

나가요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것이 질문자가 원하는 답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조선은 말도 통하지 않는 타지가 아니더냐. 달리 마음에 둔 곳이 있느냐는 말이다.”

“멀리 떠나야 한다면, 어디든 상관없사옵니다.”

요시히메는 어차피 타지 생활인데 조선이 대수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깔끔하게 의사가 정리되자 그는 다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무엇이 필요한가?”

“제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해상 세력이 필요합니다. 뱃길이 안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다이묘들은 수군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전이 벌어지는 장소는 육지였으니, 바다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영역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눈앞의 다이묘도 내 요구에 크게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이 몸은 네가 원하는 바를 모두 행하도록 허락했다. 쇼군의 눈도 최대한 가려 줄 테니 알아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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