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독점 자본의 형성 (7)
다행히도 이치로는 하루 푹 쉬고 난 뒤, 금방 회복되었다. 그리고 역시 과식이 멀미의 원인인 듯했다. 약간 적게 먹은 다음부터는 쌩쌩하게 움직였다.
“쇤네가 미련했습니다요.”
“그 정도로 그치길 다행이지.”
이제 항해에 걸림돌은 없었다. 세토 내해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날씨도 좋아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상륙하면 피로로 곧장 잠들어버리고, 다시 일어나면 바다로 나가는 일정을 반복했다. 사카이에서 출발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우리 일행은 미요시 가문의 영지 서쪽 끝자락인 카이간지(해안사海岸寺)에 배를 댔다.
평소대로 잠을 청하려는데, 카지도가 찾아와서는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내일부터는 아와지 수군의 영역을 벗어나게 될 겁니다. 이제 아타기 가문의 깃발은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세력의 영지 내에서 다른 영향권으로 이동하면, 간자로 몰리는 일은 종종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는 아와지 수군의 표식은 이제 장에물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 셈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굳이 그럴 필요 있겠나. 우리가 정말 정탐하러 온 것도 아닌데. 아타기 깃발을 내리면 오히려 더욱 의심을 살지도 모르지.”
“이쪽의 정체를 명확히 하는 편이 낫다는 건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걸 보여주면서 이요 수군을 일부러 불러들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는 아차 싶었다. 비록 영역이 나누어져 있다고는 해도, 바다는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내려두는 편이 좋겠군.”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빠르게 가진 못할 겁니다.”
“기상이 많이 나쁜가?”
내 질문에 뱃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섬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하여 바람을 타기가 쉽지 않겠지요. 물론 빨리 갈 방법도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 방법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군?”
“그쪽이 이요 수군의 세력권입니다. 피하는 편이 낫지요.”
나와 그쪽 사이에 악연은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주군끼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조심할 필요는 충분했다.
“어쩔 수 없지. 이번 길에서는 자네만 믿고 갈 테니,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주게나.”
* * *
우두머리 선원의 말대로, 이 일대는 아와지 수군의 영역이 아니었다.
출항해서 서쪽을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날렵한 배 하나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세키부네였다. 하지만 크기가 매우 작은 걸 보니, 고바야부네 정도가 될 것 같았다.
돛대 위에는 세 개의 소용돌이가 그려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고바야카와(소조천小早川) 수군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그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거기 벤자이센(변재선弁才船)! 여기는 고바야카와 사에몬자(좌위문좌左衛門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님의 영지다. 무슨 일로 지나려 하는가?”
“고니시 이치노스케라는 사람이오. 하카타에 볼일이 있어 가는 중이외다.”
저항이나 도주의 의사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 배를 잠시 멈추었다.
“이치노스케?”
그 말에 칼을 찬 무사 하나가 검문을 하러 나왔다. 이쪽에서 관위를 댄 이상, 하급 아시가루로 검문을 할 수는 없었던 듯했다.
“신원을 증명할 만한 표식이 있소?”
“여기, 아타기 가문의 깃발이오. 통행세를 내면 안전한 항해를 보장한다고 들었소만.”
상대는 내가 내민 증명을 살펴보고 나서 돌려주었다. 역시 신원 미상의 상인보다는 아와지 수군과 관련된 사람이 신분 보장은 잘 되는 것 같았다.
“물론이오. 그런데 배가 좀 작은 것 같소?”
아와지 수군의 깃발을 갖고 있다는 것은, 미요시 가문과도 연관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관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고작 이백 석짜리 벤자이센을 타고 이동하느냐는 질문을 돌려서 한 셈이다.
“사적인 일로 가는데, 군선을 움직일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그건 그렇겠소. 하카타에는 무슨 일로 가시오?”
“거기 거주하시는 숙부를 뵈러 가는 길이올시다.”
몇 번의 질문이 더 오간 뒤에야, 고바야카와 가문의 무사는 우리가 간자가 아님을 확인해 주었다.
“아까 이치노스케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통행세를 내셔야 지나다니실 수 있소. 대신 북쪽 해안가 일대에서만큼은 확실히 확실히 보장해드리지요.”
“얼마면 되겠소이까?”
“이 정도 배면, 쌀 스무 석이나 그에 준하는 걸 내어주시오.”
선체의 크기에 따라서 통행세가 책정되는 모양이었다. 너무 비쌌다. 5공 5민조차도 관대하다는 세상이다. 이백 석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배에 최대 용량의 10분의 1을 매기는 것이 싸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농사는 이모작을 해야 한 해에 두 번의 세금을 내는 반면, 항해는 그보다 훨씬 자주 통행세를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세토 내해의 뱃길은 내륙형 기후라서 장마철을 제외하면 사시사철 이용이 가능한 항로였다.
“너무 비싸지 않은가 싶소만, 통행세의 기준이 어떻게 되오?”
“한번 지나가면, 돌아가는 길에는 따로 받지는 않소. 통행세를 내면 확인장을 발급해드리리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다른 수군의 영역에 들어가면 또 그만큼을 내야 할 것 같아, 속이 살짝 쓰렸다.
“우리 배에는 쌀은 없소만, 다른 물품으로도 통행세를 받으시오?”
“물론이오. 쌀은 묵직하니, 우리도 조금 곤란하고······. 뭐가 있소?
그에게 창고를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말린 약재들이 조금 실려 있는 상태였다.
“음······. 약이라?”
“쇤네가 약종상을 합니다요.”
미리 말을 맞춰둔 대로 이치로가 나서서 해명했다.
미관말직이나마 관위를 지닌 자가 장사에 종사한다고 할 수는 없어 짜낸 계책이었다.
“약은······. 좀 곤란할 것 같소만. 돈은 따로 없소?”
검문하는 무사는 현물보다는 돈을 원했다.
“저것들의 시세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같은 무게의 쌀보다는 비쌀 거 아니오?”
이런 면에서는 의외로 신사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과중한 요구로 사람들의 불만을 쌓는 쪽을 피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저들도 이요 수군이라는 경쟁 상대가 신경쓰일 터였다.
“그렇다면 중국의 동전으로 드리면 되겠소이까?”
“그거야말로 대환영이오. 쌀로 받을 수도 있지만, 무겁거든. 역시 금전이 제일 아니겠소이까.”
우리는 쌀 스무 석과 비슷한 값어치의 송전宋錢을 지불하고 증서와 깃발을 받았다. 대강의 거래라 쓰고 삥뜯기라 할 만한 일이 마무리된 뒤, 상대를 슬쩍 떠보았다.
“그럼 고바야카와 수군은 어디까지 보호를 해주는 거요?”
“단노우라. 거기까지는 우리의 바다외다.”
실로 자부심 넘치는 대답이었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이 일대에는 인노시마(因島인도), 노지마(能島능도), 이요(伊予이예)의 세 수군이 있다 들었소. 공은 어디 소속이시오?”
그러자 검문하는 사람이 자기 얼굴을 상기시켜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너무 옛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오? 우리는 모리 무쓰노카미(陸奥守육오수, 모리 모토나리)를 섬기오. 남쪽에 무라카미 본가가 고노 가문을 등에 업고 설치지만, 조만간 그들도 우리에게 무릎을 꿇게 될 거요.”
역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모리원취)가 이들의 주군인 듯했다. 오우치 가문도 한때는 서부에서 끗발 좀 날리는 다이묘였지만, 지금은 북규슈로 쫓겨간 신세. 지도를 대강 머릿속에서 그려보니, 이자의 말에 신빙성이 있었다.
“미안하오. 아무래도 멀면 멀수록 뜬 소문이 도는 법 아니겠소이까.”
정보값이라 생각하며 슬쩍 동전 몇 닢을 더 찔러주자, 그는 다시 표정을 풀었다.
“모르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다음부턴 주의하시구려.”
이후로도 검문은 몇 번 더 있었다. 포구가 보일 때마다 거기 정박해있던 고바야부네(小早船소조선)가 빠르게 다가오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 발급받았던 확인장과 깃발을 보고서 그대로 통과를 허락했다.
* * *
고바야카와 가문의 바다에 들어선 지 이틀째 되던 밤, 우리 일행은 조금 위험하더라도 빠른 쪽을 택할지, 아니면 멀리 돌아갈지에 대해 의논을 했다.
정확히는 고바야카와를 비롯한 모리 수군의 태도에 자신감을 얻은 카지도가 빠르게 가보자고 나섰다.
“야시로(옥대屋代) 섬이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서쪽 수로는 좀 꼬불꼬불합니다. 고바야카와 수군도 우리를 볼때마다 득달같이 쫓아와주는데, 조금 넓은 동쪽 뱃길을 타고 가봐도 될 것 같군요.”
그렇게 움직이면 한나절은 단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 베테랑 선원의 주장이었다.
“도련님, 제가 보기에도 괜찮을 성싶습니다.”
배멀미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이치로도 시간이 단축된다는 말에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하지만 꺼림칙한 느낌이 있었다. 야시로 섬의 바로 맞은편이 이요, 그러니까 이요 무라카미의 본거지였다.
“좀 불안한데······. 조금 느리더라도 안전하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요 수군의 눈에 띄어도 금방 모리 가문의 해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일행 중에서는 카지도가 가장 전문가였으니, 마냥 반대하기도 애매했다. 대강 동의해준 다음, 만일에 대비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곧장 이 마을에 정박해 있는 모리 수군의 배를 찾아갔다.
“오, 이치노스케 님이시구려.”
배의 책임자 노릇을 하는 무사가 나를 알아보았다.
모리 수군 사이에서는 나도 나름대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5, 6세에 겐푸쿠를 하는 집도 있다지만, 어린 나이에 관위까지 지녔다. 그러면서도 배는 초라한 이백 석 벤자이센.
특이하게 보일 법하기는 했다.
“도움을 좀 청하고 싶소.”
“무슨 일이시오?”
“내일은 좀 빠른 항로로 가려고 하는데, 이요 수군과 시비가 걸릴지도 몰라서 말이외다. 순찰로를 조금만 바꿔주실 수 있겠소?”
그러면서 그의 품에 동전 몇 닢을 슬쩍 끼워 넣었다.
“어허, 군무는 함부로 바꾸기가 어려운데······.”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기색이었다. 속으로는 혀를 찼지만, 아까 주었던 만큼을 더 찔러주었다.
“거, 참······. 이치노스케 님은 세상 사는 법을 아시는구려. 상황에 따라서는 현지 책임자의 판단을 우선시할 때도 있는 법. 염두에 두리다.”
다음 날 우리가 배를 띄우자, 뒤에서 모리 수군의 고바야부네 한 척이 슬금슬금 따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카지도도 그것을 보고는 더더욱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더 가다 보니, 뒤따라오던 군선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해가 중천을 조금 넘었을 때, 남동쪽에서 낯선 깃발을 단 배가 한 척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거 말이야, 이요 수군 아닌가?”
“그, 그렇군요. 어서 노를 저어라!”
아직 모리 가문의 해역이었다. 하지만 목격자가 없는 사이에 접근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카지도의 생각은 너무 안일했다.
필사적으로 멀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요 수군의 고바야부네는 파도를 가르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의 배에는 고바야카와 수군의 깃발이 걸려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도련님, 저길 보십쇼! 저쪽에도 군선이 나타났습니다요.”
이치로가 이요 수군의 배와는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꼼짝없이 잡히겠구나 싶었는데, 그쪽을 자세히 보니 고바야카와 수군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휴우······.”
어제 찔러주었던 적잖은 돈이 제값을 했다. 아마 암초 뒤에 숨어서 우리가 습격당하기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상대편도 그것을 확인했는지, 뱃머리를 돌리려 들었다. 하지만 첨저선은 방향을 틀기가 쉽지 않은 배. 크게 선회하는 동안, 양측의 거리는 확연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 안전하지 않을까? 조금 지켜보고 싶은데······.”
지금 우리 배는 야시로 섬의 남쪽 해안가에 바짝 붙어 있었다. 만일 또 이요 수군의 배가 다가온다면, 그것은 양대 세력 간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바였다.
노잡이들도 긴장이 풀려서 힘을 쓸 수 없는 상태. 카지도도 그들을 조금 쉬게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구경 중에는 싸움 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고 했던가. 저쪽이 도망치는 걸 보니, 관전할 여유는 충분할 것 같았다.
침입자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고, 명분을 쥔 추격자는 상대를 악착같이 따라잡으려 달려 나갔다. 당사자들은 모두 사력을 다하고 있을 터. 하지만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교전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화살이 서로에게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간간이 철포 소리도 들렸다. 양측의 함급부터 병력 숫자까지 대동소이했지만, 사기의 영향 때문에 승부가 갈릴 듯 말 듯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