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독점 자본의 형성 (6)
처음에는 낯선 선원에 대한 신용 문제도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새로 주판을 두들겨보니 이래저래 이득인 셈이었다.
“그럼 어떤 노예를 사들일 것인가만 남았군요.”
소에키의 도움으로 비슷한 체구의 노예 여섯을 사들였다. 모두들 해방에 대한 열의가 충분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체력도, 특히 지구력이 좋은 편에 속했다.
노예상은 역시나 상등품을 골라간다며 바가지를 씌우려 들었다. 하지만 골라냈던 자들 중에서 훨씬 힘이 좋은 자들도 많았기에, 중품 정도의 값을 지불하는 것으로 끝났다. 다음 번에는 또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은 제값에 사가는 걸로 만족했다.
노예들을 데리고 나오면서 도움을 준 승려에게 한 가지를 더 청했다.
“염치없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항해의 처음부터 노 젓는 법을 가르쳐 가면서 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대신 약간이라도 익숙해지도록 소에키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사님 댁의 배에서 이틀간 일을 배우게 시키고 싶습니다.”
“조금씩 나눠서 태우면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세만 진 모양새가 되었지만, 역시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상당히 어려운 부탁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소에키의 표정은 상쾌할 정도였다.
“고니시 님께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계시니, 저도 한번 써먹어 봐야겠습니다그려.
일방적으로 부탁하는 처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도 내게 한 수 배웠다는 것이었다. 노예를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해방시켜 준다는 발상은 무척이나 생소했지만, 그만큼 이익이 나는 방향을 고민해 볼 기회였노라 했다.
그 말에 나는 적잖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남은 이틀은 금방 지나갔다. 주로 돈과 어음을 챙기는 일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출항일. 소에키에게 맡긴 노예들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찾아왔다.
“선사님께서 이치노스케 님을 도와드리라 하셨습니다.”
“이름은 어찌 되는가?”
“그냥 카지도(집두楫頭, 노꾼의 우두머리)라고 불러주십쇼.”
한눈에 보기에도 뱃일에 능숙한 선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 주인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는지, 스스로를 이름 대신 직책으로 소개했다.
“알겠네.”
어차피 소에키가 빌려준 사람이니 그를 어찌 꼬드겨서 스카웃해 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번 항해를 무사히 넘기고, 노예들의 숙련도를 올릴 수 있으면 충분했다.
- 먼 길을 가는데, 너 혼자 보낼 수는 없겠지.
먼 길을 홀로 움직이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며, 아버지께서는 이치로를 붙여 주셨다. 그래서 실질적인 일행은 나와, 이치로, 그리고 소에키가 붙여 준 카지도까지 세 명이 되었다.
“혹시 전에 배를 타 본 적이 있어?”
“그렇진 않습죠. 하지만 별거 있겠습니까요? 밥도 든든히 먹어 두었겠다, 도련님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요.”
이치로의 장담이 살짝 불안했지만 이미 돌려보내기도 애매한 시점이었다.
노예들은 차꼬를 채워서 노잡이 자리에 앉혔다. 아무리 해방이 기다린다 해도,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법.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해방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이 조치에도 순순히 따랐다.
바람은 잔잔하여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배를 띄운 지 두 시진도 되지 않아서 첫 번째 검문을 받았다. 아직 세토 내해 동부. 당연히 미요시 가문의 영향권 내에서였다. 미요시 나가요시의 동생인 아타기 무네시게(안택종번安宅宗繁) 휘하의 아와지(담로淡路) 수군이었다.
“나는 고니시 이치노스케요. 지쿠젠 님께 허락을 받아 하카타로 외유를 나가는 길이올시다.”
신원을 밝히자 검문선에서는 잠시 웅성거림이 일었다.
“너무 어린아이가 아닌가. 혹시······.”
칼을 찬 사람 하나가 내 정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곧 뒤에서 반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니시? 알 것도 같은데······.”
목소리의 주인이 나와서 배에 탄 사람들을 눈으로 죽 훑었다. 나부터 카지도, 마지막으로 이치로까지 확인한 다음에야 그는 아는 척을 했다.
“아, 이분이셨군. 아쿠타가와(개천芥川)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
정작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는 이쪽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쿠젠의 양자이시면서 왜······?”
문장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의미는 짐작이 갔다. 어째서 미요시 대신 고니시를 자칭하느냐. 대강 그런 뜻이었다. 그 질문에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비록 명확하게 답을 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검문하던 무사도 금세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상으로 헨키(편휘偏諱)를 내리되 진짜 가문원으로서의 자격을 주지 않는 경우는 제법 흔했다.
“그렇군요. 하카타라······. 무슨 일입니까?”
“그곳에 사는 숙부를 뵈러 갑니다.”
“흠, 상당히 먼길을 가시는군요.”
그는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자기 배에서 깃발 하나를 내어 놓았다. 펼쳐진 호랑가시나무잎. 아와지 수군을 맡고 있는 아타기 가문의 문장이었다.
“비젠 연안까지는 우리 영역이니 이 깃발을 내걸고 계시면 통과시켜 줄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니 주의하시지요.”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 * *
서로의 배가 멀어진 뒤에도 처음 배를 검문했던 병사는 미심쩍어 했다.
“나으리, 정말 그자가 지쿠젠 님의 양자가 맞습니까?”
자기 상관이 나서서 보장한 일이었지만, 이 병사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나?”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그들이 어떤 물증을 보여 준 것은 아니잖습니까? 수군기까지 내어주신 건 조금 꺼림칙합니다.”
병사는 상관의 면박에 목을 움츠리면서도 할 말을 했다. 검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간자를 걸러내기는커녕 저들의 주장만 듣고서 기까지 내주었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물증?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군. 자네의 성실성을 높이 사서 한 가지만 말해 주지. 직위가 오르면 말일세, 부하들이 모르는 것도 배우게 되는 법이라네.”
하지만 그의 상관은 병사의 의심을 뛰어넘는 확신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저들 일행 중에 자네가 그토록 원하던 물증이 있어서 내준 것이니, 이제 신경 끄게.”
아무리 생각해도 물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가장 어린 소년이 그 일행의 우두머리라는 것부터가 여러모로 수상했다. 하지만 미요시 본가에서 오랫동안 봉직한 무사의 말에 더 뻗대지기도 곤란한 노릇이라 병사는 그냥 침묵을 지켰다.
* * *
그 이후로도 아와지 수군의 배를 몇 번 마주했지만, 아무도 검문을 하러 일부러 다가오지는 않았다. 역시 그 깃발이 일종의 신원확인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바다가 체질이었던 것 같았다.
배가 작은 만큼 요동도 상당했다. 하지만 멀미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카지도는 원래 뱃사람이니 육지나 다름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이치로는 자기 성씨인 야먀다(산전山田)에 산이 들어가기 때문인지, 바다와는 영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는 그도 안색만 나쁠 뿐, 그럭저럭 버텨 냈다. 하지만 한번 토하기 시작하자 처음 장담과는 달리, 금세 뻗어 버리고 말았다.
“우웨에엑!”
이번이 세 번째 구토였다.
뱃전에 고개를 내민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거라도 해야 했다.
아버지의 지시가 없었다면 육지에서 일상을 보냈을 친구라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지도는 바다를 살피며 노예들에게 지시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치로를 살피는 것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오히려 노예들은 괴로운 기색이 없이 노를 젓고 있었다. 그래도 바다에 대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 맞기는 한 듯했다. 이치로 혼자서만 멀미를 하고 있는걸 보자니, 더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밤새도록 배를 움직일 수는 없는 일. 해가 떨어질 무렵 우리 일행은 아와지 섬의 북쪽 맞은편, 아카시(명석明石)라는 작은 어촌에 상륙했다.
카지도는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며 앞으로의 일정을 예측했다.
“바람이 순조로우니 기상이 나쁘지만 않는다면 열흘 만에 닿을 것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로군. 자네만 믿겠네.”
최소한 보름은 넘게 걸리는 길이 될 거라 생각했다. 바람이니 조류니 하는 항해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여, 열흘······. 버틸, 만하겠습니다요.”
고무적인 관측이었다. 하지만 우리 일행 중에는 그 짧은 시간조차 힘들어할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치로는 몸을 좀 추스르고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닙니다요, 도련님. 뱃길이 힘들다고 든든하게 먹었는데, 전부 토해버렸으니······.”
확실히 과식은 멀미에 해로운 모양이었다.
“쯧, 이유가 다 있었구만. 이치노스케 님. 하루만 더 묵으면서 저 친구가 체력을 회복하기를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날씨가 좋을 때 서두르는 편이 좋지 않은가? 매번 상륙할 때마다 시일이 걸리는 것도 곤란할 듯싶고······.”
다행히도 여행의 당사자인 나는 멀쩡했다. 그러니 이치로는 돌려보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하카타까지 가는 동안, 거의 대부분을 배 위에서 보내게 될 터. 굳이 보호자역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카지도의 태도는 좀 더 지켜보자는 쪽이었다.
“원래 날씨가 좋을 철이라 일정상으로도 여유가 좀 있지요. 물론 매번 상륙할 때마다 며칠씩 휴식을 취하자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음 항해에도 차도가 없으면 조치를 취하도록 하지요.”
이틀 뒤의 항해에서도 멀미를 심하게 한다면, 돌려보내거나 남기겠다 말이었다.
과연 오랫동안 배를 탄 사람에게는 이런 상황에 대한 노하우도 있는 것 같았다.
“별거 아닙니다. 이치로라고 했던가요, 이 친구? 배에 타기 전에 식사량을 좀 줄이면 될 겁니다.”
“고, 고맙습니다요.”
이치로 스스로도 꼼짝없이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지도가 이어서 하는 말은 썩 관대하지 않았다.
“아직은 안전하니까 이런 여유도 부리는 겁니다. 가다 보면 무라카미(村上촌상) 놈들 영역에 들어갈 텐데, 그때부터는 이렇게 시일을 끌어서도 곤란하지요.”
“무라카미 수군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마도······. 오늘 아카시에 닿았으니, 내일은 사누키(讃岐찬기)까지도 갈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 상륙할 카이간지(해안사海岸寺)까지는 아와지 수군의 힘이 닿지요. 그러니까, 앞으로 사나흘 간은 괜찮을 겁니다.
무라카미 수군. 처음에 소에키 선사도 경고했던 해적 무리였다.
- 쇼도시마(小豆島소두도)를 넘어가면 거의 그들의 영역이라 보시면 됩니다. 무라카미, 고바야카와(小早川소조천). 이렇게 두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원래는 무라카미 가문에 뿌리를 둔 세 가문이 분가하면서 인노시마(因島인도)계, 노지마(能島능도)계, 이요(伊予이예)계로 나눠졌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요계는 여전히 고노(河野하야) 가문 아래에 있었지만, 나머지 둘은 모리(毛利모리) 가문이 집어삼켰다고 했다.
- 이요계는 피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쪽은 미요시 가문하고도 약간의 악연이 있으니까요.
그쪽이 미요시 가문과 직접 분쟁의 당사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인인 고노와 미요시 사이는 무척이나 나쁜 편에 속했다.
예전에는 미요시와 고노, 이 둘은 모두 예전에는 호소카와(細川세천)의 가신이었다. 하지만 미요시의 전대 당주인 모토나가가 주군에게 반기를 들면서 고노하고도 관계가 악화되고 말았다.
지금도 미요시는 고노와 으르렁거리는 사이였으니, 그들의 봉신도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