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독점 자본의 형성 (4)
하야시가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했다.
“고니시 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장 막부나 미요시 가문이 그렇게 내버려두겠습니까?”
비단 장사라서 그들을 많이 접하기 때문인지, 지배자들의 성향을 잘 잡아낸 견해였다. 하지만 그런 반론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반쯤은 억지로, 또 반쯤은 앞 일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양 측이 화친을 유지하고 있지만, 어디 사카이에서도 그렇답니까?”
“그야, 물론 아니지요.”
얼마 전의 일을 생각하며 나는 목을 어루만졌다.
당장 우리 집안부터가 그들이 벌이는 술수에 목이 날아갈 뻔한 적도 있었다. 당장 내 존재 때문에 균형의 추는 일견 셋츠파로 기울어버린 듯한 정세였다. 하지만 그만큼 중립파였던 이마이 소큐가 교묘하게 세력 차이를 조율하는 중이었다.
“곰이라는 짐승은 산 하나에 두 마리가 있을 수 없다더군요. 쇼군이나 슈리다이부(미요시 나가요시)나 현 상태에 만족할 자들은 못 되잖습니까.”
“그렇기도 합니다.”
하야시가 맞장구를 치고,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중 하나가 사라지기 전에는 결코 기나이가 평온치는 못할 겁니다. 그러면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발 밑을 보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말한 뒤, 잔 속에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대놓고 미요시 가문이 요절 릴레이로 망가진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창창한 청년이 뜬금없이 병으로 죽고, 거기 충격을 받아서 중년의 부친도 단명한다. 이런 이야기는 현명한 사람의 예측이라기보다는 신들린 무당의 계시나 다름없는 소리다.
게다가 내 존재가 어떻게 사태를 뒤집어 놓았을지는 모를 일. 우선 미요시 요시오키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볼 때였다.
“서로 치고 받느라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그때, 우리는 공백을 노립니다.”
이 정도로도 참석자들은 충분히 납득했다. 하지만 생각이 복잡한 듯 아무도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뎅, 뎅, 뎅······.
어느새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근처의 절에서 범종 소리가 스물 여덟 번 울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아직 날은 많으니까요.”
* * *
지난 차카이(차회茶會) 이후, 나는 고니시 상단의 장부를 좀 더 눈여겨 보았다.
다른 업종에 비해서, 약종상의 활동 영역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이 세상에 만병통치약이라는 건 없다. 만병에는 만 가지 약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역마다 구할 수 있는 약재도 각양각색. 우리 집안이 경영하는 상단은 공급처만큼은 일본 각지에 두어 필요한 것들을 수급해왔다.
“하카타, 비젠, 카와치, 하카타, 야마시로······.”
필요한 것은 하카타 방면에서 누구와 가장 많이 거래를 하는가였다.
먼 곳의 일을 맡기려면 그만큼 신뢰가 쌓인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자면 생판 남보다는 꾸준한 거래를 해온 쪽이 나을 터였다.
“하카타, 고니시?”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동안 까먹고 지냈지만, 하카타에는 숙부가 역시 약종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은 명절마다 꾸준히 다녀갔는데, 올해의 설에만 방문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눈치를 보다가 그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숙부가 한 분 계시잖습니까.”
“오사무 이야기로구나.”
숙부의 이름은 고니시 오사무(소서치小西治)였다.
“올해는 못 뵌 것 같습니다.”
“정초에는 우리집에 모이곤 했는데, 올해는 어찌 될지 몰라서 오지 말라 하였지······.”
사카이로 이사왔을 적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상당히 많은 일이 있었기에 무척이나 오래되었다고 생각했었다. 막상 돌이켜보면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장남이신데다, 이곳이 사실상 고니시 상단의 본부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정월이 되면 보통은 우리집에서 모였다. 하지만 올해는 혹여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며 각자가 설을 쇠기로 했노라고 하셨다.
생각해보면 우리집이 사카이로 옮겨온 것도 설 전후였던 것 같았다.
“요즘들어 부쩍 오사무를 보고 싶었는데, 네가 그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던 것 같구나.”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영 힘이 없었다.
내가 미요시 당주와 담판을 지은 이후로 아버지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지신 상태셨다. 하기야 나부터도 감시의 눈길을 피하느라 고심하는 판이다. 이마이 소큐의 차시츠, 그리고 사카이 성당의 고해실 정도가 마음놓고 편히 있을 만한 장소였다.
“이제 위기도 넘겼으니, 한번 오시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쪽도 함부로 비워 둘 수는 없지. 당분간 각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구나.”
역시 조심스러운 눈치셨다.
토끼는 굴을 여럿 파둔다던가. 숙부가 하카타에 가 있는 것 역시 일종의 위험분산인 것 같았다. 워낙 험한 시기다보니 상단의 확장까지 겸해서 그곳에 지부를 세워 두셨던 모양이었다.
“그럼, 제가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네가?”
“사카이에만 박혀 있자니 갑갑해서요. 바깥 바람 좀 쐬어 보고 싶습니다.”
어차피 내가 상단에서 하는 일은 없었다. 그간 도맡아 하던 일도 관위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대신 에고슈의 거상들을 만나며 한량짓을 하고 다녔으니,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것 정도는 용납될 성 싶었다.
“먼 데 다녀오는 일이니 어르신의 허락을 받는게 좋겠구나.”
이전의 일은 아버지를 상당히 바꿔 놓았다. 그때 받으셨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허락을 받으려면 미요시 나가요시나 요시오키 둘 중 하나에게만 말하면 그만이었다. 목줄을 쥔 쪽은 당주 쪽이었지만, 명목상 양부는 그 후계자였다.
거리만 놓고 보면, 나가요시가 거하는 이이모리(반성飯盛) 성이 요시오키의 아쿠타가와(개천芥川) 성보다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아쿠타가와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전에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도 나가요시가 아닌 요시오키에게 소개를 시켜주었다. 그때는 조심성없게 굴었다 싶었지만, 그 일로 문책을 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은 덜 껄끄러운 쪽에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럴 참이었다.
하지만 아쿠타가와 성의 방문이 항상 접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시오키의 접견실로 안내받는 대신 성의 시녀 한 사람이 자기 주인의 말을 전했다.
“지쿠젠(미요시 요시오키) 님께서는 이치노스케(고니시 유키나가)의 방문을 받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자주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도 적지 않았다.
명색이 내가 아들이기는 했지만, 함부로 그 자격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시오키는 자기 부친보다는 너그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기다리고 계시면, 용건에 대한 답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속일 것도 없어서 그대로 시녀에게 이야기했다.
“유람차 하카타의 숙부를 방문하려 합니다. 시일이 다소 걸릴 일이라 지쿠젠 님께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심부름꾼은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왔다.
“지쿠젠 님께서는 이치노스케의 외유를 허락한다 하셨습니다.”
- – -
사카이에서 하카타로 넘어가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육로로 이동한 뒤, 단노우라(단의 포壇ノ浦)를 건너 규슈로 넘어가는 길, 세토 내해의 항로, 마지막으로 남만선을 타고 히라도(평호平戸)를 경유하는 배편이다.
첫번째는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치안을 감안하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남은 길은 두 가지. 이 참에 포르투갈 상인들과 교류할 기회도 만들 겸, 남만선편을 골랐다.
사카이에서 남만인이 모이는 곳이라면, 이러니저리니 해도 가톨릭 성당만한 것이 없었다. 나는 곧장 루이스 신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만족스러운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음, 카폰 형제님은 곧장 마카오로 가신다 했고, 콜론 씨도 안되겠고······. 마땅한 선편이 없습니다.”
“히라도로 가는 배가 하나도 없단 말씀이십니까?”
“가장 최근에 떠난 경우가 이틀 전이었으니, 돌아오려면 한 달은 걸리겠지요.”
루이스 신부도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혹시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같이 찾아보시겠습니까?”
사카이 성당의 사제는 협조적이긴 해도 나를 껄끄러워하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히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모양새였다.
교인등록부를 열심히 뒤적거리며 같이 고민해 보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나오질 않았다.
“별 수 없군요.”
“도와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결국 차선책을 써야 했다.
배와 관련된 상인은 사카이에 많았다. 그중에서 내가 상담할 만한 사람은 소에키, 그의 집안이 어물전을 경영하면서 선원이나 조선공하고 안면이 있는 편이었다.
“이 참에 적당한 배를 하나 마련해 볼까 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선박을 한 척 장만할 생각이었다.
당장 포르투갈 상인의 배를 얻어 타려고 해도, 일정이 맞아야 가능한 일. 일본인 소유의 배라고 크게 다를까.
그럴 바에야 내가 직접 배를, 나아가 선단을 운용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를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알아두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 근처는 미요시 가문의 영향권이라 안전하지만, 아와지시마(담로도淡路島)를 넘어가면 카이조쿠츄(해적중海賊衆)가 나옵니다.”
성실하게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는 것보다 약탈이 쉬운 법. 해안가의 다이묘라면 누구나 앞장서서 수군이라 쓰고 해적이라 말하는 무리들을 양성했었다. 그간 바다로 나갈 일이 없었으니 당연히 생각지도 않은 문제였다.
내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이 성실한 승려는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를 갖춰 주면 알아서 통과시켜 주는 편이지요.”
“예를 갖춘다고요?”
“정중하게 통행세를 내면 오히려 지나가는 배를 보호해 주는 자들입니다. 다만 모르고 가면 곤란을 겪게 되겠기에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소에키의 말이 와닿지는 않았다. 삥을 뜯어가는데 ‘보호해 준다’니.
“육로로 이동할 경우에는 아쿠토(악당悪党) 외에 유랑민들의 습격도 무시 못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카이조쿠츄는 적어도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만큼은 안전을 보장하지요.”
어디까지나 육로에서 겪게 될 위험에 비해서 나은 편이라는 이야기였다.
해적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야기만 들어서는 나름 신사적인 자들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당장 하카타로 갈 일보다는 다른 걱정이 앞섰다.
“선사님, 혹시 이세국 방면에도 해적 무리가 있습니까?”
“사실상 뱃길이라면 어디나 있다고 봐도 좋겠지요. 이세국으로 가는 항로라면, 그쪽은 구마노(웅야熊野) 수군이 있습니다.”
“배를 이용하는 상인들은 전부 통행세를 내가면서 다녔겠군요.”
“그래도 이문이 남기는 하니까요.”
나는 우리의 사업이 커진 다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쪽이 일본 전역의 유통망을 확립하는 동안, 해적들이 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도 신사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달리 방법이 마땅찮았다.
일단 그 문제는 내게 걸려있는 목줄을 풀어 버린 다음에 생각할 일이었다.
“그렇다면야······.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배는 어느 정도입니까?”
“보통 100석 내외의 벤자이센(변재선弁財船)이 가장 흔하지요. 조금 무리를 하자면 2,300석까지는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벤자이센이라면 주로 상인들이 사용하는 평저선 형식의 화물선이었다. 보통은 그걸 사용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왕 마련할 배라면 좀 더 특별한 것으로 장만하고 싶었다.
목소리를 살짝 낮춘 뒤, 소에키에게 다른 종류를 물어보았다.
“그렇게 뱃바닥이 평평한 선박 말고, 파도를 잘 넘을 만한 종류는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