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독점 자본의 형성 (2)
금속 인쇄는 도장찍듯 단순한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여러 기초 기술들의 종합예술이나 다름없는 복잡하고도 정교한 것이었다.
물을 먹지 않는 활자에 먹이 잘 묻게 만들기 위해서 기름을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종이 전면에 골고루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압착기가 필요하며,
압착기를 견뎌낼 수 있는 활판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활판이었다.
“이보게, 납으로만 활자를 만들어야 하나?”
“다른 재료가 있다면 좋겠지만······. 저희들은 이렇게밖에 만들어보지 않았습니다.”
예수회가 데려온 기술자들은 구텐베르크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먼저 철로 주물틀을 만들어놓은 다음 납과 주석, 안티몬을 섞어 주조한다. 유럽에서는 납이 흔하기에 가능한 활자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었다.
문제는 일본에서만큼은 납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사실 납 자체는 은의 유통과 연은분리법 때문에 많이 생산되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철포의 탄으로 쓰였다.
“납을 사용해도 괜찮기야 하지만 활자도 결국 소모품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몇 번 찍어내고나면 견뎌내질 못합니다. 차라리 목판을 쓰는게 나을 지경이지요.”
이마이 소큐는 상인답게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비용 문제를 염려하고 있었다.
“재료가 문제라면 바꿔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청동으로 바꿔보십시오.”
나는 조선의 금속활자를 떠올렸다.
고려까지만 해도 역시 납을 사용했지만, 세종 이후로는 역시 재질의 강도 문제로 구리를 사용했다.
하필 그 구리가 수입산이라 나중에 가서는 곤란을 겪게 되지만, 지금 내가 구리 수급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여기가 그 조선에 구리를 수출한 나라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조선은 지금 열심히 여진족과 왜구와 투닥거리고 있겠네.
구리에다가 유황까지 가져다 팔 수 있으면 떼돈을 벌텐데.’
“청동은, 너무 비쌉니다.”
“가성비가 맞는다면 이쪽이 더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가성비가 무슨 뜻입니까?”
습관적으로 21세기의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한자어에 해당하는 말이었기에 능숙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가격과 성능의 비교. 그러니까 효율을 비교해서 훨씬 저렴하게 쓸 수 있다면, 초기 비용은 의외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납 활자 하나가 닷 냥의 비용이 들고 백 번을 찍어낸다 칩시다. 이때 청동 활자는 오십 냥의 비용으로 만 번을 찍어낼 수 있다면 이쪽이 더 이득이라는 것이지요.”
“과연······!”
“혹시 모르니 우선 시험부터 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주석의 녹는 점은 섭씨 이백여 도, 납은 삼백여 도지만 청동을 다루려면 족히 천 도를 넘겨야 한다. 하지만 도검과 철포를 다루는 소큐의 대장간에서는 천오백 도가 넘는 불을 다뤘기 때문에 기술적인 면에서 어려움은 없었다.
“시험 과정에서 진짜 종이에 먹을 묻혀가며 찍을 필요는 없으니 압착기만 움직여보도록 합시다.”
아직 상용화 단계는 아니었고, 또 인건비가 훨씬 저렴해서 수력을 이용한 자동 압착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대신 인력으로 열흘 밤낮을 찍어댔다.
“말씀하신대로 해보니 정말 활자가 오래 버텨주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동지가 둘밖에 없다는 것은 상당히 곤란한 일. 슬슬 머릿수를 늘릴 때였다.
“소큐 님. 준비는 거의 끝났으니 사람들을 모아볼까 하는데, 적당한 이가 있겠습니까?”
학교는 가톨릭 교회에 일임하고, 총기는 소큐의 단야소에서 공급받으면 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사람이 문제였다.
“평소에 눈여겨보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양대 파벌에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소큐 님께 전적으로 위임하겠습니다. 그들을 포섭해서 자리를 마련해주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카이만이 아니라 외부에도 그럴 만한 사람들이 있는지 알아봐주셨으면 합니다.”
“불만을 가진 사람은 많지요. 하지만 사카이 밖은 무슨 연유로······?”
“먼 훗날은 몰라도 당장은 만 석짜리 다이묘에게조차 단독으로 맞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카이의 인구는 너무나 부족했다. 정확히는 다른 다이묘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모자람이 컸다. 에고슈 36인과 그에 딸린 식솔, 그들에게 붙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날품팔이꾼. 이들이 사실상 전부였다.
마을의 해자 밖은 사카이와는 무관한 봉건적인 영지에 불과했으니 일대의 농민들을 징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 급하면 사이카슈를 고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용병은 도시의 입장에서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자체 방위력은 갖출 필요가 있었다.
“공방을 대규모로 세워서 사람들을 모을 생각입니다. 최소한의 규모를 유지하려면 기나이 만이 아니라 일본 전역을 아우르는 상권을 형성해야 합니다.”
“음······. 그렇다면 사카이 외부에서는 굳이 우리의 동지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거래만 터놓으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소큐의 말이 옳았다. 어중이떠중이가 모여들었다가 불경죄로 대번에 끌려갈 필요는 없다. 딱 필요한 만큼만 유지를 해두어도 충분했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그보다도 어떤 공방을 세우려 하십니까? 단야소에서 찍어내는 철물은 상당히 무겁기 때문에 먼 지역에 나르기는 어렵습니다.”
“직물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의류 제조는 아주 훌륭한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그러면서도 원자재나 생산품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편에 속한다. 영국도 자국산 면직물을 앞세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마침 적절하군요. 제가 말씀드렸던 자들 역시 포목상을 경영하는 자들입니다.”
* * *
며칠 뒤, 이마이 소큐는 차카이를 연다며 사람을 불렀다. 감시의 눈길 때문에 필요할 경우에만 부르기로 했으니 포섭이 완료된 듯 싶었다.
방문하니 차시츠(다실茶室) 앞 로지(노지露地)에는 세 사람이 와 있었다. 그중에는 소에키도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선사님.”
“고니시 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그런데 이 두 분께서는······?”
나머지 둘은 하야시 쿠사로(임초랑林草郞)과 와타다 오리시로(세전직사랑綿田織四郎)라는 포목상이었다. 하야시는 주로 비단, 그리고 약간의 삼베, 모시 따위의 전통적인 옷감을 취급했고, 와타다는 무명을 거래했다.
사카이에서 가장 사이가 나쁜 두 사람이었다.
아무리 소큐가 불렀다고 하지만, 이들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부터가 어색했다.
비단과 무명은 구매하는 계층이 다른만큼 서로가 경쟁대상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들의 부친 대에서 와타다가 취급하는 무명이 하야시의 삼베, 모시의 점유율을 깎았다는 이유로 이 두 집안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고니시 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말이 겹쳤다. 서로가 기분나쁜 듯 휙 돌아서려다 말았다.
하야시는 몸집이라기보다는 살집이 있는, 그야말로 비단장사 왕서방 같은 외양이었다. 와타다는 말쑥하고 빼빼 마른 체구를 지녀서 이 둘은 서로 대조적인 이미지였다.
하지만 지금 하는 행동은 마치 데칼코마니 같았다.
“두 분 모두 오랜만입니다.”
누구 하나를 먼저 언급해서 기분 상하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동시에 인삿말을 건냈다. 또 같은 말을 동시에 하게 될까 싶었는지 하야시와 와타다는 결국 소리없이 고개만 숙여 읍으로 답했다.
차시츠로 들어가도록 이 둘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대체 소큐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따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유키나가 님께서는 이 상황이 많이 어색하실 겁니다.”
“그야······.”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동지입니다. 유키나가 님을 따르기로 했지요.”
중년의 무기상인은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했다. 하지만 설명이 부족했다.
소에키가 있는 건 납득했다. 사람됨이 이런 일에 낄 만한 성격은 못 될 것 같지만, 어쨌거나 이마이 소큐의 사제였으니 통과. 하지만 하야시 쿠사로나 와타다 오리시로가 동시에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자와 한 배를 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보다도 고니시 님의 대의에 공감했습니다.”
“같은 말을 하는 것조차 불쾌합니다만, 마찬가지입니다.”
속에서 불이 치밀어오르는 느낌이 들어 우선 차 대신 냉수를 들이켰다.
지금 우리가 벌일 일은 사실상 이 시대의 체제에 대한 쿠데타나 다름없는 일. 아무리 가는 길이 같다고 해도 삐걱거리는 사람들이 있어서야 곤란했다.
소큐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미소만 지었다. 대신 소에키가 내게 귓속말로 내막을 전했다.
“사실 저 둘은 이제 싸우고 싶지 않답니다. 하지만 그동안 해온 것이 있어 화해하기 쉽지 않다더군요.”
대강 상황이 파악되었다. 아마도 화해를 주선하는 것으로 저 둘에게 내 우위를 만들어주기 위함인 것 같았다.
“제 대의에 공감하신다면, 우선 두 분의 불화부터 끝낼 필요가 있겠지요.”
당사자들은 침묵으로 답했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냈다. 소에키의 말대로 그들은 지금의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에 오셨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믿을 만한 동지가 설득해왔으니 신뢰가 떨어지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전적으로 믿고 안 믿고는 그들의 입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의 문제라 생각했다.
서로 누가 먼저 말할지 눈치를 보다가 하야시 쿠사로가 먼저 나섰다.
“상행을 다닐 때마다 사족들의 횡포가 너무나 괴롭습니다. 다른 다이묘의 영지로 갈 때마다 관세를 내는 것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세율도 제멋대로고, 심지어는 10분의 1만 내라면서 가장 좋은 비단을 뜯어가니 매일매일이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어차피 사카이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은데, 행상을 그만둘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상인도 명성을 잃으면 장사하기 어렵습니다.”
납득할만한 이야기였다. 만약 가족 중 누군가가 무사에게 처형당했다던가 하는 내용이었다면 차라리 못 미더웠겠지만, 돈이 걸린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예전에 츠다 소규의 집에서 보았던 시바츠지 상인도 자기 부친의 원수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던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와타다 오리시로를 보았다.
“저도 비슷합니다. 조부님께서는 소출의 7할이라는 무거운 세금을 못 견디셔서 도망나오셨지요.”
“7할이라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하야시가 경악했다. 나야 역사 지식으로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소에키도 이마이 소큐도 놀란 기색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보통 반만 걷어가잖습니까?”
통상 5공 5민이 가장 잘 알려진 수취량이기는 했지만, 다이묘마다 천차만별인 것도 사실이었다.
“모든 다이묘가 그렇지는 않지요. 제가 직접 겪은 건 아니라 별 감흥은 없습니다만, 상인이라고 해서 별 다를 것도 없더군요.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거둬가니.”
결국 이유만 놓고 보면 하야시와 같은 이유였다. 직접 보고 들은 바로 이 둘은 진심이었다. 태도도, 이유도 충분했다.
“잘 알겠습니다. 우리가 맞설 힘을 갖춘다면 사족이라 한들 멋대로 굴 수는 없겠지요.”
모든 이들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앙숙인 포목상들 사이에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비록 동지가 되었지만, 해묵은 감정이 있으니 당장 화해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두 분께서 이익을 공유하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리라 보는데, 어찌 보십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단과 무명은 구매하는 사람이 겹치지는 않지만, 판매처는 거의 일치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산은 각자 하되, 유통에 드는 비용을 절감할 방법을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야 물론 그렇겠습니다. 하지만 저나 이 친구가 만족하더라도 각자가 거느린 가솔들까지 납득하긴 어려울 겁니다.”
제법 오랜 기간에 걸쳐 생긴 앙금이 쉬이 지워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모두 동지로 받자니 저대로 둘 수도 없는 일.
하야시와 와타다의 이야기를 들은 난 조용히 턱을 쓸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러자 두 사람을 비롯해 주변에 있는 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이윽고.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