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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9화 (9/225)

9화 지금은 센고쿠시대 (9)

하지만 이마이 소큐가 무사조차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선 이후조차 신분의 제약은 여전했다. 하루는 고쇼(御所 어소, 덴노의 거처)로 불려가는 일이 있었다. 조정의 대신 중 하나가 덴노에게 소큐의 이야기를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덴노를 알현할 수는 없었다. 중세 일본의 법률은 상인 신분이 궁에 들어가는 것을 엄히 금했다.

- 안타깝게 되었소이다. 발걸음을 헛되이 하게 했으니 약소하나마 가져가도록 하시오.

그를 부르려 했던 귀족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값진 다기를 선물했다. 하지만 그걸로 소큐의 마음이 채워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다 노부나가가 그를 불렀다.

- 차의 향이 좋구려. 자네들은 어떤가?

-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 향을 즐기라고, 향을.

다른 영주들의 차시츠(茶室다실)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마 평소의 그였다면 대번에 호통을 치고 나가버렸으리라.

하지만 격식을 따지지 않는 오다 노부나가와 그 가신들에게 묘하게 정감이 갔다.

- 이 못생긴 원숭이 녀석! 기껏 다도를 배울 기회를 줘도 어쩔 수가 없구나.

- 허허, 괜찮습니다. 저 무사분의 성함은 어찌 되시는지?

- 히데요시라 하고 성은 없습니다.

소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조차 없는 비천한 출신이 다이묘의 측근 노릇을 하는 건 둘째치고 주군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 용납되고 있다니.

- 이 녀석이 못 생기고 못 배워먹긴 했어도 성실해서 내가 직접 부리고 있소.

- 그렇··· 습니까?

아무리 괴짜라고 알려진 오다 노부나가라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하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들어 쓰는 이가 천하를 지배한다면 더 이상 신분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일은 없으리라.

‘만약 가즈사(가즈사노스케, 종6위하 上総介상총개, 오다 노부나가)께서 쇼군이 되신다면.’

그날 이후, 소큐는 남들과는 다른 성격의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가 호령하는 천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회상을 멈춘 이마이 소큐는 눈 앞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군주론‘.

이 책은 오다 노부나가를 위해 쓰인 책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작금의 일본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저 머나먼 남만이라고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군.

군웅이 할거하고 피가 멎을 날이 없었다니 말이야. 이 책은 가즈사 님를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 책을 들고 기요스 성으로 달려가 마음속 주군에게 헌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마음가는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다이묘도 상인도 바쁜 몸이었고 또, 사카이와 기요스 성의 거리는 멀었기에 잠시 인내하기로 했다. 마침 노부나가가 주문한 철포를 보내야 하니 그편에 같이 방문할 참이었다.

“같은 사람이 썼다고? 그렇다면 다른 책들 역시 훌륭한 내용이겠지.”

다도의 대가는 ‘휘렌쳬의 역사‘를 집어 들었다.

“아니, 남만에서는 상인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사는 사카이 역시 상인회가 다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쇼군의 허가를 받아 그렇게 된 것.

이 책에서는 아예 상인들이 힘을 모아 귀족들을 내쫓아버리고 있었다.

“허어. 너무나 위험한 책이 아닌가.”

내용이 너무나 위험했다. 하지만 끝내 그는 남은 페이지에 대한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지. 결국은 그리되고 마는군.”

책의 결말은 귀족을 쫓아낸 상인들이 분열하게 되면서 파멸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만약에, 그들이 뜻을 모았다면… 아니지, 아니야. 결국 사람은 탐욕스러운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사의 칼에 목이 날아간 친구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니지, 모든 무사가 그런 건 아니었어. 역시 가즈사 님이야말로 천하를 잡으셔야······.”

그러나 이미 불온의 씨앗은 소큐의 마음에 심어졌다.

고귀한 신분의 사람도 현명하고 어리석음이 제각각인데, 왜 상인이라고 반드시 망하는 길로 가겠는가.

어째서 정치는 사족의 손으로만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선물 받은 책은 아직 한 권이 더 남아 있었다.

“으음, 위험하군, 위험해. 오늘 책은 그만 읽어야겠어.”

그러나 다음날 그는 공화정을 옹호하는 내용인 로마사 논고를 한 번에 다 읽어버렸다.

“아니, 어째서 내가….”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두려움에 손발이 떨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안 되겠다.”

여태껏 처음 보는 이야기였다. 공화정이라는 개념은 세상에, 아니 적어도 이 일본에는 있을 수 없는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책을 쥐어준 자는 틀림없이 자신에게 뭔가를 원했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만나봐야 알 일이리라.

지금은 약속 없이 누군가를 부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시간, 늦은 오후였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의 이마이 소큐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치노스케(종 7위하 니시노이치노스케, 西市佑서시우, 고니시 유키나가) 댁으로 가서 방문을 청한다 아뢰어라.

*       *       *

하인의 전갈을 받고 찾아가니 이마이 소큐는 벌개진 눈을 부릅뜨고 나를 맞이했다.

“대체 이 책들이 다 무엇입니까.”

“군주론은 재밌게 읽으셨는지요.”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군주론이 문제가….”

“이렇게 부르셨는데 차 한잔 대접하지 않으십니까?”

일부러 큰 소리를 내어 대접을 요구했다.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지만 하인 중 누가 또 미요시의 끈이 닿은 닌자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자를 감시하겠다는 이유로 집에 드나드는 판이다. 또 다른 감시의 눈이 붙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차시츠에서 차카이(茶會차회)의 모든 절차가 생략되었다. 하지만 대접을 하는 주인이나 대접을 받는 손님이나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한 사람이 이토록 상반되는 내용을 쓴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합니까?”

“딴마음을 품는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닛코루로의 진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평생 시민으로서 공직에 있었지만, 참주가 복귀하면서 폐서인되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관리로 살았기 때문에 다른 길은 몰랐다고 합니다. 결국 다시 관직에 나서기 위해 도시의 주인에게 아첨하는 글을 썼지요.”

실제로는 군주론과 다른 저술의 상반성에 대해 많은 이견이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 이마이 소큐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을 골라잡았다.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로마사 논고’와 ‘휘렌쳬의 역사’ 일부에 있었겠군요. 제게 이 책들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다 노부나가도 결국은 다른 다이묘들과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다!”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평수정수)라는 자를 아십니까?”

아직 오와리의 다이묘가 오다 가문 전체의 주인이 되기 전, 할복으로 자결한 노부나가의 가신의 이름이 나오자 무기상인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분은 어찌 아십니까?”

“어떤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니 소큐님이 평소 말씀하시던 오다 노부나가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싯적의 과오일 뿐입니다! 오히려 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사찰까지 지으셨단 말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얼마나 개차반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였다.

히라테 마사히데는 오다 가문의 검술 사범이었는데, 그 아들인 고로우에몬五郎右衛門이 좋은 말을 한 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그것을 탐내어 헌상하기를 강요했지만 우에몬 역시 한 명의 무사로서 그 요구를 거절했다. 둘 사이에 불화가 생기자 후환을 두려워한 마사히데는 가문의 도련님에게 충언을 올리며 할복했다고 전해졌다.

“좀 알아보니 그 말이 천리마도 아니고, 고작해야 잘 먹여 키운 준마일 뿐이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분쟁의 당사자인 우에몬이 그 이후에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더라는 겁니다.”

다이묘의 검술사범쯤 되면 그 가신단 중에서도 최소 중역 이상은 된다. 적어도 오다 가문 휘하에서는 끗발 좀 날리는 편이었다는 의미다.

우에몬은 그런 집안의 자제, 그것도 할복으로 명예를 세운 부친을 둔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싸움터에 나가서 전사를 했다면 그대로 이름을 알렸을 것이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마사히데가 사망한 지 올해로 10년이 되는 만큼 그럭저럭 유명인사가 되어있어야 마땅했다.

여전히 오와리의 가신들 중에는 히라테의 성을 쓰는 자가 있었던만큼, 가문 자체가 영락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흐음······.”

“저보다는 더 발이 넓으실테니 알아보셔도 좋겠군요. 고로우에몬의 생사를 확인하시면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아닙니다. 제가 나선들 별 차이는 없겠지요.”

무사에게는 겸손이 미덕이 아니었다. 자신이 세우는 전공을 과시하고 드러내기 위해 화려한 갑주나 요란한 깃발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소식이 들리지 않을 정도라면 어떤 식으로든 속세와 떠났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는 찾을 수가 없다고 봐야 했다.

“다른 길을 알지 못했다면 노부나가가 최선의 대안이었겠습니다만, 닛코루로의 책을 읽으셨다면 반드시 사족의 지배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아실 겁니다.”

“정말,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신고의 세월을 겪어온 중년인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어르신께서 도와주시면 가능한 일입니다. 일전에 새도 나무를 가려앉는다 하셨던가요? 저는 새가 아니라 누구나 스스로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무슨 수로······.”

“소큐 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무사보다 어리석으십니까?”

자수성가한 무기상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반례가 너무 많았을 테니까.

“사람은 누구나 현명해질 수 있습니다. 만인의 중지를 모을 수 있다면 한갓 무사의 칼이 두려울 일이겠습니까.”

사실 당장 일본의 사회를 어떻게 뜯어 고쳐볼 생각은 없었다. 지금부터 씨를 뿌린들 한 이, 삼백 년 뒤에나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이마이 소큐를 설득하려면 오다 노부나가의 능력주의를 뛰어넘는 비전을 제시해야 했다.

내 말을 듣던 중년의 무기상인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신분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쥔 무사 계급 자체를 끌어내린다는 발상은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눈빛이 돌아온 걸 봐서는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밀고부터 동지로 합류하는 것, 혹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투신하게 압박하기 등등······. 과연 그가 내놓을 다음 수는 무엇일까.

물론 어떤 수든 좋았다. 이미 나는 무기상인을 외통수로 몰아 넣었다. 만약 밀고한다 해도, 너무나 허황된 이야기. 오히려 역풍을 이용해서 오다 노부나가의 첩자로 몰아다가 처리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달이 서산 너머로 기울 때가 되어서야 그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기대하던 바와 일치했다.

“주군께, 이마이 소큐가 인사올립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절을 올렸다.

“제 눈을 틔워 주시고 길을 알려 주셨으니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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