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지금은 센고쿠시대 (8)
양아버지가 된 요시오키는 설명에서 접속사에 해당하는 말을 가장 강조했다.
“너는 미요시이되 미요시가 아니니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역시 자신의 아들로서 권리를 바라지 말라는 뜻이었다. 보통은 입적한다고 하면 대가 끊긴 상황에서 먼 친척을 들여서 가문의 존속을 유지하거나 유능한 인재를 사위로 맞아들이기 위해서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미요시 세력의 와해를 꾀하는 술책을 막는 방편이었으니 아무 권리도 주지 않으려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이제 막 스물하나가 된 상태에서 졸지에 아홉 살짜리 아들. 역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님께서는 교토의 조정에 네 관위를 청하셨다. 그러나 네게는 토지도, 봉록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조차도 소인은 대대로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나이다.”
“영리하니 잘 알아듣는군. 조정의 직첩이 나올 때까지는 이 성에 머무르도록.”
양자로 입적한다는 것은 양부와 관련된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가요시는 내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요시오키에서 따오는 대신 자신의 이름을 주었다. 역시 나를 은의로 얽어놓기 위한 방법에 불과했던 것이다.
며칠 뒤 사카이를 경유해서 쇼군의 사신이 방문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직첩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때 나는 이미 종7위하의 관위를 얻어서 다른 무가의 가신 자리를 거부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미요시 요시오키의 아들, 유키나가에게 니시노이치노스케(종7위하 西市佑서시우) 를 수여하노라.”
대체로 다이묘 휘하의 무사들이 조정의 관직을 받아내거나 자처하는 경우에는 군사와 관련된 직위를 사용했다. 사콘(左近좌근)이니 우콘右近(우근)이니 하는 벼슬만 해도 근위대 관련 직함이었고, ~몬(門문)이라는 명칭도 대부분 문지기와 관련된 벼슬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벼슬은 군무와는 동떨어진 종류였다. 그보다는······.
“상인다운 벼슬이로고. 제법 머리를 굴렸는데 네 녀석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알지 못하옵니다.”
짐작은 했지만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시늉을 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니라.”
역시 쇼군의 스카웃을 뿌리칠 관위는 쥐여주되 어떠한 실권도 움켜쥘 여지를 남겨놓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내 관위와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거창한 명함이지만 다자이노쇼니(정5위상 大宰少弐대재소이)나 큐슈단다이(九州探題구주탐제, 쇼군 휘하 역직), 간토간레이(関東管領관동관령, 쇼군 휘하 역직) 같은 벼슬은 실제로 무력을 지닌 다이묘들이 경쟁자들을 찍어누르기 위한 명분으로 써먹기도 했다.
니시노이치노스케 자리가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유키나가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네 출신을 잊지 말라는 것. 한갓 상인 출신에게 크나큰 은전을 베풀었으니 숨죽이고 살라는 의미였다.
“지쿠젠에게 이미 설명은 들었겠지. 이 몸은 네가 미요시를 칭하는 것을 금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네 아비가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막아라. 그렇게만 하면 네 신분만은 보장될 것이다.”
정말 교묘하기 짝이 없는 술수였다. 평민이 다이묘의 양자로 입적해서 벼슬까지 받았으니, 미요시 가문과 흥망성쇠를 같이 하지 않는다면 영영 세상에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될 터.
그러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여전히 고니시 집안의 가업밖에 남겨놓지 않은 셈이었다.
나와 집안을 구명하기 위한 당초 목적이 초과달성되었다는 점 하나만이 다행이라 할 만했다.
“다이부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읍드리옵니다.”
* * *
허울뿐인 관위가 생겼다는 것을 제외하면 변한 것은 없었다.
“그, 그럴수가······!”
“아버지, 전부 사실입니다.”
이이모리 성에서 있었던 전말을 알리자 아버지 역시 사색이 되셨다. 아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안의 일이 모두 파악되고 있었다면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가 이름뿐이긴 해도 관위까지 받았으니, 이제 더 욕심부리지 말아 주십시오.”
“다, 당연히 그리 해야지.”
그 이후로 나는 약재상 일을 중단해야 했다. 떠돌이 로닌(牢人낭인, 주군을 잃거나 쫓겨난 무사)일지라도 장삿일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것은 체면이 깎이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종7위하의 신분으로서 상단 일에 나선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대리인을 세우는 것은 가능했고 아직 아버지께서는 젊으셨기에 아직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 대신 에고슈의 거상들과 교류하기에는 제법 그럴싸한 명함이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큐슈의 히라도에서 기나이로 건너온 예수교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도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종교적 열의를 보이지 않아서 그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성당을 지을 수 있게 도와주고, 선교에도 도움이 되도록 요시오키를 소개해주자 상당히 친해질 수 있었다. 아무리 미요시 본가의 견제를 받는 입장이라고는 해도, 당주나 그 후계자와 안면이 있다는 것은 꽤 유용했다.
야마시로파는 나와 만날 때마다 슬슬 기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술수를 부리려다 역으로 하늘 같은 신분 상승이 된 셈이었으니 당연한 태도이기는 했다.
중립파는 겉으로는 친근감을 표하고 자주 차카이(茶會차회)를 마련하며 접근해왔지만, 에고슈에서는 철저히 야마시로파를 도왔다. 이번 일로 무당파라 할 만한 자들의 여론이 내 아버지인 고니시 류사를 에고슈의 대표로 밀어야 한다는 쪽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나름으로서는 균형을 맞추기 위한 안간힘의 발로였다.
“이제는 말도 놓으면 안 되겠습니다.”
“갑자기 천지가 뒤바뀐 느낌이기는 하지만, 진짜 무사들을 거느리는 다이묘가 된 것은 아니니 편히 대해주십시오.”
이마이 소큐 역시 그러한 중립파의 한 사람이었다. 일이 터지기 직전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인지 중립파 중에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만, 정말로 친해서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전담 마크 요원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가 내게 접근하는 진짜 이유는 뻔했다.
“사실 정말로 집안이 풍비박산할 뻔했습니다.”
“제 집에서는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애초부터 하인들이 모임 중인 다실에는 얼씬도 못하도록 해두었으니 말입니다.”
과연 오다 노부나가의 숙련된 끄나풀다운 환경조성이었다.
“졸지에 종7위하의 관리가 되었으니 정말 벼락출세한 셈이긴 합니다. 하지만 누가 지켜보고 있다가 저나 가족들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앉으나 서나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유키나가 님께서 관위를 받긴 하셨어도, 그야말로 허울뿐인 감투가 아닙니까. 무가 밑의 평민이라는 것이 모두 끝내는 가축 신세이지요.”
관위를 가진 사람을 호칭할 때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결례였다. 하지만 어디서 감시의 눈초리가 번뜩이고 있을지 모를 일.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유세를 부리기보다는 다른 평민들처럼 이름을 불러달라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사카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로 통했다.
“더 이상 상단 일을 도와드릴 수도 없고, 이렇게 한량 노릇이나 하고 있자니 참으로 갑갑합니다.”
그렇게 친분을 쌓아가자 늙은 무기상인은 본색을 드러냈다.
“가즈사(가즈사노스케, 종6위하 上総介상총개, 오다 노부나가)께 의탁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 공 말씀입니까. 전부터 의외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소큐 님께서는 그분께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신분을 신경쓰지 않는 분이시니까요.”
오다 노부나가의 본거지인 기요스 성을 자주 드나들며 그 일당을 관찰한 사람이라면 그렇게도 여길 법했다. 당장 히데요시부터가 성조차 없는 허드렛꾼 출신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하시바 성을 쓰고 있을까. 어쨌든 오래전부터 봐온 소큐로서는 그런 모습에 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이제 내가 떡밥을 물 차례라고 생각했지만, 나야말로 미끼를 던질 때를 잡은 셈이었다.
“조용히 옮겨갈 준비를 한다고 해도, 제가 가즈사께 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찌 보겠습니까. 어쨌거나 조정의 관직도 받았고 명목상으로나마 미요시 가문의 일원입니다. 이렇게 숨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아줄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그렇게만 보실 일은 아니지요. 반드시 오와리로 가서 임관하는 것만이 그분께 의탁하는 길은 아닙니다. 은인자중하며 가즈사 님의 천하가 올 때까지 물밑에서 저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 역시 가즈사께 큰 공을 세우는 길이라 할 수 있지요.”
이마이 소큐는 좀 똑똑한 아홉 살짜리 아이를 꼬드겼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야말로 지금 이자의 약점을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이도 저도 싫어서 중립을 택했던 것처럼 보였던 이가 실은 다른 다이묘의 수하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 시점에서 야마시로파와 셋츠파의 합작은 당연한 수순이 될 터였다.
“어떤 것들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사흘 정도 소큐가 하는 양을 지켜보자 그가 노부나가의 협조자라는 물증을 잡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물증의 단서를 얻은 것이지만, 이 정도만 해도 미요시 가문의 첩보망을 움직이기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모든 것이 확실해진 다음, 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 * *
“남만의 책을 구해서 번역을 해봤는데, 소큐 님께서 읽어보셨으면 해서 가져왔습니다. 세 권 전부 포도아보다 멀리 있는 이태리라는 나라 사람인 닛코루로라는 이가 썼다는데, 이 책이 마음에 들어서 꼭 읽어보십사 드립니다.”
“새로운 지식은 언제나 환영이지요. 철포도 전수한 자들이니 또 얼마나 배울 것들이 많겠습니까.”
유키나가는 소큐에게 세 권의 책을 선물로 주었다. 모처럼 받은 남만인의 저술은 장년의 무기상인의 마음을 자극했다.
각지의 다이묘가 할거하여 전란이 끊이지 않는 일본은 결코 평민이 살기 좋은 나라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무사가 창칼로 찍어누르면 얼마나 인품이 훌륭하건, 돈이 많건 무의미했기에.
이마이 소큐 역시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다이묘와 닿아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무사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히 얼굴조차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는 신세였다.
- 아버지, 저들과 우리는 같은 조상을 두고 있는데 왜 우리는 사족이 아닙니까?
- 알려고 하지 말거라. 우리는 고작 상인일 뿐이다.
어느 정도 장성한 뒤에야 그의 조부가 가문 내 권력투쟁에서 밀려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조부님께서 가독을 이으셨더라면….’
그러나 현실은 하늘 위의 신분인 무사가 아니라 일개 상인에 불과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 너희 상인놈들은 항상 말이 많아! 기한 내로 군량미 천 석을 준비해놓으라 하지 않았나!
- 하, 하지만 시장에 그만한…
- 닥쳐라!
서걱 소리와 함께 미곡상인 노릇을 하던 친구는 그대로 도륙나고 말았다.
무사가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상인은 그저 굽신거려야만 했다. 소큐는 동업자가 참수당했을 때 그 사실을 새삼 되새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고귀하신 무사 나으리들이 천민 출신의 승려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닌가.
- 선사의 다도는 참으로 훌륭하오. 이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다니.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편히 즐기다 가시지요.
언제나 무서운 얼굴로 위압하며 내키는 대로 백성들의 목을 베던 무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오직 다도를 배우기 위해 정중한 자세로 천민 출신 승려에게 고개를 숙이는 학생이 있을 뿐.
그 모습을 본 이마이 소큐는 다도에 몰두했다. 높으신 분들이 한낱 상인인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게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만을 품고.
이미 부는 많이 쌓아두었기에 다실과 다기를 갖춰놓는 건 식은죽 먹기였다.
좋은 재료와 좋은 도구, 이것들이야말로 다도의 완성. 게다가 다도로 이름높은 다케노 조오(武野紹鷗무야소구)에게 사사까지 받았으니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마침내 그가 권위자로서 만인의 존경을 받게 되는 경지에 오르자 모든 것이 변했다.
- 다실도 정갈하지만 다완이 훌륭하구려.
같은 상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무사들이나 교토의 귀족들까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다도를 배워갔다.
‘예법은 어디나 같거늘. 저들은 결국 돈에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닌가. 참으로 절경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