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지금은 센고쿠시대 (7)
“아버지. 제가 지쿠젠(종5위하 筑前守축전수, 미요시 요시오키) 님을 한번 모셔볼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무사들은 와카슈도(若衆道야중도)를 즐기잖습니까. 제가 들어가서 접대해드리면 저희 집안이 쇼군 측으로 건너갈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이왕 집에 묵게 만들었으니 끝까지 눈을 가려놓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나가요시와 면담하려면 욕심이 눈을 가리고 있는 아버지를 피해야 했다. 요시오키가 우리 집에서 유숙하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아버지께서도 의심을 피하고자 그를 하룻밤 묵게 했으니 달리 내 주장을 막을 명분은 없으셨다.
사랑채에 들어가려 하자 호위가 앞을 막았다. 대가문의 후계자인 데다 스스로도 일국의 다이묘요, 성주였던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웬 놈이냐!”
“류사의 아들 야쿠로가 지쿠젠님께 아뢸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지쿠젠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니 물러가라.”
호위의 태도는 완강했다.
“급한 일입니다.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 쇼군)과도 관련된 일이니 부디 뵐 수 있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이냐?”
밖에서의 소란이 들렸는지 요시오키가 밖으로 나왔다. 자고 있다더니 여전히 갑옷을 입고 있었다.
“너는 야쿠로가 아니냐. 이 몸에게 무슨 할 말이 있어 왔느냐?”
다행히도 요시오키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듣는 귀가 많아 여기서 드릴 말씀은 아닌 듯하온데 안에서 아뢰게 해주시옵소서.”
수하 장수 중 하나로 보이는 자가 귓속말을 하자 요시오키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잠시 후 지쿠젠노카미는 내 청을 허락했다. 옆에 기대어둔 우치가타나(打刀타도, 일본도의 일종)가 번뜩였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암살하겠다고 달려들 일은 없었기에 그리 위협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 네 청대로 주변을 물렸다.”
“세이이타이쇼군이 저희 집안에 술책을 부리려는 바, 슈리다이부께 고변코자 하니 자리를 마련해주시옵소서.”
“무슨 술책인지 말하라.”
“그건······.”
이 사람이 나가요시의 장자요, 후계자이기는 하지만 그에게조차 말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목숨을 건 도박이라면 중간에 다리가 놓여있는 것보다는 직통으로 하는 편이 깔끔할 테니까.
아까 전의 태도를 생각하면 차라리 요시오키가 중간에서 조율해줄 수 있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역시 최종 결정권자인 당주 본인과 직접 담판을 짓는 편이 후련할 것 같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 일은 슈리다이부께 직접 아뢰야 할 일이옵니다.”
“그분의 뒤를 이을 자가 누구인지 알고서도 그리 말하는 것이냐?”
“그만큼 저희 집안의 명운이 달린 중대한 일이옵니다. 제 가친께서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고 저를 보내신 것도 그 때문이옵니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어차피 내 손으로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고 보니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밌는 말이로군.”
내용과는 다르게 말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만약 네가 아버님 앞에서 허튼소리를 한다면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네 녀석은 뭘 할 수 있느냐?”
“소인의 목을 치시옵소서.”
이왕 목숨을 건 도박이니 여기서 또 생명을 담보로 내놓아도 잃을 건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지금 출발하도록 하지.”
“지금, 이옵니까?”
“네 말대로라면 이 집은 위험하니, 숙영지로 가겠다는 것이다.”
“감사하옵니다.”
그 정도로 다급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시오키가 그만큼 내 말을 무겁게 여기고 있다는 말도 되기에 나는 안도했다.
* * *
수만 명의 병력은 각자 자신들의 영지로 흩어져 복귀했고, 성문 앞에 도달했을 때에는 미요시 가문의 직속부대만이 따르고 있었다. 그 덕인지 사카이에서 출발해 나가요시가 거처하는 이이모리 산성에 도착했을 때는 갓 유酉시에 들어선 시간이었다.
성 내에 위치한 저택은 단촐했다. 아니, 내가 현대에서 보았던 유적들은 비교적 후대의 것들이고 지금은 한창 전란의 시기인 데다 여기가 원래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도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이부께서 류사의 아들 야쿠로의 접견을 허락하셨습니다. 같이 들어오라는 명령이십니다.”
나는 요시오키의 네 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갔다. 나가요시의 거처 앞에 당도하자 장지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또 장지문이 있었고, 다시 문이 하나가 더 열리고서야 멀리 당주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후계자는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자기 부친의 바로 앞에 부복했고, 나는 예법에 따라 첫 번째 문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엎드렸다.
“소자, 하타케야마를 토벌하고 돌아왔사옵니다.”
“일군의 대장으로서 첫 출전, 훌륭했다.”
내가 엎드려있는 자리와 미요시 나가요시가 있는 상좌는 중간에 방 하나를 더 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대화하는 목소리는 내 귀에도 충분히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듯했다.
“지쿠젠은 달리 할 말이 있는가?”
“고니시 류사의 아들 야쿠로가 아버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하여 따라오게 하였나이다.”
엎드려있었지만 앞에서 시선이 내 정수리를 꿰뚫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나가요시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류사라······. 사카이의 약재상이로군.”
“그렇사옵니다.”
“류사의 아들 야쿠로는 고개를 들라.”
그제야 나는 상체를 일으켜 나가요시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 황급하게 고개를 숙여 눈을 피해야 했다.
이미 요시오키는 자기 자리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눈앞에는 멀리 나가요시만이 보이고 있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자신의 후계자와 비슷했지만, 독기가 서려 있는 것에서 차이가 느껴졌다.
“말하라.”
요시오키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이었다. 입을 떼는 것조차 긴장이 될 정도로. 하지만 여기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 수는 없는 일.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소인과 소인의 집안을 살려주시옵소서.”
섣불리 장황하게 말했다가 잘리기라도 하면 오히려 허사일 터. 차라리 눈앞의 다이묘가 호기심이라도 가질 수 있게 본론부터 말했다. 하지만 나가요시는 구체적인 내용을 물어보지도 않고 피식 웃었다.
“훗, 류사의 아들놈이 제 아비의 목숨을 살렸군.”
오히려 뜻밖의 반응이 나왔지만, 감히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단조.”
“옛!”
당주의 부름에 장지문 너머, 내 시야의 밖에서 누군가가 답했다.
‘단조? 가토 단조인가.’
단조라면 전설상의 닌자 중 하나였다. 실존 여부조차 불투명하고 아예 특정 인물이 아니라 지위를 가리키는 설도 있었던 걸 고려하면, 이 단조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름값을 생각하면 역시 우리 집에도 감시의 눈길이 있었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류사의 처분은 뒤로 미룬다. 지켜보기만 하도록.”
“존명.”
늙은 다이묘는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몸을 만나고자 한 것이 정말로 네 생각이냐, 아니면 누가 일러주었느냐?”
“소, 소인의 판단이었사옵니다.”
이마이 소큐가 조언해주었던 것은 알지는 못했는지, 나가요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다른 자도 아니고, 무가의 동량이다. 요시테루가 너를 가신으로 들이겠다 했을 때, 마음이 동하지 않았더냐?”
“그보다는 저희 집안을 꼬드겨내고 장차 다이부를 도모하려는 흉계로 보였사옵니다.”
다이묘의 기세가 살짝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나를 비웃는 듯했다.
“오만하구나. 고니시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더냐?”
“아무것도 아니기에, 감히 다이부께 엎드려 구명을 청하옵니다.”
아버지가 미요시 가문의 후원을 받는 이상, 미요시 가문의 당주는 우리 집안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적어도 내가 먼저 고변을 해버렸으니 더는 고니시에 책임 소재는 물을 수는 없는 노릇. 명색이 오다 노부나가 이전의 천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나가요시가 어리석은 선택은 할 리 없었다.
“허! 재미있도다. 허나 과연 그러했느니. 네 녀석이 이 몸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적어도 네 아비는 도적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니라.
하나 정말로 쇼군이 네 녀석을 부른다면 이 몸은 굳이 막을 이유가 없다. 아시카가 가문과 다투었던 것은 이제 옛일. 어쨌거나 무가의 동량이 직접 지목했으니 한 사람의 무사로서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지.”
정말로 그러겠다고 을러댄다기보다는 시험해보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소인은 이미 다이부께 말씀을 올렸사오니 결정을 기다릴 뿐이옵니다.”
“그 결정이 네 녀석을 치워버린다는 것일지라도 말이냐?”
“소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쓸데없이 뻗대보기에는 슈리다이부와 나의 격차가 너무 컸다. 바짝 숙이면 자신의 체면 때문에라도 이쪽에 해롭게 굴지는 않을 터. 적어도 목숨을 건지고 우리 집을 보전한다는 당초의 목적은 거의 달성했다.
다이묘는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비록 네 나이가 어리고 신분이 미천하다 하나, 이 몸에 의리를 지킨 것은 가상한 일이다. 그래, 나이가 어찌 되느냐?”
“올해로 아홉이 되옵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우리 집은 살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쿠젠이여.”
“네, 아버님.”
“야쿠로를 입적토록 하라. 옛 경전에 이르기를 나이 차이가 10년을 넘기면 부자지간의 예로서 대한다 하였으니, 스물하나면 그리 적은 나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인즉.”
“알겠습니다.”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라 놀라서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도 내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무례를 범하거나 말거나 나가요시는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지쿠젠노카미의 양자가 되었으니, 야쿠로라는 천한 아명 대신 새 이름을 쓰도록 하라. 조부 유키마사行正에게서 한 글자를, 그리고 네 주인이 누구인지 명심하라는 뜻에서 이 몸의 이름(나가요시長慶)에서 다시 한 글자를 가져와 유키나가(행장行長)이다.”
“은혜가 각골난망이옵니다.”
“유키나가는 며칠 머물도록 하라. 청지기는 방을 하나 내어주도록. 그리고 요시오키를 제외하고 모두들 물러가라.”
시종에게 이끌려 나와서 묵을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냉수를 한 잔 마시고서야 겨우 사태가 파악되기 시작했다.
“전화위복인가?”
일단 목적은 이룬 셈이고, 오히려 초과달성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제대로 엮여버렸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제 영영 미요시 가문에 묶인 셈이로군. 아버지야 뛸 듯이 기뻐하시겠지만······. 이래서야 오다 노부나가에게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아직 나가요시의 꿍꿍이조차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입적시킨 것인가.
“지쿠젠께서 찾으십니다.”
한참 고민하는 와중에 요시오키가 나를 자신의 처소로 호출했다. 하인을 따라가니 굳게 닫힌 장지문 너머로 사람 그림자가 하나 비쳤다.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할 것이다.”
목소리의 주인은 내 양부가 된 사람이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대면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황공하옵니다.”
“네가 은의를 잊지 않았으니 아버님께서 상을 내리신 것이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