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지금은 센고쿠시대 (6)
상인으로서 그가 자기 손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에 불과한 평범한 이야기가 서두였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말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 자리에서 시토를 보여드렸는데, 그것이 쇼군께도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네. 혹시 그분을 섬길 생각이 없는가?”
“저는 일개 평민일 뿐인데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쇼군께서 자네에게 관심을 보이시니 하는 말일세. 그리 거창한 직위는 아니고, 아마도 데다이(手代, 다이묘 밑의 하급 관리)나 그 밑의 보좌로 시작을 하게 되겠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니, 출셋길도 그렇게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황공할 일입니다마는, 역시 제 분수에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쇼군이 최고의 실권자라고 해도 그 역시 자기 영지를 거느린 다이묘이기도 했다. 당연히 영지를 관리할 가신들을 두는 건 다른 다이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데다이 정도는 평민 중에서도 더러 뽑았지만 일단 되고 보면 영주의 가신이라는 위치 때문에 역시 평민들에게는 하늘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생에서의 형인 야주로를 입양했던 집이 비젠국의 데다이였고, 아버지나 형이 그 자리를 무척이나 높게 보지 않았던가. 하물며 보통 다이묘도 아니고 쇼군의 가신이라면 명목상으로만 놓고 봤을 때, 그야말로 하늘 위의 하늘, 천외천이나 다름없는 위치였다.
하지만 섣불리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쇼군이 교토로 복귀하면서 미요시 나가요시와 화친을 맺은 것이 몇 년 전 일이지만, 막부는 여전히 롯카쿠 가문을 이용해서 미요시 가문을 견제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미요시 가문의 피후원자인 고니시 약재상, 그 유일한 후계자인 나를 쇼군이 거두겠다는 것은 꽤나 수상해 보이는 제안이라 할 만했다.
“물론 자네 같은 나이에 무가의 동량을 섬길 생각을 하자니 두려운 건 당연하겠지만, 생각해보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에서 거절의 뜻을 보였지만 츠다 소규는 순순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른 분도 아니고 쇼군께서 자네를 친히 지목해서 쓰시겠다는데 거절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너무나 급작스러워서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뭐, 직첩이 내려오려면 시일이 좀 걸리겠지만 마음의 준비는 해두시게나. 그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든 여기 사카이에 츠다 소규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주게.”
협박이라기보다는 미리 알려주면서 눈도장을 찍겠다는 의도가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츠다 소규가 쇼군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고? 이자 때문에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처지가 되고 말았다.
* * *
이마이 소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달콤한 제안 뒤에 어떤 독이 들었는지 간파한 야쿠로도 야쿠로였지만, 야마시로파가 상당히 과감한 수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셋츠파 내부에 분열을 일으키려는 술수다!’
류사에게 부탁받은 것이 아니더라도, 소큐에게 야쿠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임관시켜야 할 인재였다. 어쭙잖은 인간들의 암투로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야쿠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꼬?’
산전수전을 모두 겪어본 장년인은 섣불리 조언했다가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다이묘도 아니고 쇼군의 가신 자리다. 어른조차도 흔들릴 일에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아홉 살짜리 아이가 이면의 계략을 간파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직접적으로 거절하라는 조언 대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넌지시 떠보았다.
“쇼군의 가신이라······. 미리 축하해야겠구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소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환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두운 목소리였다. 게다가 호롱불에 살짝 비친 낯은 기대감으로 상기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산에서 호랑이를 마주한 듯 안색이 창백했다.
“기쁘지 않더냐?”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 들었던 이야기를 반기는 기색은 아닌 듯싶어지자, 장년의 무기상인은 제대로 된 조언을 했다.
“네가 성숙하여 마냥 좋아하지 않으니 나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너는 지금 매우 위험하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니시 야쿠로는 자기 집안이 얽힌 역학 관계를 잘 아는 듯했다.
“만약 제가 쇼군의 가신이 된다면, 저뿐이겠습니까? 저희 집안 전부가 위태로워지겠죠. 아니면 미요시 가문이 흔들리거나요.”
“고니시 가문이 미요시를 배신하는 모양새가 될 테니 말이다.”
셋츠파의 일원을 야마시로파로 전향시키는 훌륭한 수였다. 게다가 이를 단속하지 못한다면 피후원자의 이탈을 막지 못한 미요시 가문의 권위에는 금이 가게 되어버릴 터. 셋츠의 다이묘라면 결코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일개 평민이 쇼군을 능멸한 모양새가 만들어지니, 그걸 핑계로 고니시 집안을 멸문시킬 구실이 된다. 가산은 당연히 막부가 몰수해버릴 명분이 섰으니 셋츠의 다이묘로 들어가는 돈줄을 끊을 묘책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외통수가 아닐 수 없는 계략이었다.
“아까 하셨던 말씀이 복선이었나 봅니다.”
“내가 아무래도 괜한 말을 했던 모양이다.”
* * *
아버지는 내가 가져온 이야기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셨다.
“무조건 가도록 해라. 이건 다시 없을 기회다.”
“이것은 틀림없이 계략입니다.”
정말로 쇼군이 내 재능을 높게 평가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언급한 벼슬이 하급 관리인 것을 보면 잘 쳐줘 봐야 흥미로운 장난감 정도라는 것쯤은 보였다.
그것을 말씀드렸지만, 오히려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셨다.
“독을 먹으려거든 접시까지 �아야 하는 법이다. 슈리다이부(修理大夫, 미요시 나가요시의 관위)가 불쾌히 여길 수는 있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의 가신이라는 건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어.”
“아버지!”
“되었다, 소리가 너무 크다. 누가 들으면 어찌하려고······. 걱정할 것 없다. 소규, 그자가 이런 일로 장난을 치지도 않았겠지만, 정말 직첩이 내려오거든 곧장 뜨도록 해라. 나도 가산을 정리해서 뒤따라가마.”
아예 진영을 갈아탈 생각이 만만이신 듯싶었다.
“그보다도, 사흘 뒤에 지쿠젠이 사카이에 들른다고 하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도록 해라.”
“지쿠젠······. 말씀이십니까?”
“지쿠젠노카미(축전국 태수 筑前守), 미요시 요시오키 말이다. 복귀하는 길에 우리 집을 방문하겠다더구나.”
요시오키면, 현 당주 나가요시의 적장자이며 후계자였다. 야마토국과 가와치, 이즈미국까지 석권하며 위세를 떨치던 하타케야마 가문을 기이국까지 몰아내고 개선하는 중이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미요시 가문을 후원자로 여기지도 않는 듯, 아버지는 미요시 당주의 후계자에 대한 존칭마저 생략하고 계셨다.
“이번 전쟁에서도 그 막대한 약재를 헐값에 공급했으니, 우리 집안이 할 일은 다 한 셈이니라. 이만큼 했으면 네가 아시카가 가문에 임관하는 것 정도는 용납해야 하지 않겠느냐.”
설득도 삼세번이라고 했던가. 더는 만류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당으로 나갔는데, 이치로가 달을 보고 있다가 이쪽을 보고는 꾸뻑 인사했다.
“돌아오셨습니까요.”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여서 손이라도 다친 것인가 싶었다.
“손을 왜 그렇게 하고 있었어? 손가락을 다치기라도 한 거야?”
“아, 이거 말씀이십니까요? 상처는 아닙니다요.”
“그럼?”
이치로는 손모양을 아까처럼 만들다가 모으고, 다시 검지와 중지를 이상한 모양으로 펼쳤다.
“고향에 있을 적에, 근처에 계시던 스님께 배운 것입니다요. 귀신을 내쫓고 정신을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배워뒀습죠.”
처음 손동작은 마치 지권인 같았다. 전생에 사찰로 답사를 다니면서 불상이 저 모양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비로자나불이던가?”
“네?”
“아, 아니다. 신경 쓸 것 없다.”
무심코 전생에 배웠던 지식이 튀어나왔다. 이 정도는 16세기에도 통용될 지식이라 괜찮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마음이 황망해서 적당히 얼버무리고 내 방으로 향했다.
* * *
사카이는 여전히 쇼군의 직할령이기는 했지만 미요시 가문의 영역으로 둘러싸인 형국이었기 때문에 군대를 이끄는 요시오키는 거리낌 없이 마을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지쿠젠노카미님.”
“오, 도방이 아닌가. 이번 전쟁에서는 고니시 약재상의 노고가 컸소.”
“미요시 가문의 은혜에 작게나마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속에 품은 뜻이야 어떻든 아직은 미요시 가문의 후원을 받는 신세인데다, 상대의 지위를 감안해서 아버지는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계셨다.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상급을 내리려 하는데, 원하는 게 있는가?”
“어떤 것이든 내리시는 대로 받겠나이다.”
미요시의 당주 후계자는 상단 도방의 답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듯 보였다.
“하하하. 그렇게 말하니 아주 무거운 상을 내리라 말씀드려야겠군.”
아버지는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계셨어도, 눈앞의 다이묘에게는 정성을 다하는 것 같은 태도를 유지하셨다. 다행스럽게도 미요시 가문의 젊은 후계자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조촐하나마 주안상을 마련하였사옵니다. 저녁을 드시면서 여독을 푸시옵소서.”
“도방의 정성이 있으니 거절할 수가 없군.”
미요시 가문의 후계자를 위한 저녁상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졌다. 하지만 상을 눈앞에 두고도 요시오키는 투구만 벗었을 뿐, 여전히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제 스물하나라는 것 같았는데 아직 수염도 없었고 피부도 고왔다. 어째서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들 사이에 와카슈도가 행해졌는지 알 것도 같을 정도의 외모였다.
하지만 겉모습보다도 그 태도가 더욱 훌륭했다.
대체로 무사라는 족속들은 평민의 봉사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스스로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전공을 으스대거나 우리 부자를 압박하는 일이 없이 시종일관 존중해주었다.
“앞으로도 우리 가문을 위해 힘써주게.”
“여부가 있겠나이까.”
당주 후계자가 술을 즐기지 않은 덕에 이 낯간지러운 자리는 금방 끝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참 시간이 지나버려서 숙영지로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가겠다는 요시오키를 말리고 가장 좋은 방을 내어놓아 묵게 했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쇼군의 가신이라는 미끼에 눈이 멀어서 아무 말도 듣지 않으려 하고 계시니, 직접 나서서 나가요시와 담판을 지어야 할 상황이었으니. 후계자라면 충분히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마침 요시오키의 외모 덕에 아버지의 눈을 피해 요시오키에게 말을 전할 적절한 핑계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