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지금은 센고쿠시대 (4)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낸 뒤, 다른 사환들과 약재를 다듬느라 정신없는 이치로를 불러내 데려왔다.
“너는 여기 쌓인 거래 명세서를 약재별로 분류한 다음, 날짜순으로 정리해두도록 해라.”
이치로에게는 거래 명세서의 분류를 맡기고, 나는 나대로 장부에 적힌 내용을 핵심만 남기고 모조리 쳐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표를 그리고 가로축에는 날짜를, 세로축에는 약재의 이름을 순서대로 적는다.
그리고 날짜에 맞춰서 드나든 수량을 기입한다.
전형적인 스프레드시트 작업이었다.
약 한 달 분량을 끝내놓으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점심 직후부터 시작했으니 족히 두 시진은 꼬박 앉아서 작업을 했던 것이다.
“작은 주인님, 시키신 일을 다 했습니다요.”
마침 이치로도 분류 작업을 마무리했다.
등잔이라도 가져와서 작업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생각보다도 진척속도가 훨씬 빨랐다.
“네가 정리한 명세서들은 흩어지지 않게 잘 두도록 해라. 날이 어두워졌으니 나머지는 내일하고.”
다음 날도 약재상의 모든 사람들이 조제에 전념하는 동안 나와 이치로는 사무실에서 정리작업을 마저 했다.
“이 서식대로 하여 네가 쌓아두었던 명세서의 내용을 적으면 된다.”
역시 내가 만들어놓은 표에 따라서 내용을 채우게 시켰다.
모든 작업은 약 미未시가 끝날 무렵에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사흘을 기한으로 잡았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이틀 내로 마무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내가 확인할 일만 남았으니, 가서 조제를 돕도록 해라.”
몸이 편했는지 이치로는 못내 아쉬워했지만, 지금부터는 나 혼자서도 충분한 작업이었다.
아버지도 아랫사람들에게 함부로 일을 맡기지 않으셨으니, 나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했다.
“다 끝난 게냐?”
“오셨습니까.”
내가 이치로를 되돌려 보내자 그걸 보신 아버지께서 다 된 줄 알고 확인하러 오신 듯했다.
“정리는 끝냈지만, 아직 대조하는 과정이 남았습니다. 금방 끝날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벌써 말이냐? 허… 어디 어떻게 하는지 좀 보자꾸나.”
아버지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먼저 이치로가 맞게 기입했는지 대조해보았다.
명세서와 그걸 정리한 문서가 일치한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내가 새로 만든 장부와 일치하는지 확인할 차례였다.
“1월의 스무닷새째 날에 감초가 맞지 않는데······.”
“뭐라? 어디 보자.”
혼잣말을 들으시더니 아버지께서는 내 손에 들려있던 책들을 휙 채가신 다음 직접 보셨다.
“이걸 어떻게 읽는 것이냐?”
표는 매우 직관적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난해한 숫자판에 불과할 터, 나는 차근차근 읽는 법을 알려드렸다.
“가로축의 날짜와 세로축의 약재를 따라가서 보시면 됩니다.”
“호오… 이럴 수가! 그렇지, 그렇지. 내가 이걸 기입하지 않았던 게로고.”
아무래도 창고에 쌓인 실물과 재고의 차이를 맞추신 것 같았다.
“참으로 대단하구나. 한눈에 다 들어오다니.”
아버지께서는 표로 정리된 장부를 보시고 몇 번이고 감탄하셨다.
“열흘도 넘게 걸릴 일이거늘.
한데, 이 정리법은 뭐라고 부르면 좋겠느냐?”
“어….”
“정해둔 것이 없다면 고니시류 부기법이라 하면 좋겠구나.”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이런 것이 일본인의 감성이었나 싶었다.
명성을 얻기에는 더없이 좋은 방법으로 보였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마다. 모든 상인이 전부 이 방식을 도입하려 들 것이니, 고니시류라 하면 에고슈에 속한 자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겨줄 수 있을 게다.”
결국은 사카이의 정치적 상황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돈을 풀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나, 이 부기법을 사용하면 결코 그 이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고니시류로 하자는 것이야.”
부정선거라는 개념조차 없을 시대. 에고슈의 도제 격인 오도시요리(大年寄대연기)는 에고슈(會合衆회합중)에서 선출하지만 그 과정은 결국 후보로서 자신을 알리기 위한 돈 잔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홍보에 막대한 비용을 내지 않고도 현명한 자라는 명성을 얻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유파를 만들자면 고작 한 가지 기술만 가지고는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그건 별 상관이 없느니라. 네가 수백 년간 변함없이 유지된 장부 기입 방식을 한번 바꾸기 시작했으니, 앞으로도 불편한 점이 보이거든 거리낌 없이 고치도록 해라.”
아버지는 잠시 고민하시다가 이 표에도 명칭을 따로 짓자고 하셨다.
“이렇게 가로세로로 표기하는 방식은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우니 역시 이름이 있는 편이 낫겠구나. 뭐라고 하면 좋겠느냐?”
“각 칸이 자료를 따라가는 집처럼 보이니 이렇게 부를까 합니다.”
얼른 옆에 있는 종이에 시토(此戶, しと)라고 적었다.
원래 스프레드‘시트’ 문서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오기도 했고, 얼른 떠오르는 한자발음을 조합한 결과였다.
“시토, 시토라······. 입에 착 감기는 말이로구나.”
아버지는 다음 에고슈의 소집일에서 고니시류 부기법을 전파하셨다. 야마시로파조차도 시토의 직관성에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 알려지자 예상대로 고니시류 부기법,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된 시토는 빠른 속도로 사카이 전역에 퍼져나갔다.
“미쓰이 님. 대금을 치르러 왔습니다.”
“오, 고니시 군이로군. 그러고보니, 자네가 시토를 창안해냈다고 했나? 유용하게 쓰고 있네.”
심부름을 다닐 때마다 이런 인사는 일상이 되어갔다.
셋츠파가 아닌 상인 중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내려 애쓰는 모습도 간간이 보였지만 대개 사족만 붙이는 꼴이 되어 비효율을 초래하기 일쑤였다.
“무슨 기관총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고작 표로 정리하는 기법 하나만 내놨을 뿐인데 이 정도의 파급 효과라니······. 잘하면 겐푸쿠(元服원복, 성인식)가 내 오도시요리 취임식이 되겠는데?”
21세기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이 시대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가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달려들 발상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 하나만으로도 사카이에서 고니시의 이름값은 나날이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 * *
“나흘 뒤에 열리는 다도 모임에 야쿠로만 오라고 했다고?”
“네, 어르신.”
초대받은 다른 이들은 야마시로파가 아니면 중립에 선 자들이었고, 셋츠파와 관련된 사람은 나 하나뿐인 듯했다.
“이봐. 내 아들이 아무리 영특하다고는 해도, 이제 겨우 아홉이야. 이건 도리가 아니잖은가?”
“시토를 고안해낼 정도라면 어엿한 어른으로 대우해도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하.”
미요시 가문이 하타케야마 일당을 남쪽의 기이(紀伊기이, 현재의 와카야마 현)국까지 몰아내버리고 승전보가 들어오던 무렵의 일이었다.
에고슈 내에서 야마시로파에 해당하는 츠다 소규(津田宗及진전종구)가 우리 집안에서 나에게만 다도 모임의 초대장을 보냈다.
“술수를 부리려는 것이 너무 뻔하구나.”
“한번 다녀와 보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가겠다는 것이냐?”
고니시 약재상 배후에 있는 미요시 가문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다, 시토의 도입까지 겹쳐서 차기 에고슈의 대표는 아버지인 고니시 류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시토의 발명자인 나를 깎아내리고 망신을 주기 위해 혼자 불러내려 한다는 것이 부친의 견해였다.
“저는 고작해야 아홉 살짜리에 불과한데, 어른들이 그런 짓을 벌여본들 무슨 소득이 있겠습니까?”
“아까 초대장을 가져온 자가 말하는 걸 듣지 못했느냐. 사실 이 마을의 주민 중에서 너를 한갓 어린 아이로 보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더더욱 내게 모욕을 줄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를 혐하하려는 의도를 품었다면, 대상에게 무작정 달려드는 짓은 미련한 하책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시토의 발명자를 까내리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 들 가능성이 훨씬 높아보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근거가 있느냐?”
자식이 장성해도 부모는 여전히 아이로 본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내 말에 귀 기울이시는 걸 보면 확실히 아버지조차도 반쯤은 어른 대우를 해주시는 것인가 싶었다.
“단지 시토만의 문제라면 아버지의 말씀이 옳겠지만, 우리 뒤에는 미요시 가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저급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보다는 아마도 소자를 야마시로파로 회유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회유라?”
“이 역시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받아낼 건 받아내고, 적당한 빌미로 입을 씻어버리면 저들이야말로 망신을 당하는 모양새가 될 겁니다. 그러니 가서 뭐라고 하는지는 들어보고자 합니다.”
“흐음······. 하나 역시 불안한 일이다.”
아버지는 내 주장에도 설득력이 있다고 보셨지만, 역시 고의적인 망신주기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셨다.
“아버지. 그렇다면, 소에키 님께 도움을 구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소에키, 훗날의 센 리큐는 다나카 가문의 대리인으로 역시 에고슈의 일원이었기도 했고, 지금도 다도로 명성이 높은 승려였다.
그리고 양식있는 중립파인만큼, 부당한 짓을 당하는 경우에는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었다.
“소에키 선사라….”
“그분이라면 파벌에 상관없이 어른들이 어린 저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걸 막아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속세에는 욕심을 두지 않고, 사심 없이 가업을 승계한 여동생과 매부를 돕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소에키에 대한 세간의 평이었다.
“선사의 인품이라면 허튼짓을 그대로 두지는 않겠지. 마침 초대장의 명단에도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 한번 약속을 잡아보마.”
다나카 댁으로 보낸 서편은 이마이 소큐의 집에서 만나자는 회신으로 되돌아왔다.
“어차피 이마이 소큐 역시 중립파인 데다 인품도 괜찮은 편이니, 상관은 없겠지.”
다음날, 나와 아버지는 이마이 댁의 다실에서 소에키를 만났다. 보통은 다도 모임의 주최자가 감상할 다기를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소에키가 백자 한 점을 감상용으로 내놓은 자리였다.
“조선에서 들여온 백자인데, 어떠신지요?”
맑은 우윳빛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의 가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두절미로 용건을 꺼내셨다.
“제 아들이 츠다 댁에서 열리는 차카이(茶會차회)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네, 저도 초대장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마이 소큐는 적극적인 중립파, 야마시로파도 그가 껄끄러웠는지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소에키는 그 스스로가 정치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다도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라도 체면상 부른 것이었다.
아무리 승려일지라도 다나카(田中전중) 가문의 후견인으로서, 가업의 거래처들을 상대로 아주 매몰차게 굴 수는 없는 일. 소에키는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나올 생각이었지만 고니시 류사의 부탁 때문에 계획을 바꿔야 했다.
“아무래도 보호자 없이 제 아들이 혼자 가야 할 처지인지라, 아직 예법에 익숙치 않아 결례라도 저지르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해서, 그 자리에 계실 선사님께 제 아들을 봐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아주 이쪽 편도 아닌 중립파 앞에서 다른 파벌과의 갈등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도 체면 깎이는 일, 아버지는 옆에서 보고 듣는 내가 참 뻔뻔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약간의 아쉬움과 부친으로서의 정을 연기하며 청을 넣었다.
야마시로파 사람들의 의도를 잘못 알아차리셨던 만큼 이 태도가 진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걱정이 앞선다면 가장의 권한을 내세워 가지 못하게 막으면 그만이 아니었을까.
“허, 츠다 댁에서 아드님만 불렀다는 것입니까?”
옆에 있던 이마이 소큐가 아버지께 질문했다.
“초대장을 들고 온 심부름꾼에게 몇 번을 물어보았지만 역시 그렇다고 하더이다.”
사형제가 나란히 혀를 찼다.
“원······. 너무 뻔한 수작이 아닙니까. 아무리 자신들이 궁지에 몰렸다고는 해도 부자지간을 갈라놓고 술수를 부리려 하다니요.”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단지 제 아들이 어떤 아이인지 궁금한데, 저하고는 껄끄러우니 그리 한 것이겠지요.”
아버지나 나나 이 두 사람의 견해에 백배 동의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예법이 익숙치 않은 내가 친절한 어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점은 심려치 마십시오. 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잘 지켜보겠습니다.”
“선사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