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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화 (2/225)

2화 지금은 센고쿠시대 (2)

“도방 나리께서 오늘은 출타하기 전에 안채로 오라고 하셨습니다요.”

“무슨 일 때문인지 알아?”

“그건 따로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요.”

어제는 지나칠 정도로 배를 구경하는 것에만 몰두한 듯싶어서 다른 곳들을 돌아보려 했는데 아버지의 호출이 있었다손님맞이라면 사랑방이고, 그 외의 일이라면 약재상의 사무실을 겸하는 바깥채로 부르셨을 일이다.

아마도 부모님 두 분이 같이 말씀하실 일이 있는 듯 했다.

안채로 가니 이미 형도 와 있었다.

“너희 둘 중에 하나가 비젠(備前비전, 현대의 오카야마 현과 효고 현 일부)의 데다이(手代수대, 다이묘의 하급관리) 댁에 양자로 가야겠기에 오라고 했다.”

원역사대로라면 내가 가게 되는 자리였다.

언제고 말이 나올 것은 예상했고, 어떻게 사양할 것인가도 고민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이른 시기라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이 묘하게 이상했다. 아직 결정을 안 하셨다는 듯한 뉘앙스가 아닌가.

슬며시 눈치를 보니 야주로의 눈에 욕심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이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데다이라고 하면 낮은 지위이기는 해도 다이묘의 가신이다. 그런 집에 양자로 간다는 것은 평민에서 사족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임을 뜻하기도 했다.

“법도대로라면 첫째인 야주로가 남고, 둘째 야쿠로가 양자로 가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그 전에 너희들의 생각을 들어볼까 하여 불렀다.”

“제가 데다이 댁에 가고 싶습니다.”

내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야주로가 나섰다.

“역시 그런가… 야쿠로, 네 뜻은 어떠냐?”

어떤 식으로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최대한 어른스러운 답을 내놓았다.

“저는 아버지 곁에서 가업을 잇고 싶습니다.”

“너희들 뜻이 그렇다면 그대로 하는 것이 옳겠지.”

야주로는 그대로 짐을 싸서 데다이 댁에서 온 심부름꾼과 같이 집을 떠났다.

“도련님, 외출하지 않으십니까요?”

배웅하고 돌아오니 이치로가 내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원래 계획은 어제 못다 한 마을 구경이었으니, 길 안내를 맡았던 입장에서 그렇게 물어보는 것도 당연했다.

“음··· 오늘은 아무래도 날이 아닌 것 같아. 외출할 생각은 없으니, 볼일 봐.”

“주인어른 말씀이, 도련님을 뫼시라 하셨습니다요.”

“내 방으로 갈 거니까, 너도 근처에서 쉬다가 부르거든 오도록 해.”

마을 구경에 흥미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예상보다도 상황이 무척이나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대개 아들을 다른 집으로 보낸다고 하면, 장남이 집에 남아서 가업을 잇고, 차남이 보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 예를 따르자면 중간에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에게 원하는 바를 확인하는 과정은 생략한 채, 내가 데다이 댁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너무 안일했어.”

물론 내가 포기하고, 야주로가 탐냈던 길이 신분 상승의 첩경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쪽은 너무나도 갑갑하게 느껴졌다.

“뱀의 머리가 될 바에야 용의 꼬리라도 붙드는게 낫지만, 이건 문자 그대로 계구우후(鷄口牛後)가 아닌가.”

고니시 가문이 평민이기는 해도, 신분상의 제약만 제외하면 아쉬울 것이 없는 환경이었다. 닭 부리조차도 소의 꽁지보다는 낫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닭이 아니라 돼지와 비교해도 무방할 터,

다이묘 아래로 숱한 가신들이 줄지어있는 구조의 최하층에 묶여 있는 것보다는 기나이에서 으뜸가는 약재상의 아들로 행동하는 편이야말로 운신의 폭이 넓어 보였다.

“빨리 내 자리부터 만들어두지 않으면 안 되겠어.”

아동인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던 21세기에조차 미성년자의 권리는 친권자에게 종속된 편이다.

하물며 지금은 근대 이전의 사회, 아동은커녕 보편적 인권조차 등장하지 않은 이 시대에서 평민 신분의 아홉 살짜리 아이는 주변 여건에 휘말리기 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방을 나서자 이치로는 여전히 마루에서 앉아 있었다.

“나가십니까요?”

“아니, 아버지를 뵈려고.”

가게 쪽으로 가니 다행히도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오, 야쿠로. 오늘은 외출하지 않았느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아버지 곁에 남아서 가업을 잇기로 했으니, 저도 일을 돕고 싶습니다.”

내 말을 들으시더니 놀람이 약간에 대견함이 섞인 표정을 지으셨다.

“기특한 말이다만,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아직 몸이 다 자라지 않았으니 힘쓰는 일은 못 한다 하더라도 글과 숫자는 알고 있어 가게의 사무는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상인이 직접 짐을 나를 수도 있지만 크게 벌기 위해선 크게 움직여야 하는 법, 노동력은 사람을 고용하면 그만이니라.

네가 돈을 다룰 수 있다면 체력이 모자란 게 대수겠느냐.”

반쯤은 내 역량을 시험하는 기색으로 작은 일부터 해나갔다. 그러다가 불과 닷새가 지났을 때는 아버지의 대리인이 되어 있었다.

“이치로 정도면 네가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을 게다. 만약 모자람이 있거든 이야기하도록 해라.”

대리인이라고 해도 공동 경영자 같은 느낌은 아니고, 특별한 심부름꾼 같은 위치였다. 다른 사환들도 얼마든지 가능한 업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들로서,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신 같은 존재라는 것이 상단 안에서 내 입지를 다지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류사 님의 아들이군. 여기 대금일세.”

사업 방향을 결정하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사환들에게 맡길 경우 물욕에 휘말리기 쉬운 일들은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해가면서 현대의 책으로는 알기 힘들었던 실제 16세기의 세상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이 사카이는 정치 권력의 중심지는 아닐지라도 일본 천하의 부가 모여드는 요지였기에 내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가장 이질적인 것이라면 역시 남만 상인과 예수회의 선교사들이겠지만, 무역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없는 것이 더욱 이상한 일.

그보다도 내 관심을 잡아끈 것은 에고슈(會合衆회합중)의 존재였다.

“에고슈 말이냐? 흠… 여기는 관리나 무사 나리들이 다스리는 땅은 아니지.”

아버지의 말씀에는 은연중에 자부심이 묻어나 있었다.

사카이 촌에는 지방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이묘나 쇼군의 대관(代官)이 와서 다스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그리고 그 위치를 대신하는 것이 거상들의 자치기구인 에고슈였다.

“명목상으로는 쇼군의 직할령이긴 해도 실제로는 공백지라고 보면 된다. 막부가 있는 교토는 멀지만 셋츠의 다이묘는 가까이 계시니 말이다.”

고니시 약재상은 조부이신 고니시 유키마사(小書行正소서행정) 때부터 미요시 가문의 군납 상인 노릇을 하면서 성장했다고 하셨다.

이 마을은 쇼군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였기에, 이곳에서 그 영향력이 사라질수록 우리 상단 뒤에 있는 미요시 가문 역시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이부(정5위상 修理大夫수리대부, 미요시 나가요시) 님은 이곳을 가문의 영지로 편입하지 않은 겁니까?”

“그랬다간 모든 무가의 공적이 되어버렸겠지.”

교토의 외항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카이의 정치적 무게감은 가볍지 않았다.

외국 상인들이 드나들고 외교 사절이 출발하는 항구는 곧 일본의 얼굴이나 다름없었기에 덴노의 직할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조정에 실권이 없는 이상, 실질적인 상징과 권위는 막부로 넘어가 있었다.

그런 곳을 일개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로 편입시킨다는 것은 곧 쇼군의 권위를 짓밟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미요시 가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모든 다이묘를 상대로 무한한 소모전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이유로 미요시 가문의 대 사카이 정책은 마을 자치기구인 에고슈 내에 자신의 입김을 불어 넣는 온건한 방법으로 쇼군의 돈줄을 끊어버리는 것이 주된 방침이었다.

“우리 집안도 미요시 가문의 후원을 업고 에고슈에서 아시카가 막부의 영향력을 밀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지.”

도시의 빛이 화려할수록 그 밑에 도사린 어둠은 깊다던가.

사카이 역시도 번영의 그림자 아래에서는 막부와 미요시 가문 사이의 대리전이 벌어지는 판국이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무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다툼에는 관심이 없다. 허나 원래 세상은 목소리 큰 놈들이 이끌어가는 법이니.”

쇼군이 거처하는 교토, 그 주변을 둘러싼 야마시로(山城산성, 교토가 위치했던 율령국)국에서 기인한 야마시로파, 그리고 미요시 나가요시가 차지한 율령국인 셋츠(摂津섭진, 현대의 오사카 시와 효고 현 일부)국에서 기인한 셋츠파.

에고슈 내에서 정치적인 성향을 띠는 거상은 야마시로파가 다섯에, 셋츠파가 셋, 그리고 적극적인 중립파가 여섯이었고, 나머지는 오직 돈벌이에만 몰두하고 있는 무당파에 가깝다고 했다.

언뜻 보면 미요시파를 지지하는 셋츠파의 숫자가 적지만, 미요시 가문의 승승장구 덕에 무당파 역시 이쪽에 약간은 호의적인 정치 지형이었다.

아버지는 대강의 설명을 마치신 다음, 곧 있을 다도 모임의 동행을 권하셨다.

“마침 내일 이마이 소큐(今井宗久금정종구)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으니 너도 같이 가자꾸나. 가업을 잇기로 했으니 차차 에고슈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키는 것이 옳겠지.”

이마이 소큐는 야마시로파와 셋츠파로 갈라진 이 마을 내에서 중립적인 사람들의 우두머리격인 존재였다. 그런 이유로 에고슈의 대표를 맡았다고 했다.

“그를 꼭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만,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       *       *

대부분의 상인들은 사람들이 손쉽게 접근할 만한 거리에 점포를 두는 편이다. 그래도 어디나 예외는 존재했는데, 추운 날씨에도 뜨거운 열기와 소음을 내뿜는 대장간이 그런 경우였다.

쇠붙이를 다루는 것으로 시작해 철포까지 취급하게 된 이마이 소큐의 카지야(鍛冶屋단야소, 대장간)은 생산이 용이하도록 물이 흐르는 해잣가에 지어져 있었다.

“단야하고 다도는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이마이 소큐는 철포를 오다 노부나가에게 공급한 것으로 이름을 남겼던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단순한 거래상 정도가 아니라 그가 아예 단야 공방을 경영하고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방에 울려 퍼지는 쇳소리와 다도라니, 국화와 칼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무라이가 전장에 나가면 심신은 피범벅이 된다. 피에 젖은 몸은 욕탕에서, 마음은 차시츠(茶室다실)에서 씻어낸다는 말이 있다.

이렇듯 다도라 하면 무사들이 정신을 세탁하는 의례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렇기에 차를 음미하는 공간인 차시츠은 속세와 격리되어 고요하고 정갈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쇳소리가 울려퍼지는 속세의 공간과 마음을 가다듬는 의식의 장소가 한 집에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가보면 알 게다.”

하인 하나가 나와서 우리를 로지로 안내했다.

차시츠 주변에 꾸며진 정원을 로지(露地노지)라고 불렀는데, 예법에 의하면 초대받은 손님이 순서를 기다리는 대합실의 구실도 하는 장소였다.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게 마련된 자리 한켠에는 사찰이나 신사를 모방해서 작게 꾸며놓은 데미즈야(手水舎수수사)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속세가 아니니 손과 입을 씻으라는 의미인 듯했다.

“소에키(宗易종역) 선사 아니십니까?”

“고니시 님이시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는 선객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나는 그가 아직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소개하실 때까지 뒤편에서 묵묵히 서서 기다렸다.

“자제분과 같이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야쿠로, 인사 올리거라. 이분은 이마이 소큐 님의 사제이신 소에키 선사님이시다.”

“고니시 야쿠로가 인사올립니다.”

“반갑네.”

사카이로 이사 왔던 날, 식사 중에 들었던 오다 노부나가만큼은 아니라도 ‘소에키’ 역시 상당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소에키, 소에키······. 누구, 아! 센 리큐(千利休천리휴)가 원래 법명이 소에키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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