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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화 (1/225)

1화 지금은 센고쿠시대 (1)

에이로쿠(永禄영록, 당시 일본의 연호) 6년, 전 일본에서 교토만큼 모순에 휩싸인 도시는 없었다.

막부의 주인인 아시카가(足利 족리) 가문과 그 자리를 노리는 미요시(三好 삼호) 가문의 대립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 족리의휘)가 교토로 복귀하면서 봉합된 듯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화기애애할지라도 속에서는 온갖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평민 된 입장에서야 누가 위에 서든 마찬가지이기는 했으나 우리 집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조정의 귀족도, 막부의 무사도 아닌 일개 상인 집안에 불과한 우리 가문은 미요시의 후원으로 일어섰기 때문이다.

쇼군의 위세가 올라갈수록 교토 내에서 미요시 가문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그만큼 우리 집도 위태로워졌다.

그런 이유로 우리 가족은 양 세력의 중립지면서 미요시 가문의 영지 한복판에 위치한 사카이로 집을 옮겼다.

이 해의 정초, 갓 아홉 살이 되어 이삿길에 올랐던 나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우리 집이 있었던 교토는 산으로 둘러싸인 귀족과 무사들의 공간이었다.

색이라고는 사족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절제된 황금색밖에 없는 박제된 도시,

평민들이 사족에게 고개를 숙이듯 풍경도 자연에 거스름 없이 순응했고 나는 세상 어디나 전부 그렇게 돌아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카이(境 경, 현대의 오사카 부 사카이 시)는 달랐다.

바닷가, 그것도 탁 트인 평야 한복판에서 이 화려한 상인들의 공간은 사방이 눈으로 덮인 세상에서 자신만의 색을 뽐내고 있었다.

높으신 분들만을 보호하는 성벽 대신 마을 전부를 두르는 해자를 건너면 형형색색의 집과 상점, 그리고 사람들이 나타났다.

간혹 보이는 칼을 찬 무사들은 스스로의 권위를 드러내는 대신 사람들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리고 주민들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모습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활기찼고,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그 어디에도 강제나 통제가 없었기에 가능한 모습이리라.

방금 입항한 어선에서 바로 들여온 생선이 팔딱거리는 어물전부터 빨갛고 노란 색으로 물들인 비단을 파는 포목점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남만인들.

“저것들은 오니예요?”

“그런 말 하면 못쓴다. 저들은 멀리서 온 색목인일 뿐이야.”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큰 키에 부리부리한 눈, 게다가 노란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지닌 그들은 마치 괴담 속의 오니처럼 보였다.

거리부터 사람들까지 모든 것이 별천지인 세상에서 그나마 익숙한 말차 향기,

오직 그것만이 이 사카이도 히노모토(日本, 일본의 다른 표현)에 속해있다고 주장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다른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날 저녁 밥상 앞에서였다.

“정말 기분이 좋소. 가족들과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또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말이오.”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는 아버지의 주도로 이야기꽃이 피고 있었다.

“이제 교토는 위험하지. 그래도 나가요시 님께서 다시 출병하시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시사로 넘어갔다.

여덟아홉 살짜리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인지라 우리 형제는 그저 새롭고 맛있는 반찬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한 단어가 문득 귀에 들어왔다.

“오와리의 얼간이라 불리던 ‘노부나가’가 쇼군을 알현하고 슈고(守護 수호)를 자처하다니….

전에도 어떤 단어를 들을 때 종종 기시감을 느끼곤 했다. 교토니, 쇼군이니 하는 말, 분명히 처음 들었을 때도 전부터 알았던 것 같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워낙 흔히 쓰이는 단어였으니 어디서 먼저 들었겠거니 하고 넘겨왔다.

하지만 저 ‘노부나가’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쨍그랑

“야쿠로, 야쿠로! 어서 의원을….

강렬한 통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끊겼지만 동시에 세상도 빠르게 나와 멀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방에서 이부자리에 누워있었고, 처음 보는 노인 하나가 내 손목을 보고 있었다.

“놀랄 것 없다. 맥을 짚는 중이니.”

아직 밖이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것을 보면 의식이 없었던 시간 자체가 무척이나 짧았던 모양이다.

의원으로 보이는 노인에게서는 아직 바깥의 찬 기운이 느껴졌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아이의 상태는 생각하시는 만큼 심각하진 않습니다. 시간을 따져봤을 때 1, 2각 만에 일어난 걸 봐도 그렇지요.”

꿈인지 다른 어떤 계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절해 있는 동안 나는 30년의 시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이 고작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사이의 일이었다고 하니 나는 나대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마 오늘 이사하느라 먼 길을 왔다고 하니 추운 날씨에 무리한 듯싶습니다. 한잠 푹 자고 나면 든든히 먹이십시오. 그게 처방입니다.”

별것 아닌 일로 급하게 사람을 오라 가라 했다는 투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혼절한 모습을 직접 보았을 부모님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오오,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얼굴들, 하지만 그 잠깐의 환상을 본 뒤에는 너무나 낯선 분들.

나는 차마 그들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가족들은 내가 피곤해서 그런 것으로 알고 푹 쉬라면서 방 밖으로 나갔다.

“설마, 일본 여행 와서 죽었다고 일본인으로 환생한 건가?”

당황스러웠지만 그것 말고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2011년 3월, 졸업식을 마치고 임용까지 3개월 정도의 공백이 생긴 덕에 여행을 다니기로 했었고, 그 첫 번째가 일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되고 말았다.

“하, 고생 끝났다 싶으니까 이렇게 허망하게 되어 버렸을 줄이야.”

온갖 잡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21세기의 나는 여전히 혼수상태이고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곳은 사후세계고 살아생전의 업을 치르는 중일까?

정말로 두 번째 삶을 사는 것이라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휴, 호접지몽도 아니고… 다 무슨 소용이야.”

꿈치고는 지금 뒤집어쓰고 있는 비단 이불의 촉감부터 싸늘한 공기, 다다미 특유의 건조한 냄새까지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꿈이라면 깼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고 한들, 돌아갈 방법도 마땅찮아 보이니….

현대인이 과거에 환생한 내용, 흔히 보던 소설 속에서 자주 나오던 이야기가 아닌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겨보기로 했다.

“때마침 난세란 말이지….

여행 중에 소서행장의 공양탑을 보고 무슨 첫째가 야주로(彌十郞미십랑)에 둘째가 야쿠로(彌九郞미구랑)냐고 낄낄거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꿈에서는 내가 소서행장이 된 모양이다. 그자의 아명도 야쿠로라는, 내 이름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니시(小西소서)라는 성이야 제법 흔하게 쓰였다고 했다.

하지만 부친의 성함은 물론이요, 약재상이라는 직업까지 같은데, 차남이라는 점까지 공유하는 동명이인이 둘이나 있을까?

“풍신수길의 충복이었던 사람의 몸이라는 건 조금 불만스럽지만, 아직 부하로 들어간 건 아니니까.”

임진왜란에서는 선봉장으로 나서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가문에 의리를 지키다가 참수당한 미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더 말하자면 너무 늦다는 것이다.

외눈박이 근성남으로 유명했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이달정종)는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탄했다던가?

그는 1567년에 태어났으니 1555년생인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르지만, 시작하는 위치가 다르니 오히려 내가 뒤처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테 마사무네는 스스로가 다이묘(大名대명) 가문의 후계자였고, 나는 이제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한갓 평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비교를 하려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서 관백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하는 것이 맞을 텐데, 그도 아마 지금쯤이면 20대 중반쯤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는 아홉 살이니 약 15년이 넘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떠올리면 조바심도 났다.

“어쩔 수 없지. 코리안 난이도를 한다는 마음으로 해볼 수밖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우키타 가문을 섬기다가 히데요시 밑으로 소속을 옮긴다.

후나부교(船奉行 선봉행, 수군 지휘관)로 시작해 1585년 1만석 규모의 영주가 되고, 몇 년 뒤에 근처의 반란을 진압한 뒤 20만 석의 대영주가 된다.

이대로만 따라가도 그럴싸하게 출세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 고작 몇 년 사이에 히데요시와 맞설 기반을 마련한다는 건 말이 안 돼.”

결론은 하나, 원역사보다는 좀 더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 시대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       *       *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벽지나 석고보드의 천장을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지금이 현실임을 인정해야 했다.

외출이 허락된 것은 꼬박 두 번의 밤이 지날 동안 내 방에서 지루하게 보낸 다음의 일이었다.

이틀간은 환자 취급이라 외출 자체가 금지, 그다음 날은 아버지가 붙여주신 사환 하나와 함께 다니는 것을 허락받았다.

“도련님, 여기가 남만 상인들이 배를 대는 항구입죠.”

야마다 이치로, 수더분한 얼굴에 특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평범한 인상을 지녔다.

열다섯부터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해 올해로 열일곱이 되었다고 하는 이 남자는 아홉 살짜리가 여기저기를 지목할 때마다 군말 없이 잘도 안내를 해주었다.

“저게 그 남만선이야? 뭘 싣기에 저렇게 커?”

“네, 도련님. 남만인들은 대체로 금이나 염초, 철포 따위를 가져와서 은으로 바꿔갑니다요.”

명나라의 해금령 때문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과 일본을 오가며 삼각무역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다는 것은 책에서 몇 줄 본 것만으로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짜 눈으로 보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아버님 되시는 류사 님께서도 명나라나 남월에서 나는 약재들을….

이치로가 뭐라고 계속 설명했지만 나는 정신없이 배들을 구경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늘씬하게 생긴 갤리온에 비하면 짧고 넓은 선체는 키 작은 뚱보처럼 보이는 카락에 불과했지만, 그조차도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신항로를 뚫은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나 지구를 일주한 마젤란의 빅토리아는 아닐지라도,

그것들과 같은 종류의 배가 다니는 풍경은 내가 16세기의 사람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해가 붉은빛을 띠고 서쪽 하늘로 넘어가려 하자 이치로가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도련님, 이제 해가 기울어가고 있으니 돌아가야 합니다요.”

분명히 앞으로 날들은 많을 것이고, 특히 배라면 질리도록 타고 다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당장은 배 구경을 그만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내일도, 모레도 질리도록 보실 수 있을 겁니다요.”

하지만 내가 배를 구경하겠다고 또 항구로 오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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