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울지콰야 (2)
광명력 997년 4월 21일 정오.
샤펠 제국 수도 아퐁에서 벨로디나-게마인샤프트 연합과 샤펠 제국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공식적으로 아퐁 협정이라 명명된 이 협정의 내용은 샤펠 제국이 일시금으로 연합 측에 6천억 골드를 배상하는 것과 상비군 규모를 10만 이하로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 외 무역에 있어서의 최혜국 대우라든가 하는 자잘한 부분은 실상 의미가 없을 만큼, 두 조항이 가진 파괴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삽시간에 협정 내용은 아퐁에서부터 콘스탄티노바에 이르기까지 전파됐다.
“이겼어? 정말 우리가 이긴 거야?”
“우리 대왕님은 신들이 축복해 주시고, 게마인샤프트 대왕님은 성녀잖아! 우리가 지는 게 이상하지!”
“살다 살다 진짜 제국을 이기는 때가 있구나!”
게마인샤프트와 벨로디나의 국민들은 자기들이 제국을 꺾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세상에…… 저 미개한 것들이 제국을 꺾었다고?”
“전술적, 전략적 승리지.”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기는? 일단은 숙이고 있어야지.”
제니스 공화국 시민들은 급작스럽게 패권국가가 동쪽에 생겨나자 바짝 긴장했다.
“우리가 졌어?”
“세상에…….”
“신들이시여……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제국 신민들은 자신들의 패배에 좌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딘과 로제는 아주 살뜰하게 6천억 골드를 챙겨 수레에 싣고서 5월 1일 정오에 아퐁을 떠났다.
“오라버니.”
“응?”
“왜 감시자는 안 남겨두셨어요?”
“무슨 감시자?”
“제국이 상비군을 10만 이하로 유지하는지 안 하는지를 감시할 자 말이에요.”
“그게 필요할까?”
“협정을 지키는 지를 파악하려면 필요하지 않나요?”
아퐁을 떠나 사람이 별로 없는 황무지 길가에 들어섰을 때, 로제는 아딘에게 물었다.
“10만을 유지하냐, 안 하냐가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그런 굴욕적인 협상을 제국이 맺었다는 데에 있지.”
감시자의 필요성을 이야기는 로제에게 아딘은 불필요성을 설명했다.
“앞으로 제국은 난장판이 될 거야. 황제의 형제와 사촌들이 권력을 노리고 서로 연합할 거고, 그 아래로 귀족들이 몰려들겠지. 황후도 보니까 야망이 크니까, 마찬가지로 사람을 모을 거고.”
“권력 투쟁이 심해질 거란 말이죠?”
“거기다 각 지방의 유력자들이 사병을 모아 독립 영주처럼 행세하려고 하기도 할 거야. 특히 북부가 그런 경향이 강해지겠지. 한마디로 더 이상 과거처럼 단일 중앙집권 국가의 역할을 제국이 할 수 없게 된다는 거야.”
“그걸 노린 협정이었네요?”
“그렇지. 더군다나 6천억 골드를 일시금으로 받았어. 황실 국고의 절반 이상을 털어먹은 셈이지. 아마 앞으로 황실은 더 가열차게 세금을 끌어모으려 할 거고, 지방 유력자와 귀족들은 그걸 충당하려고 농민들을 쥐어 짜겠지.”
“그럼 또 여기저기서 농민 반란도 일어나겠죠?”
“그렇지.”
아딘의 말에 로제는 미소를 지었다.
“제국은 그러면 됐고, 공화국은요?”
“공화국도 한동안 내부적으로 불안정해질 거야. 외국군이 세 차례나 자기들 영토를 가로질렀으니까.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지겠지.”
“거기다 오라버니가 사주한 화산 열도 해적들의 약탈이 더해지면…….”
“당분간 공화국도 우리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게 될 거야.”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가만히 아딘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요?”
그 물음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완전한 통합을 이루어야겠지?”
그 말에 로제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거대한 신전이 눈앞에 드러났다.
아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신전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여기저기 균열이 보이고, 뜯겨나간 자국들이 선명한 정문을 지나쳐 내부로 들어선 순간, 아딘이 마주한 것은 허리 아래가 사라진 거대한 신상이었다.
“여기는……”
안톤의 도움으로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진 상태에서 무작정 동쪽으로 가다가 마주쳤던 신전.
엘프숲과 벨로디나 왕국 국경 사이에 자리한 버려진 신전.
다시 드워프들과 함께 갔을 때, 버려진 요새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신전.
그 신전이 지금 아딘의 눈앞에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
광명력 997년 5월 25일 저녁, 아딘은 분명 뢰벡에서 잠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뢰벡에서 한참 떨어진 엘프숲 동쪽 외곽에 자리한, 버려진 신전에 와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아딘이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별안간 그의 품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딘은 가만히 품에 손을 넣어 꿈틀거리는 물건을 꺼냈다.
두루마리였다.
두루마리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펄럭이고 있었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두루마리는 아딘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딘은 그것을 그냥 놓아주었다.
아딘이 손을 놓는 순간, 두루마리는 허공에 떠오르며 활짝 펼쳐졌다.
그리고 그 위에, 한 사람의 신상정보가 떠올랐다.
<김현수>
<이 세상의 창조자>
단 한 줄.
그 한 줄이 김현수에 대한 설명의 전부였다.
아딘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두루마리에 나타난, 본래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 어째서…….’
그리고 그가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다시 두루마리는 새로운 정보를 아딘에게 보여주었다.
<울지콰야>
<이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자>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울지콰야란 이름의 존재.
그것은 김현수의 창조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두루마리에 소개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자라는 설명과 함께.
‘이, 이게 뭐야 도대체? 어? 이게 전부…….’
아딘이 당황하는 사이, 두루마리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딘은 그것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순간, 환한 빛이 전방에서부터 아딘의 몸을 덮쳐왔다.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빛은 점차 잦아들었고, 그에 따라 시야를 확보한 아딘은 팔을 내렸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완벽하게 복구된 신상이었다.
“……어?”
아딘은 바보 같은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는 멍하니 복구된 신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분명 김현수,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주 정교하게, 대리석으로 이뤄진 거대한 신상, 그 신상의 모습을 한 자신을 보는 아딘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아딘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별안간 신상의 고개가 움직였다.
아딘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신상은 시선을 아딘에게로 떨어뜨린 채 그에게 말했다.
“오라.”
아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상이 다시 한번 말했다.
“내게로 오라!”
그 순간, 아딘은 잠에서 깼다.
“…….”
아침 햇살이 아딘의 눈을 때리고 있었다.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긴…… 뢰벡…….’
자신이 묵었던 뢰벡의 슈타인하르츠 여관 별실임을 확인한 아딘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그 꿈의 의미는…….’
아딘은 창을 열고 밖을 바라보며 잠시 꿈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다.
그러다 아딘은 별안간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하지만 두루마리는 신전도, 울지콰야라는 존재도 그리고 김현수에 관한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다른 정보를 물었을 때, 두루마리는 충실히 그것을 보여주었다.
즉, 고장은 아니었다.
‘그냥 꿈이었나?’
아딘은 그렇게 생각하며 두루마리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아딘의 꿈은 똑같은 형태로 반복됐다.
마침내 다섯 번째 같은 꿈을 꿨을 때, 아딘은 로제에게 말했다.
“먼저 운터트링겐으로 가 있어. 르보프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해 둘게. 난 잠시 확인하러 들러야 할 곳이 있어.”
아딘의 말에 로제는 살짝 당황스러워했지만, 이내 그의 뜻을 존중해 그를 보내주었다.
로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아딘은 그대로 날아올라 북쪽으로 향했다.
* * *
광명력 997년 5월 31일 새벽.
“신전…….”
아딘은 버려진 신전에 도착했다.
드워프들을 이곳에 잠시 거주시킬 때, 이곳은 분명 요새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그 옛날 도망자 아딘이 머물렀던 버려진 신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정문을 넘어서는 순간,
[사아아아-!]
양쪽으로 100마리의 뱀 인간들이 나타났다.
“헉-!”
아딘은 화들짝 놀라며 불멸의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뱀 인간들은 딱히 아딘에게 덤벼들지도, 심지어 그에게 적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아딘을 바라보며 혀만 날름거릴 뿐이었다.
“도, 도대체 이것들은…….”
아딘은 가만히 뱀 인간들을 노려봤다.
그들의 샛노란 눈은 아딘을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주기적으로 들락날락거리는 혓바닥은 칼로 자르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이 딱히 적의를 보이지 않는 이상, 아딘이 먼저 칼을 휘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딘은 신전 입구를 등진 채 좌우를 경계했다.
혹여나 저들이 집단으로 공격할 의사를 보이면, 일단 신전 밖으로 나가서 싸울 생각이었다.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
그 순간, 신전 내부에서 누군가 아딘을 불렀다.
아딘의 시선이 신전 내부로 향했다.
[혹은 김현수.]
뒤이어 본래 자아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아딘은 눈을 부릅떴다.
“누, 누구냐! 네놈은 도대체 누구야!”
아딘은 신전 내부를 향해 고함쳤다.
[들어오라. 모든 것을 알려줄 때가 됐다.]
목소리는 아딘을 내부로 불러들였다.
아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와라.”
아딘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온몸에 힘이 탁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건……’
아딘은 가까스로 손에 든 불멸의 검을 놓치지 않은 채 고개를 푹 떨궜다.
그리고 곧이어, 아딘은 다시 몸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여, 여기는…….’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주변 풍경은 바뀌어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정문은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하게 됐고, 대신 뱀 인간들이 2열로 도열한 신전 마당이 그의 등 바로 뒤에 놓이게 됐다.
그리고 아딘은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만 햇빛을 받는 신전 내부로 들어와 있었다.
아딘은 가만히 검을 앞으로 겨눈 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습을 드러내!”
“네가 이곳에 온 순간부터 난 항상 여기에 있었다.”
“헉-!”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딘은 화들짝 놀라며 검과 함께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어떻게 보면 남자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여자 같은 사람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누구냐?”
아딘이 칼끝으로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딘의 물음에 그 사람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울지콰야.”
그 순간, 아딘의 표정이 굳었다.
아딘의 표정이 굳음에 비례해 그 사람, 울지콰야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자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순간, 아딘의 품에서 두루마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딘은 그대로 두루마리를 품에서 꺼냈다.
그 순간, 두루마리는 아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울지콰야의 손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