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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67화 (167/175)

167 제국의 침략 (1)

광명력 997년 9월 27일 정오.

벨로디나 왕궁 가을 궁전 알현실.

“…….”

아딘은 아무 말 없이 샤펠 제국의 사신이 가지고 온 황제의 서찰을 읽고 있었다.

사신은 왕좌로부터 30m가량 떨어진 곳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안톤과 궁정대신은 긴장한 표정으로 아딘과 사신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바늘 하나도 떨어뜨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가만히 서신을 읽던 아딘은 이내 서신을 고이 접은 후 가만히 사신을 바라보았다.

[투둑-! 투둑-! 투둑-!]

아딘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리드미컬하게 왕좌 팔걸이를 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긴장감은 더 고조돼 갔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하던 아딘이 입을 열었다.

“가서 황제에게 전하라. 서신 잘 받았다고.”

그 말에 사신은 가만히 고개를 한 차례 꾸벅 숙이며 예를 표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시선을 아래로 살짝 떨군 채 뒷걸음질로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사신이 나가자 그제야 안톤이 입을 열었다.

“폐하. 어찌 그냥 보내신 것이옵니까?”

안톤의 물음에 아딘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안톤이 말을 이었다.

“선전포고문을 들고 온 자가 아니옵니까? 이미 우리와 제국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사옵니다. 헌데 어찌 그냥 보내신 것이옵니까?”

그 물음에 아딘은 차분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마땅히 전쟁 중이라도 외교적 차원에서 방문한 이를 죽이지 않는 법이거늘, 어찌 아직 전쟁이 개시되지도 않았는데 사신을 죽인단 말인가?”

“하, 하오나 폐하.”

“궁정대신은 당장 모든 대신들을 입궐시켜 어전회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라.”

그 명령을 내리고서 아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알겠사옵니다.”

명령을 받은 궁정대신은 그대로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안톤과 단둘만 남게 된 상황에서 아딘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르보프.”

“네, 폐하.”

“어전회의가 끝나는 대로 짐은 원병을 청하러 렝고스로 갈 것이다.”

“레, 렝고스로 말이옵니까?”

안톤은 하마터면, ‘그 야생의 땅에 무슨 원군이 있냐?’라며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런 안톤의 마음을 알았기에 아딘은 가만히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렝고스로 가거든, 그대는 국가평의회를 설득해 만장일치로 전시체제로 국가가 이행할 수 있도록 결의안을 통과시키게끔 하라. 그리하면 제국과의 전쟁은 보다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면서 아딘은 고이 접었던 서신을 안톤에게 건네주었다.

“황제는 오만한 존재다. 그러므로 전쟁 개시일로 못 박은 내년 3월 1일까지는 여유가 있느니라. 잘 준비하길 바란다.”

“……알겠사옵니다.”

그렇게 아딘은 먼저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안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서신을 품안에 넣고는 이내 아딘의 뒤를 따라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 * *

어전회의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아딘으로부터 황제의 서찰을 건네받은 안톤이 차분한 어조로 선전포고문을 읽어내릴 때, 대신들 가운데 입을 뻥끗거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안톤의 낭독이 끝났을 때, 모두의 시선은 아딘을 향했다.

“어찌 보면 이는 필연이었느니라. 샤펠 제국의 입장에서는 제국의 동쪽에 거대한 국가가 나타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터이니.”

그러면서 아딘은 샤를 11세가 전쟁의 명분으로 앞세운 메로네바 왕후의 존재를 두고서는, “그녀가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구실을 찾았을 것이다.”라며 혹시 모를 대신들의 불만을 미리 잠재웠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시 상황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느니라. 아래로는 농민부터 위로는 짐까지, 벨로디나 국민 모두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들고 일어나 싸워야 하느니라.”

그러면서 아딘은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군무대신 불카르 아시오게에게는 전군 총동원령을, 외무대신 빅토르 다비도프에게는 게마인샤프트 왕국과의 유기적 공조를 위한 군사 연합체 구성을, 기술대신 팔키르에게는 개발 중인 신무기의 신속한 배치를 각각 명했다.

그 외에도 재무대신과 식량대신을 비롯해 숱한 내정 분야 대신들에게도 전시 상황에 맞춰 정책을 재정비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딘은 총리대신 안톤에게 명했다,

“총리대신은 이제부터 전시내각을 이끌라. 벨로디나군 최고 사령관직을 겸하며 전쟁과 통치를 모두 담당하라.”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께서는 어이하시려 하옵니까?”

그런 아딘을 향해, 법무대신이 물었다.

아딘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짐은 최전선에 설 것이니라.”

그리고 아딘은 어전을 나섰다.

* * *

9월 29일 오후.

서서히 추워지는 벨로디나와는 달리, 여전히 더운 공기가 대기 중에 가득한 렝고스 서부 메콩가강 연안.

그곳 상류에 자리한, 카르기아 왕국의 왕궁에서 아딘은 오크왕 카르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병이 필요하다.”

“용병 말입니까.”

“내년 3월 1일에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통첩이 왔다.”

“통첩? 허허. 인간은 전쟁도 참 재미있게 합니다. 흐허허.”

“상대방의 병력은 50만이다. 아마 전군을 동원하는 것 같은데,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50만이라……”

“모두 강철로 무장한 정예병이다.”

“강철이라…… 허허…….”

“저번에 이야기했던 대로, 그대가 용병을 내어준다면 용병 숫자만큼 철제 무기를 제공하겠다.”

아딘의 말에 카르갈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카르갈이 물었다.

“침략해오는 쪽이 50만이면, 방어하는 그쪽은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연합군이 결성돼 봐야 알겠지만, 최대 30만까지 동원 가능하다.”

“20만이 모자란다라……”

“방어하는 입장에서 그 정도 차이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그대가 방어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의 힘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갈은 미소를 지으며 확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우리 쪽에서 10만을 보내겠습니다.”

그 말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아딘이었다.

“10만이라니?”

“뭐, 최소한의 방어 인원과 내가 남는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용병대는 내 둘째 아들이 이끌 겁니다. 야무진 게 딱 내 뒤를 이어 오크의 왕이 될 녀석이니 믿어 보십시오.”

“아니, 내 말은 그 말이 아니라 10만이나 되는 전사가 있단 말이오?”

그 말에 카르갈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우리 오크는 인간하고는 달라서, 열 살 정도만 되면 충분히 전쟁터에서 싸울 수가 있습니다. 최대한 동원 가능한 것들은 다 동원한다면 10만은 무리가 없습니다.”

아딘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무기도 개발된 판국에 오크 용병의 질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샤펠 제국군은 오크와 전장에서 마주하기만 해도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질 거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딘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카르갈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바쁘다는 이유로 구체적인 일정표를 짜자마자 떠나려는 아딘을 카르갈은 하루를 더 붙잡았다.

“어차피 전쟁은 그대들 인간의 시간으로 내년 3월 1일 아닙니까?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될 겁니다.”

그 말에 아딘은 결국 카르갈의 왕궁에서 하루를 묵은 후 9월 30일 새벽에 게마인샤프트로 떠났다.

아딘이 떠나자마자 카르갈은 둘째 아들을 불러 말했다.

“곧 너희는 북쪽으로 떠나야 한다. 10만 명 정도인데, 무기는 필요없고 적당히 중간중간 사냥이나 하게 사냥 도구나 챙겨서 이동해라.”

“10만이나 말입니까?”

“그래. 머릿수만큼 철제 무기를 준다고 하니까 최대한 많이 뽑아야지.”

그러면서 카르갈은 둘째 아들에게 한 가지 당부했다.

“혹여 전쟁터에 가거든 최대한 인간 포로를 잡아 와라. 지금 함께 있는 인간 기술자 하나를 붙여줄 테니까, 포로 중에서 철을 다룰 줄 아는 인간이 있으면 꼭 잡아 와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네, 알겠습니다.”

* * *

10월 1일.

운터트링겐에 마련된 임시 왕궁.

그곳에서 아딘과 로제는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오크가 10만을 동원해 준다고 해.”

“10만이나요?”

“머릿수대로 내가 철제 무기를 준다고 했거든. 그러니 최대한 짜내는 거겠지.”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오크에게 제공하는 건 철제 무기뿐이야. 그걸로 자기네끼리 정복 전쟁이나 할 순 있어도 엄청난 발전을 하긴 힘들 거야.”

“하긴, 도구가 있어도 기술이 없으면 지속 가능한 무언가는 힘들죠.”

“일단 화약하고, 마정석으로 팔키르가 만든 신무기에 오크 용병 10만까지 하면 얼추 붙어볼 만할 거야.”

“문제는 어디서 붙느냐겠죠.”

로제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지난 2년간 게마인샤프트의 여왕으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국정을 살폈던 만큼, 자기 땅에서 일어날 거대한 전쟁이 우려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딘은 탁자 위에 게마인샤프트와 주변부 지도를 펼쳤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뢰벡을 가리켰다.

“현실적으로 제국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온다면, 해상으로 오기는 힘들어. 제국과 게마인샤프트 중간에 자리한 공화국의 지리적 특성상 해로를 이용하면 엄청난 시간이 소모될 테니까. 황제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면 육로를 통해 게마인샤프트로 올 거야.”

“공화국이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짧으니까요.”

“그렇지. 육로를 이용하면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할 수 있어.”

“공화국이 문을 열어 줄까요?”

“열어 주겠지. 안 열어주면 아마 자기들이 먼저 짓밟힐 테니까.”

그랬기에 아딘은 제국군이 뢰벡으로 올 것이라 확신했다.

“뢰벡을 점령하면, 서부의 중심지가 적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 거야. 저들도 그걸 알고 있겠지. 뢰벡 하나를 먹음으로써 서부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게 될 테니, 어떻게든 여기를 무너뜨리려 할 거야.”

“그 말은 우리가 뢰벡에서 어떻게든 적들을 막아낸다면 거기서 전쟁은 끝이라는 이야기네요?”

“그렇지.”

로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딘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뢰벡 서쪽에 있는 여기, 린덴바움 평원. 여기가 주전장이 될 거야.”

로제의 시선이 뢰벡 서쪽, 공화국과의 국경에 자리한 린덴바움 평원으로 향했다.

엄청난 넓이의 평원은 능히 50만을 품기에 충분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적들을 물리쳐야 해. 저들이 뢰벡 성벽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여기서 압도적으로 밀어내야 해.”

“그래야 공화국이 엉뚱한 생각을 품지 못할 테니까요?”

“그렇지.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저들을 패퇴시켜야만 저들이 온 길을 그대로 따라서 제국의 심장으로 갈 수 있거든.”

“제국의 심장으로요?”

로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씩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항복 문서를 받아내려면 적들의 심장에서 받아내야지 않겠어?”

그 말에 로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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