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66화 (166/175)

166 게마인샤프트의 여왕 (4)

“예상대로야.”

트링겐 상공에서, 로제의 마법으로 그녀와 함께 모습을 감춘 채 라인하르트의 장막을 바라보던 아딘이 말했다.

기병끼리 서로 창질을 해대는 주둔지의 상황을 바라보며 로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번에 라인하르트를 찾아갔을 때, 사실 그때 난 그를 죽일 수 있었어.”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를 여왕으로 만드셔야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것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지.”

“다른 이유요?”

“그때 라인하르트를 죽였다면, 3명의 대장군이 집단지도체제를 꾸려 어떻게든 버텼을 거야. 그랬다면, 피를 더 많이 흘렸어야 했겠지. 어쩌면, 고작 저들을 무너뜨리려고 오크 용병을 구해 왔어야 했을 수도 있고 말이야.”

아딘의 말을 이해하고서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멀쩡한 게 하나뿐이니까, 그 하나가 엉뚱한 마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다는 거네요?”

“더욱이 대왕이라는 작자가, 자기 군대의 2할가량이 완전히 소멸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군을 한데 모아뒀으니까. 아예 부하더러 반란을 일으키라 부추긴 꼴이지.”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딘은 허리춤에서 불멸의 검을 뽑았다.

“곧 우리가 내려가야 할 거야. 준비해 둬.”

“네, 오라버니.”

그러나 아딘이 이야기한 ‘곧’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곧’을 의미하진 않았다.

유목민 기병들의 상잔은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노예들까지 반란을 일으켜 양측 기병을 상대로 마구잡이로 공격을 함에 따라 상황은 더 복잡하게 꼬였다.

그리고 막 동이 터오를 무렵, 그제야 아딘은 로제와 함께 주둔지에 강림했다.

* * *

“크흑……”

이미 3시간 전, 라인하르트의 말은 슈타이너의 창에 목이 관통당해 죽었다.

라인하르트는 가까스로 땅으로 내려와 낙상은 면했지만, 그때부터 그는 3시간 동안 두 발로 선 채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기병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등진 채 라인하르트는 슈타이너와 대면하고 있었다.

“슈타이너!”

라인하르트의 으르렁거림에, 마찬가지로 말을 잃고 지상에서 두 발로 선 채 전투를 이어온 슈타이너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내가 말했는데도 안 들으시니, 내가 직접 형님 자리를 차지해서 다 흩으려 했지요.”

“이 배신자 새끼!”

“형님을 배신한 대신 우리 전사들 전체를 살리려 했을 뿐이요!”

“입 닥쳐!”

라인하르트는 칼끝으로 슈타이너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에게는 슈타이너에게 다가가 칼을 휘두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슈타이너도 마찬가지였다.

“야무지게도 싸우셨군.”

그 순간,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귀를 때리는 아딘의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라인하르트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곳에서 아딘은 황금빛 찬란한 불칸의 갑옷을 입고, 불멸의 검을 한 손으로 쥔 채 내려왔다.

“덕분에 로제의 수고를 좀 덜게 됐어.”

그리고 아딘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퍼어엉-!]

동시다발적으로 허공에서 불덩이들이 쏟아져 내려와 여전히 싸우고 있는 기병들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적의 내분을 이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전술은 없지.”

하늘에서 내리는 불덩어리들과, 그것에 직격당해 불타 죽는 유목민 기병들 그리고 자신과 슈타이너 사이에 선 아딘.

그 모든 것들을 본 순간, 라인하르트는 이성의 끊을 놓았다.

“이 쥐새끼가!”

라인하르트는 있는 힘껏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그리곤 그대로 아딘의 머리를 칼로 내리쳤다.

[서걱-!]

라인하르트의 칼이 아딘의 투구를 치려는 순간, 불멸의 검이 슬그머니 경로에 끼어들었다.

불멸의 검과 부딪친 라인하르트의 칼은 그대로 두동강이 났다.

[뻐억-!]

그리고 칼이 두동강이 남과 동시에, 라인하르트의 복부를 아딘의 주먹이 빠르게 때렸다.

“크헉-!”

라인하르트는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라인하르트를 제압한 아딘은 그대로 슈타이너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슈타이너는 오지 말라 고함치려 했다.

그러나 그의 혓바닥 구르는 속도보다 아딘의 검이 그의 목을 베는 속도가 더 빨랐다.

슈타이너의 목은 곧 땅으로 떨어졌고, 아딘은 그것을 한손으로 쥔 채 천천히 라인하르트에게 다가갔다.

“크으윽…… 날 죽여라, 이 쥐새끼 같은 놈아!”

라인하르트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딘은 말했다.

“내 호기심이 널 결국 괴물로 만들었다.”

“죽여…….”

“너와는 그때 트링겐에서 헤어졌어야 했어.”

“죽여!”

“후손을 조상보다 먼저 저승으로 보내는 게 그리 달가운 선택은 아니지만, 혹여 불멸자와 다시 만날 날이 온다면, 최대한 이해해 달라 말해야겠지.”

“죽여, 이 쥐새끼야!”

악을 쓰는 라인하르트의 목으로 불멸의 검이 날아갔다.

그리고 아딘이 라인하르트의 목을 베는 순간, 불덩어리들의 추락도 멈췄다.

* * *

성녀 로제 콘스탄틴은 광명력 995년 3월 25일 게마인샤프트 서부의 대도시 뢰벡을 시작으로 같은 해 5월 9일 트링겐 서쪽 평원에 모인 유목민 군대 전체를 쓸어버리며 마침내 게마인샤프트를 잔학한 유목민 왕조로부터 해방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성녀에 대한 신앙이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성녀가 해안 도시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결사대와 함께 내륙 도시마저 해방해감에 따라 그녀에 대한 신앙은 마침내 같은 해 7월 10일 게마인샤프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도 더는 흩어져 있으면 안 돼. 흩어지니까 유목민 놈들한테 먹혔던 거잖아.”

“맞는 말이야. 우리도 벨로디나나 제니스처럼 단일한 국가를 만들어야 해.”

유목민 왕조로부터 해방된 게마인샤프트에는 통일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우호적 여론이 널리 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겨우 50만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 유목민에게 자기들이 당한 이유가 바로 독립 도시 국가 체제였으니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누구를 중심으로 뭉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발생했다.

“누구긴 누구야? 성녀님밖에 더 있나?”

“맞아! 성녀님을 중심으로 뭉쳐야해!”

대체로 분위기는 로제를 중심으로 한 통일 국가 수립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것을 로제와 아딘은 트링겐에 거주하며 알프레드와 그의 인맥 그리고 로제의 정보원 등을 이용해 더 부추겼다.

마침내 9월 1일, 각 도시의 대표자들이 트링겐으로 몰려와 로제에게 왕이 돼 줄 것을 청했다.

“이대로 우리가 다시 분열된 독립 영주 국가로 남는다면, 또 다시 잔학한 것들의 노예가 될 뿐입니다. 부디 우리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성녀님.”

대표들의 부탁을 받은 로제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올 때쯤, 그녀는 눈을 뜨고 일어나 대표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천상의 뜻과 백성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로제는 아딘이 뜻했던 대로 게마인샤프트의 왕이 됐다.

광명력 995년 10월 10일.

트링겐에서 로제는, 각 도시의 대표들과 광명교 사제 그리고 아딘이 보는 가운데 통일 게마인샤프트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는 의식을 치렀다.

그녀가 곧 성녀였고, 그녀보다 더 거룩한 존재는 없었던 만큼, 그녀는 스스로 관을 썼다.

그리고 그녀가 관을 썼을 때, 하늘에선 한 줄기 번개가 내리쳐 제물로 바친 양을 불태웠다.

“천상의 정의가 이 땅에 가득할 때까지, 우리의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이 곧 그녀의 즉위 일성이었다.

“당분간 왕궁도, 수도도 없을 겁니다. 대신 제가 천상의 뜻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찾아다니며 재건을 지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첫 칙령이었다.

* * *

시간은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겐 굉장히 빠르지만, 또 누군가에겐 굉장히 느리다.

아딘과 로제에게 2년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빨리 지나갔다.

왕으로 즉위하고, 국가를 재건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사이 두 사람은 2년씩 늙었다.

그리고 그 사이 벨로디나와 게마인샤프트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먼저 벨로디나는 혁명이 안정적으로 정착돼 마을평의회로부터 국가평의회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준의 의회 정치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물론 여러 면에서 여전히 미숙하긴 했지만, 처음 아딘이 꿈꾸었던 수준 정도는 충분히 충족시킬 정도는 됐다.

경제 또한 상당히 안정이 됐다.

무엇보다도 파라곤 상인들의 자본이 압류 상태에서 조건부로 해제된 덕분에 시장에 엄청난 자금 유동성이 생겼다.

그것이 일시적인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긴 했지만, 국가적으로 상업과 개발을 장려했던 만큼 결과적으로는 경제 성장으로 이어졌다.

외교적으로는 게마인샤프트 왕국과 동맹을 맺은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막후에서 빅토르 다비도프가 공작한 덕분에 화산 열도의 유력한 영주 가문인 오곤 가문의 해적 함대가 제니스 공화국의 연안을 습격했고, 덕분에 제니스 공화국은 벨로디나는 물론 게마인샤프트에까지 그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게마인샤프트의 경우, 로제가 2년간 왕궁도 없이 왕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재건을 지도했다.

어차피 실무는 실무진이 담당했고, 로제는 그저 큰 틀에서 그림을 그려주고 또 사람들에게 어떠한 종교적 상징이 되는 행위만 했을 뿐이었지만, 적어도 시민들에게는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을 챙기는 선한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아딘과 로제의 2년은 빠르게 지나갔다.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가서, 미처 두 사람은 미리 약속했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둘 모두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서두르진 않았다.

반면, 지난 2년이 굉장히 느리게 간 사람도 있었다.

바로 샤펠 제국 황제 샤를 11세였다.

“드디어 때가 됐어.”

광명력 997년 9월 20일 저녁.

아퐁의 황궁에서 가만히 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샤를 11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씩 웃었다.

‘드디어 엘드랄에 대한 복수와 신물의 접수를 이룩할 때가 됐어.’

별을 바라보는 샤를 11세의 눈이 순간 요사스럽게 빛났다.

“폐하.”

그런 그를, 한 여인이 불렀다.

샤를 11세는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돌아 자신을 부른 여인을 바라봤다.

“그대도 준비가 됐는가? 메로네바 왕후.”

샤를 11세의 물음에 여인, 유리 콘스탄틴의 아내 메로네바 왕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니콜라이 모두 준비가 됐습니다, 폐하.”

메로네바 왕후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한 아이를 앞세웠다.

여전히 어린 아이였지만, 나름 혼자 걸을 수 있게 된 그녀의 아들을 바라보며 샤를 11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벨로디나는 정통성 있는 자를 왕으로 맞이할 것이다.”

샤를 11세는 가만히 메로네바 왕후의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때쯤이면 우리 황실의 여인과 결혼하여, 양국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할 수도 있겠지.”

그 말에 메로네바 왕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