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65화 (165/175)

165 게마인샤프트의 여왕 (3)

광명력 995년 5월 5일.

마침내 로제는 연안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까지 이어져 있는 게마인샤프트의 도시들을 모두 해방했다.

실상 남부의 적기부대를 모조리 쓸어버린 시점에서, 동부를 전담하던 슈타이너의 청기부대가 라인하르트가 거주하는 장막으로 모두 이동했던 만큼, 동부 도시를 해방하는 것은 너무나도 손쉬웠다.

“성녀님이시다! 저기 성녀님이시다!”

“성녀님 만세! 만세!”

로제가 심어둔 정보원과 알프레드의 인맥 그리고 분주하게 게마인샤프트를 동서로 오가는 보따리 장수들에 의해 이미 로제의 명성은 동부에까지 다 퍼진 상태였다.

그랬기에 그녀가 트렝겐으로부터 남쪽으로 100k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 조그만 도시 운터트링겐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시민들은 유목민 왕조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호의호식하던 이들의 시체를 성문에 내건 채 로제를 환영했다.

“그대들에게 천상으로부터의 축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자신을 환영하는 군중에게 축복 기도해주면서 그렇게 로제는 운터트링겐으로 입성했다.

운터트링겐의 시민들은 그녀를 위해 꽃을 꺾어 와 바닥에 깔아 주며 그녀를 해방자 내지는 구원자로까지 격상해 부르며 찬양했다.

‘오라버니가 그랬지.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먹히는 권위는 종교적 권위라고.’

오래전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를 통해 계시한 이후 특별히 인간 세상에 직접 개입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들을 향한 인간의 마음은 변함없이 유지됐다.

심지어 타락한 사제들이 신들의 이름을 팔아 온갖 미신적인 상행위를 하더라도 시민들은 말없이 거기에 순응했다.

그것이 종교적 권위였다.

그리고 로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활용해 그것을 흉내냈다.

‘뭐, 최소한 아픈 사람 고쳐주고, 억압받은 사람을 풀어준 다음에 사기를 치는 거니까.’

자신의 행위가 분명한 사기임에도, 그리고 아딘에 따르면 분명히 존재하는 천상의 신들이 볼 때 상당히 불경한 행위임에도, 로제는 크게 거리낌을 느끼진 않았다.

애초에 그녀에게 종교적 권위를 통해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가르쳐준 이가 아딘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유목민들이 군대를 뺐다는 건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닌데 말이지.’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까지 흘리는 운터트링겐의 시민들을 뒤로하고, 로제는 임시로 그녀의 거처로 쓰일 운터트링겐 주임 사제 사원으로 들어섰다.

‘하아…… 이럴 때 오라버니가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사원 예배당에 들어선 그녀는 맨 앞 좌석에 앉았다.

그리곤 아딘으로부터 잠시 빌린 마법 주머니에서 수정 구슬 하나를 끄집어냈다.

오로지 아딘과 자신의 연결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수정 구슬을 빤히 바라보던 로제는 이내 거기에 힘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슬이 반응하자, 로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그러나 수정 구슬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일방적으로 로제 쪽에서 연락을 넣고 있다는, 연한 붉은빛만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휴우……”

로제는 한숨을 내쉬며 수정 구슬에 주입한 힘을 흩었다.

그리곤 빛을 잃은 구슬을 도로 마법 주머니에 넣은 후 가만히 예배당 전면에 그려진 성화를 바라봤다.

천상의 신들이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에게 계시를 내려주는 장면이, 경전의 순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배치된 성화를 가만히 바라보던 로제는 이내 자기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일어나라.”

“우으응……”

“일어나라, 용과 인간의 딸이여.”

그리고 그녀는 별안간 자신을 부르는 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

잠에서 깬 그녀가 본 것은, 예배당의 내부 전경이 아니었다.

“구름?”

그녀의 눈에는 온통 구름만 들어왔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구름을 밟고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꿈?’

그녀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꿈이라고 인지할 때, 또다시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나를 보라.”

그 목소리를 따라 그녀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거대한 사자 한 마리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반갑다, 소녀여. 나는 네르갈이다.”

네르갈의 인사에 로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화를 보다가 자서 그런가? 왜 이런 꿈을 꾸지?”

그녀의 혼잣말에 네르갈의 콧수염이 꿈틀거렸다.

“소녀여. 집중하라. 그대는 지금 네르갈과 만나고 있다.”

“그렇겠죠. 내 꿈이 만들어낸 네르갈님.”

“뭐라?”

“아버지가 그랬거든요. 인간이 꾸는 꿈은 보통 기억의 무덤에 묻혀 있던 정보가 깨어나 의식을 왜곡하는 거라고요.”

“보통은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순간, 로제는 심장이 굉장히 빠르게 박동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게 됐다.

“어, 어떻게…….”

당황하는 그녀에게 네르갈은 말했다.

“너와 네 오라비가 최근 우리의 권위를 훔쳐 자기들의 권력을 강화한 것을 두고서, 천상의 신들 사이에서 논의가 있었다.”

로제는 자연스럽게 구름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로제에게 네르갈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무엄하게 피조물 주제에 우리의 권위를 훔친 것을 두고서 벌을 내려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신들의 뜻은 일단 두고보자는 쪽으로 정해졌다.”

그러면서 네르갈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말을 마무리했다.

“너희가, 특히 너희 오라비가 나와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한다면, 너희의 죄는 불문에 부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그 즉시 우리로부터 심판받을 것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로제는 그대로 구름 아래로 떨어졌다.

“아아아아아-!”

마법적 능력도 끌어다 쓸 수 없는 상황에서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지며 로제는 하염없이 비명을 질렀다.

“로제? 로제?”

“허억-!”

로제는 가만히 눈을 껌뻑였다.

어느덧 살짝 열린 창틈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예배당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평상복 차림의 아딘이 앉아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로제는 반가움은 뒤로하고, 아딘에게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일러주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아딘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신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니 다행이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로제는 가만히 아딘의 품에 기댄 채 그에게 물었다.

“왜 연락을 안 받으셨어요?”

“바빴어. 다비도프는 화산 열도에서 매일같이 수정 구슬로 연락을 걸었고, 또 이래저래 일들이 많아서 말이야.”

“화산 열도요?”

“응. 그쪽에 뭐 작업할 게 있어서, 다비도프를 보내 뒀지.”

로제는 미소를 지었다.

“근데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 물음에 아딘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라인하르트와의 일을 마무리해야지.”

그 말에 로제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아딘이 성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호기심이 만든 괴물이니, 내가 처리해야지.”

* * *

5월 7일 정오.

로제는 트링겐에 입성했다.

미리 맞춘 각본대로, 하루 먼저 트링겐에 입성해 백성들의 영접을 받았던 아딘이 루돌프 3세와 함께 로제를 맞이함으로써 그녀의 권위는 한층 더 높아졌다.

그리고 5월 8일 오전.

콘스탄티노프 공작령의 정탐병이 유목민 왕조의 대규모 침공을 알리는 소식을 전해왔다.

* * *

“아딘…… 아딘 콘스탄틴!”

5월 8일 정오.

트링겐 서문으로부터 서쪽으로 10km 떨어진 드넓은 평원에 라인하르트와 그 부하들의 임시 주둔지.

그곳에서 라인하르트는 트링겐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대왕님. 정말 총공세를 펼치실 생각입니까?”

그런 그를 향해 슈타이너가 곁에서 물었다.

라인하르트의 시선이 슈타이너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에서 일어나는 불빛에 슈타이너는 흠칫 놀라면서도 시선을 내리깔지 않고 도리어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지금 여기에 기병만 40만입니다. 요제프랑 아돌프의 부대가 다 날아갔다곤 하지만, 40만 정도만 충분히 잘 유지하면 언제든 복수를 노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뭔데?”

“이렇게 무리해서 트링겐을 칠 필요가 있느냔 말입니다. 대왕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노예뿐 아니라 기병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어이, 슈타이너. 내 이야기 잘 들어.”

라인하르트는 트링겐 서문에서 펄럭이는, 콘스탄틴 왕실을 상징하는 황금 사자가 수 놓인 깃발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아딘 콘스탄틴은 우리를 천천히 말려 죽이려고 하고 있어. 우리가 흩어져 있다는 걸 알고는, 각개격파를 해가면서 말이야. 그리고 지금, 그놈이 직접 저기에 와 있지.”

“…….”

“단판 승부야. 한 방에 우리가 힘으로 저것들을 밀어 버려야 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말에 슈타이너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독버섯처럼 다른 생각이 자라고 있었다.

“반드시 널 이기고, 비로소 진정환 대왕이 되주마. 아딘 콘스탄틴.”

그렇게 라인하르트는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그의 다짐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 *

“우와아아아-!”

엄청난 함성.

“다 죽여!”

“배신자들!”

“미치광이 대왕을 따르는 것들은 다 찢어버려!”

증오에 가득찬 악다구니.

[챙-! 챙-!]

[깡-! 깡-!]

그리고 병장기가 충돌하며 내는 소리까지.

그 모든 소음에 라인하르트는 잠에서 깼다.

“뭐, 뭐야?”

라인하르트는 급하게 장막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자기들끼리 상잔하고 있는 유목민 기병들이었다.

“이, 이 자식들이! 지금 뭐하는 거야!”

라인하르트가 고함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기병들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왕님!”

그런 라인하르트를 발견한 그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그를 이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라인하르트가 부하에게 물었다.

“바, 반란입니다. 슈타이너…… 슈타이너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뭐? 반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파악하진 못했는데, 눈대중으로만 봐도 거의 반절 정도가 슈타이너에 합류한 모양입니다.”

“슈타이너…… 이 무식한 놈이…… 감히!”

라인하르트는 그대로 자신의 갑옷을 찾아 입고, 창과 칼 그리고 활과 화살통을 챙긴 뒤 말에 올라탔다.

“대왕님! 일단 몸을 피하시는게…….”

도주를 권하는 부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눈에 불을 켜고서 그를 바라보며 고함쳤다.

“도망가긴 어딜 도망가! 이 장막은! 이 주둔지는 내 주둔지야! 내가 내 집을 버리고 어디로 가!”

그러면서 그는 말의 옆구리를 힘차게 걷어차며 장막 밖으로 나갔다.

“대왕님! 대왕님이시다!”

“저기 미친광이 대왕이다! 잡아!”

“대왕님을 엄호해!”

“미치광이 대왕을 잡아!”

장막을 나서자 라인하르트는 자신을 향한 상반된 두 반응과 조우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거기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반응했다.

“배신자 새끼들은 다 죽여!”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