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게마인샤프트의 여왕 (2)
‘많이 무리했네.’
불멸의 신전에서 아버지와 만나고, 아버지로부터 용의 힘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배웠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로제는 인간이었다.
그랬기에 이틀 연속 대규모 마법을 펼친 것은 그녀의 심장에 상당한 무리를 가져왔다.
‘하지만 일단 여기를 해방했으니까, 앞으로는 좀 더 수월해지겠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며 로제는 민병대와, 그들이 포로로 삼은 유목민들과 함께 뢰벡으로 되돌아갔다.
* * *
광명력 995년 3월 29일 저녁부터 4월 1일 저녁까지.
뢰벡에서는 승리와 해방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다.
그간 부자들이 숨겨두었던 술이 바깥으로 꺼내졌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며 자유를 만끽했다.
물론 그들이 단순히 음주가무를 즐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모든 건 성녀님 덕분이지!”
“그래! 성녀님이 저 야만인들을 다 쓸어주셨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쓸모없는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제대로 방어도 못 했던 거랑 너무 비교되네?”
술과 춤 속에서 사람들은 로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절대다수의 뢰벡 시민들은 로제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심경을 품었다.
급기야 축제 기간 도중 실력 있는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즉석으로 로제의 석상까지 만들어 광장에 배치하기도 했다.
급조되긴 했지만, 그런대로 제법 형태를 갖춘 석상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술에 취한 채, 혹은 정신이 멀쩡한 채로 로제를 찬양하는 즉석 찬양곡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로제는 축제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질 않았다.
그저 슈타인하르츠 여관 특실에서 알프레드를 제외한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가만히 마정석을 품고서 힘을 회복하는 데 전념할 뿐이었다.
심장에 상당한 무리를 가하면서까지 대규모 마법을 펼친 만큼, 그녀의 요양은 제법 길어졌다.
그러는 사이, 축제는 끝났고, 뢰벡은 재건과 복수라는 두 가지 일을 두고서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지도자는 성녀님뿐이야. 성녀님 말고는 그 누구도 뢰벡을 이끄실 수가 없어!”
“맞아! 이제 와서 브라운실트 가문을 찾아낼 거야? 뭘 어쩔 거야?”
“성녀님을 최고 지도자로 하자고! 왕으로 삼든! 뭘로 삼든!”
대체로 로제를 지도자로 삼으려는 의견은 시민들 사이에서 일치를 보였다.
문제는 재건에 관해서 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부터 다시 일어서야 해! 당장 우리가 힘든데 다른 도시를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어?”
한쪽에서는 일단 뢰벡부터 재건하고 보자는 의견을 펼쳤다.
“다른 도시를 내버려둔 채 우리만 재건한다고 다 끝나? 이왕 일이 시작된 거, 성녀님과 함께 다른 도시들까지 다 해방해야지!”
다른 한쪽에서는 이 기세를 몰아 다른 도시들까지 유목민 왕조로부터 해방하자는 의견을 펼쳤다.
“지금 다른 도시까지 챙길 여유가 없잖아!”
“그렇다고 다른 도시를 야만인들 밑에 계속 내버려두면, 야만인들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저놈들이 엄청나게 준비해서 몰려오면 뢰벡 혼자서 어떻게 막아!”
분열은 재건에 관한 논의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다 죽여야지! 저 자식들이 우리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내가 직접 한 놈씩 다 때려 죽이고 다 씹어 먹고 싶다고!”
“그렇게 하면 우리가 저 야만인과 다를 게 뭐가 있어? 차라리 우리 노비로 삼든가 하는 게 낫지!”
포로가 된 1만 2천의 유목민에 대해, 강경한 어조로 사형을 주장하는 측과 무조건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측으로 나뉘었다.
“차라리 저것들을 노역에 동원하는 건 어떨까? 재건에 노동력이 필요한데, 1만 2천 정도면 뭐 빠르게 되지 않겠어?”
그들에 대한 처분 문제는 재건에 필요한 노동력 문제와도 맞물리며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그래서 저는 성녀님이 나서셔서 정리를 좀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4월 5일 저녁.
이제는 거의 몸 상태가 정상에 가까워진 로제에게 알프레드는 직접 나설 것을 요청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분열이 계속되면 좋을 게 없습니다.”
알프레드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정석을 주머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가만히 창문을 통해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정오까지 광장에 사람들을 모아. 최대한 꽉 차도록.”
그 말에 알프레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진 로제의 말에 그의 미소는 다시 사라졌다.
“사람들 중 절반 정도는 유목민 포로들로 구성하고.”
알프레드는 굳은 표정으로 로제의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걔들한테도 신성하고 거룩한 무언가를 보여줘야지. 그래야 수긍하고 너희들 밑으로 들어갈 거 아니야?”
그 말에 알프레드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곧장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알프레드는 로제에게 인사한 후 방을 나가려 했다.
그리고 그가 방문을 열고 발을 방과 복도 사이에 걸쳐두고 있을 때, 로제가 물었다.
“근데 당신은 어떤 의견이야?”
그 물음에 알프레드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입을 다물고 있던 알프레드는,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시민의 총의에 따를 겁니다.”
그 말에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4월 6일 정오.
광장에 시민 3천과 유목민 포로 3천이 모였다.
광장 주변 건물 옥상에까지 빼곡하게 들어선 시민들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을 때, 하늘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로제가 내려왔다.
“오오-!”
“성녀님이시여……”
로제의 등장에 시민들은 그녀를 우러르며 탄성을 내지르거나,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크윽…….”
그리고 유목민들은 그녀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며 바들바들 떨었다.
자신을 향한 숭배와 공포의 시선 속에서 땅에 내려온 로제는 주위를 한 차례 슥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지난 밤. 천상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제게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먼저 신들께서는 저에게 잔악한 유목민 정권의 노예가 된 다른 도시의 시민들을 해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과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런 군중을 향해 로제는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 도시를 재건하는 데 힘쓰십시오. 저는 오직 저와 뜻을 함께할 50명만 있다면, 신들께서 내리신 과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탄식하던 이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50명 정도면, 큰 규모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로제의 말이 계속됐다.
“그리고 또한 신들께서는 포로가 된 유목민들에게도 기회를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유목민 포로들에게선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의 무조건적인 사형에는 반대하던 이들에게선 안도가, 그들 모두를 죽이길 원하던 이들 사이에선 안타까움과 불만이 각각 서로 다른 모습으로 터져 나왔다.
“그대 유목민들은 들으십시오.”
로제가 유목민들을 콕 집어서 말했다.
“그대들의 죄는 천상의 신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신들께서는 자비롭게도 그대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허락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과거의 죄를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뢰벡 시민을 위해 봉사하십시오.”
그 말에 유목민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죽을 운명에서, 살아난 만큼, 더구나 신들이 자기들에게 기회를 줬다는 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로제가 이번에는 뢰벡 시민들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뢰벡 시민 여러분께서는 과거의 악연을 묻어 두십시오. 신들께서 용서하셨으니, 여러분들께서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저들을 노예가 아닌, 동료 시민으로 삼아 함께 재건에 힘쓰십시오.”
그 말에 시민들이 모두 동의하진 않았다.
하지만 천상의 권위를 내세우는 로제의 말에 대놓고 반대하는 이들 또한 없었다.
그렇게 로제는 대강에 시민 사이의 분쟁을 정리한 후 그 자리에서 임시로 그들을 지도할 행정관을 선발했다.
모두 알프레드를 따르던 부하들이었다.
“알프레드 폰 슈타인하르츠랑 같이 다니던 놈들이면 뭐 믿을 만하겠지.”
“어쨌건 쟤들이 저항 활동을 하긴 했으니까.”
알프레드의 저항 활동을 알고 있던 시민들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모든 정리가 끝난 후, 이틀이 지난 4월 8일 오전.
로제는 알프레드가 소개해준, 그리고 자진해서 그녀를 따르겠다고 나선 이들 50을 이끌고 뢰벡을 떠났다.
“이걸로 나와 실시간으로 소통이 가능해. 매일 정오에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또 그때 따로 연락하고.”
떠나기 전, 로제는 수정 구슬을 알프레드에게 하나 건넸다.
그렇게 뢰벡에 연락처를 남겨놓은 로제는 곧장 남하를 시작했다.
뢰벡에 남은 알프레드는 로제가 임시 행정관으로 임명한 부하들과 함께 재건에 힘썼다.
우선 유목민들을 100개의 조로 편성해 뢰벡 전역에 뿔뿔이 흩어 놓아 혹시 모를 반란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그는 유목민과 뢰벡 시민이 어우러져 도시를 재건하도록 만들었다.
우려와는 달리 유목민과 시민들은 제법 잘 어우러졌다.
그렇게 뢰벡의 재건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리고 로제가 50명의 결사대와 함께 뢰벡을 떠난 지 열흘이 지난 4월 18일 정오에 알프레드는 로제로부터 뢰벡 남쪽의 세 도시를 해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 * *
광명력 995년 4월 30일 저녁.
게마인샤프트 중부에 자리한 라인하르트의 주둔지.
무려 10만을 수용하는 거대한 주둔지의 중심에 있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라인하르트의 장막에서, 라인하르트는 이를 바드득 갈고 있었다.
“이 뱀 같은 새끼들!”
라인하르트의 분노는 아딘과 로제를 향하고 있었다.
“평화를 이야기해 놓고, 정상적인 국교를 말해 놓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로제가 최대한 통제한다곤 했지만,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었다.
로제가 남부의 도시들까지 모두 해방하고, 라인데른의 폐허 위에서 적기 대장군 아돌프를 죽였을 때, 가까스로 적기부대의 기병 스물이 탈출에 성공했다.
그들은 곧장 라인하르트에게 와 모든 걸 보고했고, 마침내 라인하르트는 1개월이 돼서야 흑기부대와 적기부대가 모조리 전멸했음을, 게마인샤프트의 서부와 남부가 자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음을 인지하게 됐다.
“이런 식으로 날 물 먹인다 이거지? 어?!”
라인하르트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희가 아무리 강해도…… 아무리 강해도! 내 위대한 군대를 모두 이길 순 없어!”
분노에 찬 고함을 한참이나 내지르던 라인하르트는, 이내 분을 삭이곤 부하를 불렀다.
“부, 부르셨습니까, 대왕님.”
공포에 떠는 부하를 향해 라인하르트는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서 말했다.
“슈타이너. 슈타이너한테 모든 군대를 이끌고 나에게 오라 그래!”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