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해방자에서 군주로 (1)
찬란한 빛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온 로제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짚단에 붙은 불이 더 커지더니 순식간에 짚단을 재로 만들었다.
짚단이 재가 됨과 동시에 불은 꺼졌고, 곧 돌풍이 불어치며 재를 모두 허공에다 흩어 놓았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짚단 아래에서 다리 힘줄이 끊긴 채 불타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이, 이게 무슨……”
그들을 보자마자 란돌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단 한 사람도 불타기는커녕 그을리지조차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백성에게 천상의 빛이 있으라.”
그러는 와중에 로제는 바닥에 누운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했다.
그녀의 축복이 끝나자 곧장 사람들은 찬란한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멀쩡하게 일어났다.
“서, 성녀님이 다시 오셨다! 성녀님이 다시 오셨어!”
“우와아아-!”
“성녀님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앞에서 동료 시민이 불에 타는 것을 보며, 자기들도 곧 그렇게 될 것이란 예상에 벌벌 떨던 시민들이 로제를 바라보며 환호했다.
“다들 뭐 하고 있어! 저년을 잡아!”
그 모습을 보며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간파한 란돌프가 멍하니 로제를 바라보는 부하들에게 명했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부하들 가운데 50명이 무기를 바로잡고 천천히 그녀에게 말을 몰아 접근했다.
그 순간.
[화르륵-!]
로제를 향해 접근하던 기병 50명의 몸에서 일제히 불길이 치솟았다.
“으, 으아아악-!”
“끄아아아-!”
그들의 허리에서부터 시작된 발화는 순식간에 상반신을 뒤덮었다.
[히히히힝-!]
말들은 화들짝 놀라 그들을 떨어뜨렸고, 바닥으로 떨어진 불타는 기병들은 괴로움을 호소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으아아아-!”
그 가운데 일부가 발악을 하던 도중 시민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터엉-!]
그러나 시민과 기병 사이에 마치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생겨 불타는 기병이 시민과 접촉하는 것을 막았다.
결국, 기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죽었다.
“마, 마법사?”
“마법사가 뭐 저래?”
기병들 사이에 순식간에 동요가 퍼져 나갔다.
“이, 이 자식들이!”
부하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란돌프는 이를 갈았다.
그 순간, 로제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란돌프는 화들짝 놀랐지만, 동시에 활에 화살을 먹인 채 시위를 당기며 로제에 대한 공격 대비를 끝냈다.
그 상태로 란돌프는 물었다.
“넌 누구냐?”
그 물음에 로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란돌프를 가리켰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 검지가 란돌프의 머리를 가리키자마자, 그의 머리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불길은 순식간에 란돌프의 머리 전체와 목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살가죽과 머리카락, 성대가 불타 버렸다.
[피잉-!]
그로 인해 란돌프는 활시위를 놓쳤고, 화살은 그대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가 힘없이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성대가 녹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란돌프는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러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그대로 죽었다.
“부, 부대장님!”
순식간에 최고 지휘관이 죽어버리자 기병들의 사기는 그대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기병들이 모두 도망칠 기미를 보이자 로제는 곧장 양팔을 활짝 치켜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지름이 그녀의 키 정도 되는 커다란 불덩어리가 나타났다.
[파파파팡-!]
그리고 그 불덩이에서 그녀의 머리만 한 조그만 불덩어리들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으, 으아악-!”
불덩어리들은 정확히 기병들만을 타깃으로 잡고 날아가, 그들의 몸과 부딪히며 폭발했다.
불덩어리의 폭발과 함께 기병들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며 녹아내렸다.
“아아…….”
그리고, 로제가 만든 막 너머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시민들은 모두 넋을 놓은 채 그녀가 이룩하는 기적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로제의 머리 위에 나타났던 커다란 불덩이가 사라졌다.
커다란 불덩이에서 튀어나와 기병들을 죽이고자 허공을 배회하던 조그만 불덩어리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란돌프를 따라왔던 기병들 대부분이 죽은 가운데, 그들이 타고 온 말들과 더불어 딱 한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로제는 천천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흐으으윽…….”
모두가 죽는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기병은 말 목에 얼굴을 처박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가서 너희 대장에게 전해. 뢰벡은 성녀가 해방했다고.”
로제의 말에 기병은 그녀를 제대로 쳐다 보지도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어서 가. 너까지 죽이기 전에.”
그 말에 기병은 필사적으로 말고삐를 쥔 채 말의 양 옆구리를 발로 찼다.
[히히히힝-!]
말은 그대로 기병의 인도를 받아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러고나서 한동안 정적이 광장에 맴돌았다.
로제는 숨을 고르며 시민들을 바라봤다.
그 순간, 알프레드가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부하들은 시민들 틈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성녀님 만세!”
“성녀님 만세!”
그리고 미리 시민들 사이에 숨어 있던 다른 부하들과 더불어 그들은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성녀님 만세!”
“마, 만세!”
만세는 곧 시민들에게로 빠르게 전파돼, 마침내 모든 시민이 로제를 바라보며 만세를 외치게 됐다.
“우리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곧 여기저기서 자발적인 감사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특히 불타 죽을 뻔했던 이들은 아예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며 로제를 떠받들었다.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로제는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적당히 모든 시민이 자신을 볼 정도의 고도에서 멈춘 그녀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지상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뢰벡 시민 여러분.”
그녀의 목소리는 우렁차거나 하진 않았지만, 마법적 능력에 힘입어 모든 이들의 귀에 똑똑히 들어갔다.
“몇 년 전, 저는 이곳에서, 천상의 신들께서 제게 주신 능력으로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족, 친지를 치유했습니다.”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일 많았던 만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일을 하고자 잠적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며칠 전, 천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뢰벡을 구하라, 가서 우리의 불쌍한 피조물을 구원하라고 하는 목소리 말입니다.”
그 순간, 로제의 몸에서 환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마치 날개와도 같은 형상을 띄며 얇은 천처럼 바람에 하늘거렸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성녀의 모습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거룩하고 신비로워 보였다.
“아아…… 성녀시여…….”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던 시민들은 그 모습에 모두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신앙심이 깊지는 않지만, 그래도 알프레드 또한 신들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 로제가 하는, 천상의 목소리니 뭐니 하는 것이 내심 불편하고 불안했다.
‘하기사 유목민도 심판하지 않은 분들이, 고작 저런 거 가지고 딴지를 걸지는 않으실 것 같긴 하다만…….’
그렇게 알프레드가 내심 불안해하는 사이, 로제의 퍼포먼스는 계속됐다.
“여러분, 일어서십시오. 가서 두려워하는 이웃에게 전하십시오. 천상의 목소리가 왔다고, 그대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신들의 계획이 천상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고, 일어나 무장하여 다가올 유목민의 침략에 맞서 싸우자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시민들이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일어나자!”
“성녀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맞서 싸우자!”
“신들께서 우리의 편에 서셨다!”
그렇게, 나름 계획한 연출을 모두 연기한 끝에 로제의 뜻은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용기를 가지기 시작했고, 그 용기는 점차 뢰벡 전체로 퍼져 나갔으며,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장정들을 중심으로 무장이 시작됐다.
* * *
광명력 995년 3월 26일 오전.
슈타인하르츠 호텔 특실.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침실에서 로제는 가만히 의자에 앉은 채 마정석을 쥐고서 명상하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말씀하셨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연출에는 힘을 아끼지 말라고.’
아딘의 말대로 그녀는 어제 엄청난 힘을 써가며 퍼포먼스를 시민들 앞에서 펼쳤다.
덕분에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고, 알프레드가 미리 정리해둔 특실로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아딘이 준 마정석 가운데 하나를 손에 쥔 채 그것이 품고 있는 마력을 흡수하며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알프레드를 만나라고 한 건 다 이유가 있었어.’
아딘이 쓴 각본에서 로제의 역할은 주연이었고, 알프레드는 조연이었다.
그러나 조연이 없다면, 아딘의 각본은 폐기됐거나 혹은 대규모 수정이 불가피할 정도였다.
‘반나절 만에 무너진 행정 체계를 되살릴 정도니…….’
로제의 퍼포먼스 이후, 시민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고, 모두에게 무장하라 선동했다.
그러는 사이 알프레드는 부하들과 함께 유목민 왕조에 빌붙어 도시를 쥐락펴락하는, 시민의 배신자들이 자리한 사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알프레드는 배신자들을 모두 쳐 죽여 더럽혀진 사원을 깨끗이 정화했다.
그런 다음 사원 옆에 딸린 사제의 사택을 임시 지휘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반나절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과거 뢰벡이 자랑하던 행정 체계를 되살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잠에서 깬 로제는 알프레드로부터 무장 민병대의 배치가 끝났다는 보고를 서면으로 받았다.
‘빅토르 다비도프도 그렇고 안톤 르보프도 그렇고 알프레드도 그렇고…… 오라버니가 사람 보는 눈은 좋단 말이야.’
로제는 마음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설령 게마인샤프트를 해방하고 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통치는 자기보단 아딘에게 더 어울린다는 것을.
‘사실 난 별로 뭐 통치니 뭐니 관심도 없고…….’
사실 그녀에게는 게마인샤프트의 왕이 되겠다는 야망 따위는 없었다.
정치에 별다른 뜻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아딘과 함께하는 삶만을 꿈꿀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 삶을 위해 무리해가면서까지 해방자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라버니는 올해 안에 모든 일을 끝내길 원하고 계셔. 일단 뢰벡을 방어하고나면, 곧장 다른 도시들로 움직여서…….’
눈을 감은 채 그녀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앞으로 움직여야 할 루트를 점검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녀는 라인하르트를 제압하고, 그의 유목민 왕조를 해체한 후 각 도시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왕이 되고나면 자연스럽게 오라버니와……’
그 너머를 상상한 순간, 그녀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마정석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이왕이면, 오라버니를 따라다니던 마법사보다는 한 국가의 군주 신분인 게 오라버니에게도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날 아이에게도 좋겠지.’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