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돌아온 성녀 (3)
카르갈의 말에 아딘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별안간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인간 남자가 알현실 내부로 들어왔다.
인간 사회를 기준으로 봤을 땐, 볼품없었고 오크 사회를 기준으로 봤을 땐 나름 괜찮은 수준의 위생 상태를 유지하는 세 남자를 보며 아딘은 정색했다.
“인간을 납치한 건가?”
아딘의 목소리에 깔린 은은한 분노를 알아차린 카르갈은 손사래를 쳤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인간의 왕이여. 저들은 나 오크의 왕 카르갈이 전쟁 중에 구출해낸, 다른 오크들이 잡아둔 인간입니다.”
그러면서 카르갈은 지난 일들을 아딘에게 말해주었다.
“나 오크의 왕 카르갈은 그대 인간의 왕으로부터 받은 무기와 관념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복하고 또 정복했습니다.”
왕이라는 아이디어와 쇠칼이라는 무기는 카르갈이 이끄는 카르기아족으로 하여금 정복전쟁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선두에 선 카르갈은 쇠칼로 석기를 사용하던 다른 부족 족장들을 도륙했고, 순식간에 메콩가강 강변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과정에서 나 오크의 왕 카르갈은 저들 인간 기술자들을 구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카르갈에게 구체적인 문명 구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
“저희야 뭐 이 일 저 일 안 해본 일이 없으니, 기술자라기에는 좀 그래도 나름 다리를 짓고 건물을 올릴 줄은 압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게마인샤프트 동부 일대를 떠돌며 온갖 건설 현장에서 일을 했다는 중년 남성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두루마리를 통해서 본 건 카르기아족이 얼마나 커졌느냐지,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서 커졌느냐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오해를 푼 아딘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인간 남성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가?”
그 물음에 세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처자식이 있지도 않고, 인간 사회로 돌아 가봐야 여기보다 더 대우가 좋지도 않을 거고, 그냥 여기가 편합니다. 가끔 외로우면 우리 셋이서 옛날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적적함도 해소가 되곤 하고 말입니다.”
본인들이 만족한다고 하는 만큼, 아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말을 하진 않았다.
“인간의 왕이여. 나 오크의 왕 카르갈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여기에 온 겁니까?”
카르갈의 물음에 아딘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역으로 물었다.
“나 인간의 왕은 그대 오크의 왕 카르갈에게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말투가 왜 그런 거지?”
그 물음에 카르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 인간의 왕이여, 나 오크의 왕 카르갈은 생각했습니다. 왕이라면 다른 이들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고.”
그 말에 아딘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왕의 권위를 그런 식으로 또 내세우는 건 처음 보네.”
그렇게 잠시 웃음을 터뜨리며 물을 한 모금 마신 아딘은 카르갈에게 인간들과 다른 오크들을 치우라 눈짓했다.
그 눈짓을 알아차린 카르갈에 의해 곧 알현실에는 아딘과 카르갈만이 남게 됐다.
“보아하니 왕국이 상당히 안정된 것 같군.”
아딘의 말에 카르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안정이 됐지요. 그대가 준 칼과 저 인간들의 지혜 덕분에.”
단둘만이 남게 되자 카르갈의 말투는 다시 정상적화됐다.
그 모습에 한 차례 더 웃음을 터뜨린 후 아딘은 말을 이었다.
“적어도 메콩가강 유역에선 그대의 왕국을 건들 존재는 없다고 봐도 좋겠지.”
“그렇지요.”
“하지만 그대의 꿈은 메콩가강만 차지하는 게 아니겠지?”
그 말에 카르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이야기했지. 족장들의 족장이 왕이라면, 왕들의 왕은 황제라고. 나는 오크의 황제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있소이다.”
“하지만 황제가 되기에는, 아직 그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무장 수준이 석기에 머무르고 있고?”
자신의 고민을 정확히 파악하는 아딘의 모습에 카르갈은 일견 감탄까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간들이 다리를 만들고, 나무를 이어서 집을 만들 줄은 알지만 무기를 만들 줄은 모르더이다.”
카르갈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조건이 맞다면, 내가 그대에게 추가로 철제 무기를 제공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 말에 카르갈의 눈이 번쩍였다.
“조건?”
관심을 표하는 카르갈에게 아딘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고 우리가 원할 때, 오크를 용병으로 줘. 그러면 그 대가로 용병으로 온 오크의 숫자만큼 철제 무기를 주지.”
“용병?”
아딘의 말에 순간 카르갈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그 모습을 다소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딘은 투박한 나무 컵에 담긴 물을 쭉 들이켰다.
* * *
제32백인대는 제11천인대에 속해 있고, 제11천인대는 제3만인대에 속해 있다.
그리고 제3만인대는 요제프가 이끄는 흑기대 휘하로 게마인샤프트 서부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히히히힝-!]
광명력 995년 3월 25일 정오.
“싸그리 뒤져라!”
“네!”
제3만인대 부대장 란돌프는 눈에 불을 켠 채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 명령에 그를 따라온 제11천인대 소속 기병 500과 부대장 직속 기병 500은 뢰벡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감히 백인대장을 죽인 것들이다. 의심 가는 것들은 모조리 잡아들여라!”
사흘 전, 뢰벡과 제32백인대 주둔지 사이 광야에서 백인대장과 그 친위대가 모두 시체로 발견됐다.
보고는 곧장 제11천인대장에게로 올라갔고, 제11천인대장은 그 정보를 곧장 제3만인대장에게로 올렸다.
그리고 제3만인대장은 부대장 란돌프를 직접 보내 조사를 지시했다.
“아아악-!”
“너지! 네가 의심스러운데?”
“아, 아니예요!”
“눈빛을 보니 범인인 것 같아! 끌고 가!”
물론 라인하르트를 만나기 전까지, 광야에서 양이나 치고 말젖이나 짜던 유목민들에게 세련된 조사 기법 같은 건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일 뿐이었다.
“모두 잡아서 광장으로 끌고 와!”
란돌프는 그렇게 명령하고선 측근들과 함께 뢰벡 중앙 광장으로 이동했다.
한때 상업이 번성했던, 지금은 버려져 폐허가 돼 거지들만 있는 광장에 그들이 들어서자 누워서 잠을 청하던 거지들은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
“저것들도 잡을까요, 형님?”
측근의 물음에 란돌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버려 둬. 저런 거지들이 백인대장을 어떻게 했겠냐?”
“그렇죠?”
“하여간 제11천인대에는 모지란 인간들만 있는 것 같아. 항상 여기서 사고가 터지잖아, 여기서.”
“형님, 이 기회에 그냥 여기도 불태우는 게 어떨까요?”
측근의 말에 란돌프는 코웃음을 쳤다.
“불태우고 나면, 뒷감당은 누가 하라고?”
“그거야…….”
“대왕님이 직접 태우라 하지 않는 이상, 도시는 태우지 않는다. 이게 우리 규칙이야. 기억 안 나?”
“그건 아는데…… 백인대장을 죽인 놈들이면 위험한 놈들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잡힐까요? 그런 놈들이?”
그 물음에 란돌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안 잡아도, 아마 다른 놈들이 잡아 올걸?”
“네?”
“적당히 우리가 여기서 한 300명 정도를 산채로 태워 죽인다고 생각해 봐. 이 도시의 겁쟁이들이 누구한테 분노하겠어?”
“우리한테 아닐까요?”
“쯧쯧쯧. 이러니 네가 내 친위대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이 어리석은 놈아.”
란돌프는 측근을 한 차례 비난한 후 말을 이었다.
“애초에 도시에 살던 것들은 우리한테 모두 겁을 먹은 상태야. 하지만 인간은 언제고 분노를 터뜨릴 필요가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 그들의 분노는 아무나 태워 죽인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나 태워 죽이게 만든, 백인대장을 죽인 것들에게로 향할 거야.”
“아…… 어…… 근데 형님. 여기 도시놈들이 그 범인을 알고 있다면, 그냥 적당히 몇 놈 잡아다 두들겨 패면 알아서 불지 않을까요?”
“꼴에 의리를 지키겠다고 다들 입을 다물고 있겠지. 하지만 의리도 의리 나름이지. 자기들 전부 불탈 수 있다는 가능성만 심어주면 알아서 범인을 잡아다 우리한테 대령할걸?”
그렇게 두 사람이 기다리는 사이, 뢰벡으로 퍼져 나갔던 병사들은 2천 명에 이르는 시민들을 체포해 왔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로제와 알프레드 그리고 그의 부하 둘도 끼어 있었다.
“저것들이 뭘 하려는 겁니까?”
알프레드가 로제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로제는 그저 지켜보라 손짓하며 가만히 란돌프를 노려봤다.
“다 잡아 왔냐?”
란돌프의 물음에 병사들이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다.
란돌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잡혀온 시민들을 바라보더니 곳곳에 대기 중이던 병사들에게 턱짓했다.
“아아악-!”
“이거 놔요!”
“난 아무 죄도 없어요!”
란돌프의 턱짓에 병사들은 잡아온 시민 가운데 일부를 또 끄집어 냈다.
대략 100명 정도를 끄집어냈을 무렵, 란돌프는 휘파람을 불어 병사들을 멈추게 했다.
그리곤 가만히 끌려나온 시민들을 둘러보더니 이야기했다.
“너희들 중, 제32백인대장과 그 친위대를 살해한 용의자가 있냐?”
그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란돌프는 콧방귀를 뀐 후 부하들에게 턱짓했다.
곧 부하들이 포로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다리 힘줄을 칼로 쳐 끊었다.
“끄아악-!”
정확하게 힘줄만을 끊었기에, 죽지는 않을 만큼의 고통을 느끼며 시민들은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곧 그들 위로 다른 병사들이 미리 준비해온 짚단을 쌓아 올렸다.
“태워라. 태우다 보면 범인이 나오겠지.”
란돌프의 명령에 병사들은 마지막으로 짚단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곧 불은 짚단 전체를 집어 삼켰다.
“아아아악-!”
“끼아아악-!”
짚단 아래에 깔려 있던, 다리 힘줄이 끊겨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곧 광장을 뒤덮었다.
“서, 성녀님!”
알프레드는 다급한 마음에 로제를 불렀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서 로제는 사라진 뒤였다.
“성녀님?”
알프레드가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였다.
“어?! 어!”
“저, 저거!”
불타는 짚단과 무시무시한 기병들의 기세에 잔뜩 불안에 떨던 시민들이 하늘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알프레드는 시민들의 손을 따라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 허! 허허!”
그리고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 저건 뭐야?”
란돌프도 하늘을 바라보며 당황했다.
“서, 성녀님이시다! 성녀님이셔!”
“서, 성녀님이네!”
“성녀님이다! 성녀님이 우리를 구하러 다시 와 주셨어!”
시민들 가운데, 오래전 로제로부터 병을 치유 받았던 이들이 외쳤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허공에서, 찬란한 빛으로 몸을 두른 채 천천히 지상으로 강림하며, 로제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성녀님이시다!”
“성녀님! 여깁니다! 여기예요!”
시민들의 간절한 부르짖음과, 기병들의 당황 속에서, 그렇게 로제는 빛과 함께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알프레드는 한 마디 했다.
“연출 하나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성녀님.”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