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58화 (158/175)

158 돌아온 성녀 (1)

광명력 995년 3월 21일 정오.

트링겐의 정탐병은 란데르 평원에서 유목민이 모두 철수했음을 보고했다.

“평원에는 말똥을 빼면 유목민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탐병의 보고는 곧 트링겐 전체로 알려졌고, 시민들은 모두 환호하며 구원의 기쁨을 만끽했다.

자연스럽게 아딘에 대한 찬양이 거리에 넘쳐났다.

“이거 봐! 저 야만스러운 유목민 자식들도 콘스탄틴 국왕이 왕림하니까 뒤가 빠져라 도망가잖아!”

“똥이나 싸질러놓고 말이지!”

“콘스탄틴 국왕 아래라면 우리는 영원히 평화로울 거야!”

그렇게 아딘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된 가운데, 3월 22일 정오, 아딘은 정식으로 루돌프 3세를 자신의 봉신으로 삼는 의식을 동방광명교 사제와 트링겐의 광명교 사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치렀다.

루돌프 3세에게는 공작의 작위가 수여됐고, 트링겐과 뵌가르트는 한데 묶여 콘스탄티노프 공작령으로 승격됐다.

이후 1주일간, 콘스탄티노프 공작령은 축제 속에서 평화와 번영에 대한 찬양을 부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3월 29일 오전.

벨로디나에서 온 함대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루돌프 3세를 비롯해 수많은 트링겐 시민이 항구로 나왔고, 그들은 벨로디나에 충성할 것을 노래하며 함대를 보냈다.

하지만 그 함대에 아딘과 로제는 없었다.

“떠나네요.”

멀어져 가는 함대를, 등대 위에서 바라보며 로제가 말했다.

“그렇네.”

아딘이 거기에 답하며 가만히 함대의 깃발을 바라봤다.

“저하고 오라버니가 없는 사이에 외무대신이 엉뚱한 짓을 하거나 하진 않겠죠?”

로제의 우려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르보프도 있고, 불카르 아시오게도 있고 뭐 거기다 야민 벤키시까지 있으니까. 당장에 다비도프는 뭘 할 처지는 아닐 거야.”

“하긴, 거기에 뭘 할 수 없게 오라버니가 많은 임무를 주셨죠.”

“제니스와의 국교 정상화 협상, 라인하르트와의 국교 개시 협상 거기다가 샤펠 제국으로 보낼 사절단 구성까지.”

“바쁘면 엉뚱한 생각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외무성에다가는 관료도 별로 배정하지 않았잖아.”

아딘의 말에 로제는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외무성 관료들 사이에 불만이 있는 건 아시죠?”

“당연히 알지. 인력 충원이 안 되니까, 뭐 다들 불만이 있겠지.”

“언제까지고 외국어 실력자가 드물다는 핑계를 대시긴 힘들 거예요.”

“적당히 다비도프의 후임자를 찾으면 달라지겠지.”

거기서 아딘은 대화를 끝낼 요령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로제도 따라서 일어났다.

“오라버니는 이제부터 렝고스로 가실 예정이죠?”

“그렇지. 렝고스로 가야지. 오랜만에 오크들도 보고, 또 이런저런 구두계약도 맺고.”

“진짜로 오크를 용병으로 쓰실 생각이에요?”

“우리가 충분한 힘을 기르기 전에 제국이 쳐들어온다면, 당연히 써야지.”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로제에게 아딘이 말했다.

“알프레드 폰 슈타인하르츠는 현재 뢰벡에 있어. 사흘 내로 중부로 이동할 예정이니까, 뢰벡에서 보려면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야.”

“중부라면 옛날 발터하임 가문의 영역을 말하는 거죠?”

“그렇지. 슈타인하르츠 가문과 어느 정도 엮여있던 사이니까, 거기에도 무슨 거점을 마련해둔 모양이야.”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면 수정 구슬로 연락하고.”

“네, 오라버니.”

“그럼 먼저 갈게.”

그 말을 끝으로 아딘의 몸은 황금빛 광휘에 휩싸였다.

잠시 후, 불칸의 갑옷으로 무장한 아딘은 그대로 빠르게, 한줄기 유성처럼 동남쪽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로제는 이내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뢰벡.

브라운실트 가문의 영지이자, 게마인샤프트 서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도시.

[히히히힝-!]

그러나 지금 뢰벡은 유목민에 의해 짓밟혀 과거의 영광은 오간 데 없이 그저 황량함만이 남은 도시로 전락한 상태였다.

“아아아악-!”

“흐헤헤. 형님! 여기 아주 실한 년 하나 잡아 왔습니다!”

뢰벡을 관리하는 흑기 대장군 요제프 산하 제32백인대장 구스타프는 부하가 끌고오는 처녀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거 자식이, 내 취향은 아무튼 기가 막히게 꿰고 있단 말이야.”

적당히 마르지도 않고, 뚱뚱하지도 않은, 풍만한 처녀의 몸매를 바라보며 구스타프는 부하에게 고갯짓을 했다.

부하는 곧장 비명을 지르는 여인을 죄수 호송용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곳에는 이미 풍만한 여인들 세 명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모든 걸 포기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곳으로 새로이 들어가게 된 처녀는,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하며 비명도 지르고 살려달라 고함도 쳤다.

그러나 길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호소를 외면했다.

결국 마차를 전후좌우로 둘러싼 기병들이 내뿜는 기세까지 더해지자 처녀도 앞서 잡혀온 여인들처럼 침묵하게 됐다.

“야만인 자식들!”

그 모습을 골목길에 숨어 지켜보던 세 사람이 있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한 사내 둘과 야무지게 생긴 사내 하나는 기병들의 모습에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이 새끼들…….”

한 사내가 품에서 단검을 뽑아들고서 골목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자 야무지게 생긴 사내, 알프레드 폰 슈타인하르츠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참아.”

알프레드의 말에 사내는 핏발 선 눈으로 이를 갈면서도 결국 골목을 뛰쳐나가려던 행동을 멈추었다.

사내가 자중하는 것을 보며 알프레드는 가만히 골목 밖을 바라봤다.

백인대장과 그의 친위대는, 숫자로만 보면 10명 정도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질긴 가죽 갑옷과 기다란 창, 마상에서 휘두르는 커다란 칼 그리고 활과 화살로 완전무장한 정예 기병이었다.

단 세 사람만으로 어찌할 수는 없었다.

“일단 저들이 저 여인들을 어디로 납치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해.”

그렇게 알프레드는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골목길을 통해 구스타프와 그 친위대의 뒤를 따랐다.

친위대는 두 명의 풍만한 여인을 더 잡아 넣고 나서야 뢰벡을 떠났다.

알프레드와 그 부하들은 거리를 상당히 띄운 채, 보따리 상인으로 위장한 상태로 그 뒤를 따랐다.

“야만적인 것들, 도시를 점령해서 관리한다면서 왜 정작 자기네들은 도시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장막을 치고 사는 거지?”

부하 중 하나의 말에 알프레드는 눈으로는 계속해서 친위대를 주시하며 대답했다.

“조상 대대로 들판에서 장막을 치며 살아온 자들이야. 한데 뭉쳐 군대가 됐다고 해서 당장에 도시 생활에 적응할 수는 없겠지.”

그 말을 다른 부하가 이어 받았다.

“그러니 버러지 같은 배신자들을 앞세워 난리를 치지.”

그렇게 유목민들을 씹으며 알프레드와 그 두 부하가 길을 걸을 때였다.

대략 제32백인대의 주둔지와 뢰벡의 중간쯤에 이르는 지점에서, 별안간 돌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휘유우우우우-!]

동쪽으로부터 불어온 엄청난 돌풍에 알프레드와 부하들은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려야 했다.

‘갑자기 여기에서 돌풍이?’

평소 잔잔한 바람만 불던 곳이었던 만큼, 알프레드는 갑작스러운 돌풍에 당혹감을 느꼈다.

돌풍은 약 1분간 지속됐다.

1분이 딱 지나자 거짓말처럼 바람은 멎었고, 공기는 차분해졌다.

알프레드와 부하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헉-!”

그리고 그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목을 잃은 인간과 말의 사체들을 볼 수 있었다.

“바, 바람을 맞고 저리 됐단 말이야?”

한 부하의 말에 알프레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그래서 설령 그게 사람의 몸에 상처를 입혀도, 저렇게 목만 딱 잘라놓지는 못하지.”

알프레드는 천천히 사체들을 향해 다가갔다.

“혀, 형님!”

“형님!”

두 부하는 다급한 목소리로 알프레드를 부르며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사체의 중심에 도착한 알프레드는 그들이 단순히 목만 잘린 것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면이 익었어?’

말도, 사람도 모두 잘려나간 단면이 바짝 익어 있었다.

그랬기에 머리가 잘려나갔음에도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건…… 이건 절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야.’

알프레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두 부하들은 마차의 문을 부수고 여인들을 끌어냈다.

“여자들은 무사해요, 형님!”

부하의 말에 알프레드는 곧장 시선을 그들에게로 돌렸다.

그 말대로 여인들은 무사했다.

다만, 눈앞에서 사람과 말이 변사체가 되는 것을 본 만큼 정신적으로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다들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일단 이 여인들부터 구해내자.”

알프레드의 말에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말들이 다 저 모양이라…….”

한 부하의 말에 알프레드는 어두운 표정으로 여전히 땅 위를 네 발로 밟고 서 있는 말들을 바라봤다.

“하나라도 살아 있었으면 좀 그림은 안 좋아도 마차에 태우고 갈 수 있었는데…….”

부하의 말에 알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알프레드는 여인들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걸을 수 있겠나?”

그 물음에 여인들 중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몇몇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상 고개를 끄덕인 이들도 다리가 심각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부하들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서 있는 상태였다.

“후우…….”

알프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저 여인들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제32백인대의 주요 정찰로 중 하나였다.

여기서 여인들이 회복되길 기다리다간 자칫 저들의 정찰조에 발각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분명히 우리가 죽이진 않았지만, 놈들이 그걸 알아나 주겠어? 잡아다 온갖 고문을 하겠지.’

알프레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여인들에게 말했다.

“힘들겠지만, 최대한 앞뒤 사람을 의지한 채 움직이자. 여기에 계속 있다간 기병들에게 발각되고 말 거야.”

그러면서 알프레드는 여인들을 일렬로 세웠다.

그리곤 앞뒤로 부하들을 둔 후 그는 중간에 서서 열의 허리를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가 보자.”

알프레드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막 발을 떼려 할 때였다.

[우우우우웅-!]

순간 알프레드를 중심으로 지름 10m의 원이 형성됐다.

‘마법?’

알프레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원을 바라봤다.

온갖 기하학적 문양과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가득한 빛무리의 등장에 부하들과 여인들은 모두 당황해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 순간.

[파아앗-!]

마법진이 발광했고, 빛은 곧 마법진 위에 서 있던 자들을 감쌌다.

‘으헉-!’

위아래가 뒤집히고 좌우가 바뀌는 느낌에 알프레드는 순간 구토감을 느꼈다.

가까스로 구토를 참으며 알프레드는 최대한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것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휘유우우-!]

시간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움 속에서 한바탕 세상을 뒹굴던 알프레드는 이내 모든 감각이 정상화됐음을 느꼈다.

“우웨엑-!”

그리고 그것을 느끼자마자 그는 주변을 먼저 확인하지도 못한 채 토악질부터 해야만 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