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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57화 (157/175)

157 유목민 왕조 (3)

샤펠 제국의 황제를 떠올리며 아딘은 차분한 어조로 로제에게 말했다.

“잘 들어, 로제. 빠르면 2년, 늦어도 5년 내로 우리는 샤펠 제국과 싸워야 할 거야.”

그 말에 로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샤펠 제국하고요?”

“응.”

“왜요?”

아딘은 로제에게 묵시록 종단과 샤를 11세의 측근인 로이의 죽음 등에 대해 알려주었다.

“자기 측근을 죽인 이상, 그는 복수를 감행할 거야. 무엇보다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끄는 묵시록 종단은 내가 가진 신물을 원하고 있거든.”

아딘의 말에 로제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샤펠 제국이 동원 가능한 군대가 얼마나 되죠?”

“최소한의 방어 인원을 남긴다면 상비군만 30만일 거야. 무리해서 징집병까지 끌어모으면 50만은 가뿐히 넘겠지.”

“유목민 군대 전체랑 비슷하네요.”

“안정적인 보급과 체제 그리고 엄격한 규율을 가진 정예 강병이지. 구성도 창병, 중보병, 경보병, 중기병, 경기병, 궁기병 등 다양하고.”

“그리고 어쩌면…… 제니스 공화국의 용병까지도 참여할 수 있구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인하르트의 군대는 상대하기가 쉬워. 민중의 지지도 없고, 안정적인 기반도 없거든. 적당히 게마인샤프트 전역에서 소요만 일으켜도 그의 군대는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게 돼.”

“하지만 샤펠 제국의 군대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렇지.”

“에효…… 산 넘어 산이네요.”

“성장통이라고 하자.”

“그래요. 성장통.”

그러면서 아딘과 로제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어쨌건, 조만간 라인하르트가 올 텐데, 오랜만에 옛 여행 동지를 만나러 가야겠지?”

“오라버니랑 저 이렇게 둘이서만 말이죠.”

“밤에 몰래.”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그렇게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라인하르트의 장막으로 들어갈 방법을 구상했다.

* * *

광명력 995년 3월 19일 저녁.

라인하르트의 군대가 란데르 평원에 도착했다.

그를 상징하는 노란 깃발의 등장에 순식간에 장막의 영역은 확장됐고, 도합 10만이 넘는 인원이 머무를 공간이 마련됐다.

그리고 확장된 장막의 영역 중심부에는 노란 깃발이 휘날렸고, 그 아래에는 거대한 장막이 들어섰다.

“아딘 콘스탄틴으로 의심되는 인물은 현재 트링겐에서 계속 머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정탐꾼 말로는 항구에 있는 거대한 함대가 그대로라고 합니다.”

청기 대장군 슈타이너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둔 병력의 규모는?”

“아직 상세히 파악하진 못했습니다. 다만, 성벽으로 인원 보충이 이루어진 것은 확인했습니다.”

“흐음…… 아딘 콘스탄틴이 왔다는 건 결국 트링겐이 벨로디나에 봉신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알겠어. 일단 가서 대기하고 있어. 곧 아돌프와 요제프가 올 거다.”

“알겠습니다, 대왕님.”

장막을 나가는 슈타이너를 보던 라인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술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딘 콘스탄틴…….’

라인하르트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트링겐에서 만난 아딘과 로제.

두 사람과 함께한 렝고스 여행.

그 과정에서 마주한 괴수들.

그런 괴수들과 싸우던 로제.

그런 괴수들을 통제하던 아딘.

불멸의 숲.

그곳에서 만난 먼 조상.

고대에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고 이제는 조용히 불멸의 삶을 용과 함께 즐기는 조상.

조상과는 달리 볼품없는 하류 인생인 자신.

그때의 자괴감, 좌절감, 수치심.

그 모든 것들이 라인하르트의 머리에 떠오르며 그를 자극했다.

라인하르트는 왼쪽 주먹을 꽉 쥔 채 술을 다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 나는 예전과는 달라. 적어도 지금은, 한 왕조의 창시자이자, 불멸자의 후손다운 늠름한 군주야.’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에게 외칠수록, 라인하르트는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그 수치심에 라인하르트는 들고 있던 술병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탁-!]

하지만 술병은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깨지지도 않았다.

대신 술병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한 남자의 손에 붙들린 채 그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 아딘?”

불빛 아래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라인하르트.”

그 곁에 있던 로제도 라인하르트를, 다소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예요.”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두 사람에게 쉬이 인사할 수 없었다.

그저 떨리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그렇게 앉아만 있는 건 좀 좋게 보이지는 않아. 이게 카반드 왕조의 예법인가?”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눈으로 아딘을 노려보며 말했다.

“공식적인 요청도 없이 한밤중에 마법적 힘으로 쥐새끼처럼 찾아온 걸 두고 우리는 손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딘 콘스탄틴. 우린 그걸 도둑 혹은 침입자라 부르지.”

“그럼 그 도둑 혹은 침입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장막의 주인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날 죽이려고 찾아온 건가? 너희가 날 죽이면, 밖에 있는 10만 기병이 가만히 있을까?”

“10만 기병은 네가 죽은지도 모를 거다. 우리가 여기 왔다 갔는지는 더더욱 모르겠지. 그들이 너의 죽음을 확인하는 건, 내일 아침 해가 뜨고 나서가 될 거다.”

아딘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에 라인하르트는 그저 이만 갈 뿐이었다.

그런 라인하르트를 향해 로제가 말했다.

“우린 당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니에요,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의 시선이 로제에게로 향했다.

“그럼 뭐하러 온 거지?”

“당신과 대화를 하려고 왔죠.”

“대화?”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다 이내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의 장막에 들어와서 죽이니 마니 하는 인간이, 나하고 대화를 하겠다는 인간의 자세인가?”

“당신이 흥분해서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나오니 오라버니도 그렇게 말씀하신 것뿐이에요. 진정하세요.”

라인하르트는 심호흡을 한 후 한 차례 이를 더 간 다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거기 계속 서 있든, 대충 자리에 앉든 하시오.”

다소 라인하르트가 흥분을 가라앉힌 것을 확인한 아딘과 로제는 이내 바닥에 있는,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의자에 앉았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그래. 무슨 대화를 하려고 왔소?”

그 물음에 아딘은 라인하르트를 직시하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트링겐과 뵌가르트에 대한 적대 행위를 멈추고,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항복 요구를 철회하도록 해.”

“왜 그래야하지?”

“왜냐하면, 지난 3월 10일부로 트링겐과 뵌가르트가 나의 왕국 벨로디나의 영토가 됐으니까.”

라인하르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전쟁은 서로가 서로의 영토를 빼앗는 행위다. 그런 행위가 우리 카반드 왕조와 너의 벨로디나 왕국 사이에 없을 수는 없겠지.”

“네가 철수하지 않으면, 나와 로제는 이 자리에서 너와 너의 군대를 모두 시체로 만들 것이다.”

“10만 용사를 모두 죽일 수 있을 것 같나?”

“1할만 죽여도 9만은 해산될 것이다.”

“……”

“절반을 죽이면 노예들이 들고 일어나 나머지 절반을 죽이겠지.”

“……”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의 힘은 네가 렝고스에서 보았던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하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10만 기병을 죽이는 일, 무리는 아니지. 그저 귀찮은 작업일 뿐.”

10만 군대를 단둘이서 몰살시키는 작업을 그저 귀찮은 것에 불과하다 말하는 아딘.

그 모습은 가히 오만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그에게서 그 어떠한 허세도 볼 수 없었다.

‘이 자식…… 진짜잖아?’

라인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딘은 이야기했다.

“힘을 쓰면 손쉽게 너와 너의 군대를 몰살시킬 수 있다.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모래 위에 쌓아 놓은 너의 왕조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너와의 옛 인연을 생각해서다.”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가만히 그를 노려봤다.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라인하르트. 로제가 홀로 괴수와 싸우다 지쳤을 때, 도망가지 않고 맞서려던 너의 의리를 기억하고 있기에, 난 너와의 싸움 대신 협상을 하고자 한다.”

라인하르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썹이 그의 고뇌를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후, 라인하르트는 눈을 뜨고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우리가 철수하면, 그대는 뭘 할 거지?”

“정상적인 국교를 맺을 생각이다.”

“국교?”

“너의 카반드 왕조는 반쪽짜리 국가다. 제니스 공화국으로부터는 유목민 왕조라 불리고 있으며, 샤펠 제국으로부터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벨로디나마저 너희를 외면하면 너희는 내부로는 피정복민의 분노에, 외부로는 주변국의 경멸과 혐오에 노출된다.”

“……”

“그게 네가 바라는 국가의 모습은 아니겠지.”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이 말을 이었다.

“당장에 정상적인 국가 관계를 맺기는 힘들겠지. 여전히 트링겐과 뵌가르트의 시민은 너희를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감정이 잦아들고 너희가 충분한 상업적 수요를 가지게 된다면, 트링겐과 크리미아 그리고 콘스탄티노바에 너희의 무역사무소가 설치될 것이다.”

아딘의 제안은 솔깃한 것이었다.

라인하르트는 단순히 유목민들의 왕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게마인샤프트를 단순히 공포로만 통치하는 게 그의 최종 목표도 아니었다.

그가 꿈꾸는 것은, 과거 조상이 이룩했던 카반드 왕조보다 더 거대한 카반드 왕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 위해선 정상적인 외교관계는 필수였다.

“평화를 이룩하자는 건가?”

“그렇다.”

“……좋다.”

라인하르트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 사흘 내로 랑데르 평원을 떠나라. 그리고 트링겐으로, 너의 명의로 서신을 보내 평화와 우호를 기원하는 인사를 하길 바란다.”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라인하르트의 말이 끝나자 아딘과 로제는 곧 모습을 감췄다.

둘이 사라진 것을 본 라인하르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주먹을 꽉 쥔 채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더니 이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그의 괴성에 밖에서 그의 장막을 지키던 병사들이 부리나케 내부로 들어왔다.

그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봤지만, 라인하르트는 그들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고함을 내질렀다.

결국 아돌프가 와서, 다른 모든 병사를 내보내고, 그에게 형님형님 거리며 그를 달래고 나서야, 라인하르트는 고함지르는 것을 멈췄다.

“도대체 왜 이럽니까, 형님? 애들이 다 무서워합니다.”

자신을 자리로 안내하는 아돌프를 향해 라인하르트는 이야기했다.

“철군 준비해라.”

“네?”

“철군 준비를 하라고.”

아돌프의 눈빛이, 라인하르트의 난동을 볼 때보다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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