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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56화 (156/175)

156 유목민 왕조 (2)

광명력 995년 3월 13일.

게마인샤프트 남부 중심도시 라인데른.

활활 타오르는 도심을 성벽 위에서 바라보며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발에 깔려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다 네 탓이다.”

라인하르트의 말에, 그의 발에 목이 짓밟힌 상태로 도심의 화재를 바라보던 남자는 이를 갈며 고함쳤다.

“이 악마같은 놈! 도대체 시민들은 무슨 죄가 있다고!”

“무슨 죄?”

라인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그의 목에서 발을 뗐다.

그리곤 그 자리에 쭈그려 앉은 채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 그가 자신을 바라보게끔 만들었다.

“너같이 은혜도 모르고 분수도 모르고 주제도 모르는 찌끄러기를 믿고 감히 카반드 왕조의 대왕 라인하르트 샤푸라자데 카반드에게 덤빈, 하늘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있지. 그것도 도시 전체에 만연해 있단 말이야.”

“이…… 이 악마같은 새끼!”

한때 남부의 반란을 이끌었던 수괴의 절규에 라인하르트는 씩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돌프.”

그의 부름에 적기 대장군 아돌프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대왕님.”

“이 자식 마누라랑 딸들 다 확보했지?”

“네, 다 대왕님 장막에 고이 모셔뒀습니다.”

“대려다가 적당히 너희 군에서 선봉에 섰던 애들한테 던져줘. 그리고 이 자식 보는 앞에서 마음껏 즐기라고 해. 적어도 내일 태양이 뜰 때까지 말이야.”

그 말에 반란 수괴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내일 해가 뜨는 대로 다 죽이고 맨 마지막으로 이 자식을 죽여. 때려 죽이건, 살가죽을 벗겨 죽이건, 그건 네 맘대로 하고.”

라인하르트의 말에 아돌프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십시오, 대왕님.”

곧 아돌프의 군대에 의해 반란 수괴는 끌려갔다.

그는 끌려가는 와중에 라인하르트를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일단 저 인간 이빨부터 다 뽑고 저 인간 마누라하고 딸들 어떻게 해라.”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명령을 내린 후 다시 시선을 불타는 도심으로 돌렸다.

화재 현장 외곽에, 이미 다 태워 더 이상 화재가 번지지 않게끔 조치해둔 곳에선 그의 군사들이 불길에서 탈출하려는 시민들을 창으로 위협해 다시 그곳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냉랭한 눈길로 지켜보던 라인하르트가 이내 발걸음을 장막으로 옮기려 할 때였다.

“대왕님!”

적기 대장군 아돌프가 다시 그에게로 달려왔다.

아돌프의 표정이 상당히 심각함을 보고, 라인하르트도 덩달아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야?”

“청기 대장군으로부터 급보입니다.”

그러면서 아돌프는 라인하르트에게 돌돌 말린 조그만 서신을 건네주었다.

“전서구로 온 거야?”

“네, 그렇습니다.”

“급한 소식인가?”

라인하르트는 곧장 서신을 펼쳤다.

문법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엉터리인 서신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당혹스러움은 고스란히 라인하르트에게 전해졌다.

‘아딘 콘스탄틴?!’

아딘 콘스탄틴의 트링겐 방문을 알리는 서신.

그것을 본 라인하르트의 동공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라인하르트는 이내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버린 후 아돌프에게 말했다.

“너는 여기 정리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란데르 평원으로 와라. 그리고 요제프한테도 서신을 보내서 최대한 빨리 란데르 평원으로 오라고 하고. 난 당장 그쪽으로 가야겠다.”

“아, 알겠습니다.”

라인하르트의 군대 5만, 나머지 둘의 군대 각각 5만, 슈타이너의 군대 5만.

도합 20만의 군대가 란데르 평원에 모이는 것이었다.

‘감당할 수 있을까?’

성문 밖으로 나가는 라인하르트의 뒷모습을 보며 아돌프는 우려 섞인 표정으로 고민했다.

‘사실 남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도, 무리하게 유목민 50만을 다 군인으로 써서 그러는 건데…….’

대체로 라인하르트를 따르는 이들은 단순하고 무식한 경향이 강했다.

슈타이너가 특히 그런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아돌프의 경우 조금 덜 단순했고, 덜 무식했다.

그랬기에 그는 남부 반란의 원인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20만이 한자리에 모이면, 거기서 나오는 사람과 말의 배설물 그리고 사람과 말이 먹을 식량까지…… 엄청난 인력이 또 들겠지.’

이미 란데르 평원에는 5만 기병을 뒤치다꺼리할 강제로 징집한 노예가 5만이나 있었다.

그런 곳으로 20만 기병이 더 간다는 것은, 곧 노예만 20만이나 되는 대규모 장막이 구성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예 20만은 곧 노동할 인구 20만의 소멸을 의미하지.’

유목민 기병 한 사람 앞에 노예 한 사람 이상.

이것이 라인하르트의 방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게마인샤프트 원주민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요제프도 군대를 빼기가 어려울 건데…… 서부가 심상찮으니까.’

하지만 아돌프의 우려는 그의 입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형님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

결국 그도 힘센 양치기에 불과한 사람이었던 만큼, 라인하르트의 결정에 반기를 들거나 할 용기는 없었다.

* * *

“그런데 라인하르트는 왜 이렇게 무식하게 통치하는 거죠?”

아딘의 청혼과 키스 이후, 한동안 로제는 정보원 단속을 이유로 그와 거리를 뒀다.

그러나 일주일의 시간이 흐른 후, 로제는 다시 그를 찾아왔다.

좀 더 정서적으로 가까워진 상태에서, 로제는 아딘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라인하르트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사람이 그렇게 지적이진 않았지만, 무식한 사람도 아니었잖아요? 잔인한 사람도 아니었고?”

로제가 기억하는 라인하르트의 모습은, 용병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그러나 능력은 별로인 하류 용병이었다.

그러나 지금, 트링겐에 배치한 정보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아딘이 알려준 정보를 취합하면, 라인하르트는 문자 그대로 잔악무도한 악의 화신이었다.

“이 정도면 조직이란 게 의미가 없지 않나요? 점령지 주민을 노예화하지 않고는 도저히 유지가 안 되는 체제잖아요.”

“그렇지. 유목민으로 군사정치를 하는데, 당연히 유지가 어렵지. 그러니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고, 또 일어날 예정인 거고.”

“도대체 왜 이렇게 통치하는 거죠?”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뭐, 자기 나름대로는 이게 최선의 통치술이라 생각하는 거겠지. 도시에 사는 피정복민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군주보다는, 그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는 군주가 통치에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거면, 설명이 돼.”

두루마리가 자신에게 알려준 정보를 그대로 읊으며 아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불멸자를 만난 게 좀 영향이 컸던 모양이야.”

그 말에 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야 아버지를 만난 것이었고, 또 아버지 루이 알랭을 만났을 때에는 이미 용의 피가 각성해 상당한 수준의 마법적 능력을 지닌 상태였기에 충격이나 자괴감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모친으로부터 죽었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아버지와의 만남에 기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는 루이 알랭으로부터 제대로 마법을 배워 대마법사를 능가하는 대마법사 수준으로까지 올라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달랐다.

1,700년 전 한 지역을 호령했던 대군주이자 신물의 선택을 받아 불멸의 삶을 사는 조상과는 달리 볼품없는 하류 인생을 사는 스스로의 모습에 그는 자괴감을 느꼈다.

그로 인해 지내는 동안 시종일관 행복했던 로제와는 달리 라인하르트는 항상 우울해 보였다.

어쩌면 그때 느꼈던 자괴감과 우울감이 그를 더 잔인하게 만든 걸 수도 있었다.

“조상과의 만남이 영웅적인 과업을 이루어 내는 동력이 됐지만, 동시에 영웅적 과업을 악행과 피로 물들여 악당의 길로 가게끔 했네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내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 라인하르트가 불멸자의 후손이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를 조상에게 데려갔으니까.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라버니의 책임은 없어요. 오라버니는 그저 한 사람을 각성시켰을 뿐이에요. 그 각성의 방향까지 통제하진 못했을 뿐이죠. 사실, 한 사람의 각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오만한 일이기도 하구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너도 원래라면 마녀로 살다 죽을 운명이었어. 너의 각성은 철저한 마녀의 각성이 될 예정이었지.’

아딘은 그저 가만히 로제의 손을 잡고 엄지로 그녀의 손톱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로제는 가만히 자기 손을 아딘의 손에 맡긴 채 말을 이었다.

“어쨌건, 오라버니와 제가 할 일은 라인하르트가 더 이상 악인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 거예요.”

“그렇지. 그걸 막는 게 어찌보면 불멸자와의 인연을 생각했을 때, 마땅한 도리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 막는다는 의미가, 단순히 라인하르트를 계도한다는 것이 아님을 아딘과 로제는 모두 알고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본대가 란데르 평원으로 오고 있어. 곧 적기 대장군과 흑기 대장군의 본대도 오겠지.”

“기마병만 20만이네요.”

“수발드는 노예까지 하면 40만이야.”

“40만의 똥과 오줌이라…… 란데르 평원이 참 비옥해지는 소리가 들리네요.”

“시체로 더 비옥해지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목표 중 하나야.”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하르트의 유목민 왕조가 지금 당장은 무너지면 안 된다. 이게 오라버니의 뜻이죠?”

“그렇지. 게마인샤프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유목민 왕조는 적어도 1년은 더 존속해야 해. 해방자 로제 콘스탄틴의 전설이 게마인샤프트 전역에 퍼져나가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니까.”

아딘의 말에 로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를 마시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딘은 말을 이었다.

“기억나? 알프레드 폰 슈타인하르츠. 슈타인하르츠 여관의 주인.”

아딘의 물음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가, 지금 게마인샤프트 서부랑 남부 일대에서 지하 게릴라 활동을 하고 있어.”

“그래요?”

“범상찮은 인물이긴 했는데, 그 정도인 줄은 몰랐지. 아무튼 그 사람과 만나.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게마인샤프트 해방을 위해 움직여.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유목민 점령군을 쳐부수고, 도시를 시민에게 돌려주는 거지.”

“흐음……”

“가져온 수정 구슬로 연락을 하며 움직이면, 충분히 가능해.”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죠. 당연히 해야죠.”

“그래. 네가 힘들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 그러면 머지않은 미래에 벨로디나 국왕 아딘 콘스탄틴과 게마인샤프트 국왕 로제 콘스탄틴의 결혼을 통해 양국이 하나로 통합되는 역사가 일어날 거니까.”

아딘의 말에 로제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다 이내 그녀는 히죽 웃으며 아딘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은 두 왕국의 왕위를 모두 계승하는, 두 왕국의 왕이 되는 거구요?”

“뭐, 그래도 좋고 아니면 아예 제국을 만들어 황제가 돼도 좋지.”

“황제라…… 서쪽의 황제가 마음에 안 들어하겠는데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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