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유목민 왕조 (1)
광명력 995년 3월 11일 오전.
트링겐으로부터 서쪽으로 50km 떨어진 란데르 평원.
동풍에 휘날리는 커다란 푸른 깃발을 중심으로 5만의 기병과 그들을 수발하는 5만의 노예가 장막을 친 슈타이너의 주둔지.
그곳 중앙, 푸른 깃발 바로 아래에 자리한 대장군의 장막에선 대장군 슈타이너가 각 군 지휘관들과 함께 급하게 회의하고 있었다.
“사실이냐?”
슈타이너의 물음에 1군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어제 성벽 위를 시찰했다는 우리 측 정탐꾼의 보고입니다. 아딘 콘스탄틴이 저곳에 와 있습니다.”
1군 지휘관의 말에 슈타이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짜지? 진짜 아딘 콘스탄틴이지?”
“확실합니다. 대왕님께서 말씀하신 외양 그대로입니다. 담갈색 머리카락에 잘생긴 얼굴까지.”
“후우…… 진짜? 확실해?”
“확실합니다.”
장담하는 1군 지휘관의 말에 슈타이너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던 2군 지휘관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십니까, 대장군님. 까짓것 왕이 왔으니 오히려 잘된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슈타이너는 인상을 찡그리며 2군 지휘관을 바라봤다.
그럼에도 2군 지휘관은 계속해서 말했다.
“어차피 벨로디나 놈들과는 언젠가는 한판 붙을 거 아닙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신속하게 저 성을 공격해서 아예 벨로디나 왕까지 사로잡아 버립시다. 그럼 우리는 아주 손쉽게 벨로디나 땅을 우리 대왕님께 바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슈타이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2군 지휘관을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트링겐에 나타났다는 게 벨로디나 왕인지부터가 일단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군을 일으켜? 대왕님 명령도 없이?”
“어차피 싸울 거 아닙니까?”
“싸울 때 싸우더라도 대왕님이 가자고 하면 가는 거야, 이 자식아.”
슈타이너의 말에 2군 지휘관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설령 저게 벨로디나 왕이 맞다고 해도, 그럼 더더욱 우린 우리 뜻대로 움직이면 안 되게 되는 거야. 왕이 왔다면 뭐 혼자 왔겠어?”
그 말에 지휘관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일단 계속 주시하고 있어. 대왕님께서는 남부 놈들 때려잡고 나면 이쪽으로 오실 테니까, 그때까지 우리는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슈타이너는 회의를 끝내고 지휘관들을 각 군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슈타이너는 종을 시켜 술을 가져오게 한 후 안주도 없이 술을 병째로 들이켜며 생각에 잠겼다.
‘형님이 그랬지. 만약에라도 아딘 콘스탄틴과 마주칠 것 같으면, 일단은 피하고 보라고.’
한때 그냥 힘 좀 쓰던 양치기에 불과했던 슈타이너를 일약 5만 대군을 이끄는 3대 대장군 중 하나로 만들어 준, 그와는 의형제의 연을 맺은 라인하르트.
세상 두려워 보이는 것 없이 마구잡이로 유목민을 규합하고, 도시와 농촌에서 사는 이들을 짓밟아 노예로 만들던 라인하르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던 존재가 바로 아딘이었다.
‘절대 1대1로 싸울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이야.’
라인하르트가 보여준 단호함과 호쾌함, 단순함, 무자비함 등에 매료돼 그의 말이라면 일단 믿고 보는 슈타이너였기에, 술로 목과 뇌를 태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불안감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 뭐, 형님이 올라오신다면 문제없겠지. 형님의 군대랑 내 군대를 합치면 10만이야, 10만. 거기다 유사시에 샤푸르스탄에서 동원할 수 있는 5만에 요제프랑 아돌프까지 생각하면, 그래 형님이 아딘 콘스탄틴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25만이면 그 작자가 아무리 대단해도 우릴 이길 순 없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며 슈타이너는 전군에 위치 사수를 명한 채 라인하르트를 기다렸다.
* * *
청기 대장군 슈타이너.
적기 대장군 아돌프.
흑기 대장군 요제프.
이 세 사람은 라인하르트가 카반드 왕조를 부활시키는 데 있어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이들은 라인하르트와 모두 의형제 관계를 맺었고, 라인하르트를 형님으로 모시며 그를 위해 온갖 잔혹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그래 봤자 힘만 센 유목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아딘의 평가는 딱 그것뿐이었다.
“그래도 라인하르트가 직접 형제 관계를 맺고 5만씩 군대를 맡겼다면, 뭐가 있는 사람 아닌가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무력만 놓고 보면 솔직히 야민 벤키시보다 못한 수준이야.”
“야민 벤키시가 그냥 강한 게 아니라요?”
“그래 봐야 야민 벤키시는 군사적인 능력보다도 축산업계에서의 능력이 더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 오라버니께서 축산대신 자리를 만들어서 임명하셨죠.”
로제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목민 왕조의 힘은 실상 개개인보다는 무장한 50만 유목민에게서 나와.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말 위에서 활부터 투창까지, 다양한 무기를 다루는 50만 기마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유목민 왕조의 강함이라 할 수 있지.”
“사람보단 조직이다, 이거네요?”
“그렇지.”
“그러면 더 무너뜨리기 힘들지 않나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로제가 그렇지 않냐?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벨로디나 왕국은 오라버니랑 주요 내각 각료들만 제거해도 무너지게 돼 있어요. 솔직히 국가평의회 의원이란 사람들은 그냥 각 지역에서 힘 좀 쓴다는 노인들뿐이고, 내각 각료들도 저하고 르보프 총리를 비롯해 몇몇을 빼면 다 그냥 관료에 불과하잖아요.”
그러면서 로제는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솔직히, 그럴 사람이 있긴 하겠냐만, 누가 오라버니만 암살해 버리면 벨로디나는 금방 망할걸요? 지금이야 오라버니가 있으니까 드워프니 쿠만족이니 다 함께하고 있고, 외무대신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오라버니만 없어지만 걔들은 누가 관리해요?”
그녀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보고 있어, 로제. 아주 정확하게 말이야.”
“심각한 일이예요, 사실은. 오라버니 한 사람에게 왕국 전체가 너무 큰 의존을 하고 있다구요.”
우려 가득한 로제를 바라보며 아딘은 아주 오랜만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살짝 얼굴을 붉히는 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이야 초창기니까, 아직은 내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거지만 시간이 흘러 제도가 정착되고, 사람들이 헌법과 법률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그걸 잘 활용하기 시작하면 나 하나가 있고 없고에 따라 국운이 달라지는 일은 없어질 거니까.”
그 말에 로제가 살짝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은…… 그때쯤이면 오라버니의 권력도 엄청 축소된다는 거 아닌가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 쯤이면, 난 권력이 아닌 권위로 통치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왕권은 점차적으로 약해지는 게 내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딘은 허리춤에 찬 불멸의 검 칼집을 툭툭 쳤다.
“너도 알겠지만, 아마 그 누구도, 이 검을 뽑지 못할 거야.”
그 말에 로제는 피식 웃었다.
“너무 오만하신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아딘은 고개를 내저은 후 화제를 돌렸다.
“로제. 내가 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게마인샤프트는 너의 무대가 돼야 해.”
그 말에 로제는 다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이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게마인샤프트에는, 비록 서부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성녀의 전설이 있어. 적당한 선전과 대중조작을 거치면 성녀의 전설은 게마인샤프트 전역으로 퍼져 나갈 거야.”
“그리고 그 성녀는 통일 왕조라는 아이디어를 경험한 게마인샤프트인의 왕이 되겠죠?”
“그렇지. 반드시 그렇게 돼야 지.”
“하…… 왕이라…….”
한숨을 내쉬며 로제는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아딘은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힘들 수도 있어. 아니, 힘들 거야. 왜냐하면, 너는 전제군주가 아니면서도 전제군주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려야 하니까.”
“마치 오라버니처럼 말이죠?”
“그렇지. 단순한 권력이 아닌, 권위와 민중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은밀한 전제군주권. 그게 너의 길이고 또 나의 길이야.”
“어렵네요. 정말 어려워요. 그게 가능할까요?”
로제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단 로제에게는 아딘과 같은 혈통적 권위가 없었다.
도리어 그녀는 혈통으로 따지면 샤펠인이었다. 즉, 게마인샤프트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다는 것이었다.
종교적 권위도 마찬가지였다.
뢰벡에서 성녀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열과 성을 다해 사람들을 치유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뢰벡 안에서만 이루어진 일에 불과했다.
동서남북으로 넓이가 벨로디나의 1.5배에 달하는 게마인샤프트 전체로 보자면 사실상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전쟁을 통해 권위를 세워야 한다는 거네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힘든 일이란 거 알아. 그래도, 네가 해 줘야만 해.”
“오라버니를 위해…… 말이죠?”
“그리고 너를 위해, 너와 나 사이에 태어날 아이를 위해.”
순간 로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딘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아딘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제. 네가 게마인샤프트 통일 왕조의 초대 국왕이 된다면, 그때, 나와 결혼하자.”
“오, 오라버니…….”
“단순히 너와 나의 결합이 아닌, 벨로디나와 게마인샤프트의 결합이 될 거야.”
아딘의 말에 로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아딘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속내가 얼마나 복잡한지는, 쉼 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잠시 후, 로제는 눈을 감고는 입을 열었다.
“그 결혼…… 그냥 정략결혼인가요? 아니면……”
“내 개인적인 감정과 국왕으로서의 의무가 함께하는 결혼이야.”
그 말에 로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아딘도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그녀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의 떨림이 멈췄다.
로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곤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청혼치고는 너무 딱딱하고 진지한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그대로 로제의 머리를 가볍게 한 손으로 감아 쥐고는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아딘의 키스에 로제는 눈을 부릅떴다.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심하게 떨리던 그녀의 눈은 이내 몽롱하게 변했고, 얼마 안 있어 스르륵 감겼다.
로제의 손도 곧 아딘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정말 긴 시간 동안, 서로의 호흡을 맞춰가며, 서로의 사적인 감정을 확인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