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봉신화 요청 (2)
광명력 995년 3월 4일 오전.
겨울 궁전 알현실에서, 아딘은 안톤과 독대하고 있었다.
“군무대신도 동행하라 하거라.”
아딘의 말에 안톤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군무대신도 말이옵니까?”
“군무대신의 말대로 트링겐은 우리 왕국의 최전방이 될 것이니, 그곳 상황을 군무대신이 직접 봐야지 제대로 된 병력 배치를 할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지당하옵니다, 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
“3월 9일 오전에 크리미아에서 배에 올라탈 것이니,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도록 하라. 유목민 왕조도 경솔하게 짐이 트링겐에 있는 상황에서 공세를 펼치진 않을 것이니, 호위 병력은 너무 많을 필요는 없노라.”
“그렇게 조치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트링겐 행차에 관한 이야기가 얼추 끝날 무렵, 안톤은 조심스럽게 아딘에게 말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왕후를 맞이하시는 일을 고려하심이 어떠하옵니까?”
안톤의 말에 순간 아딘은 살짝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짐짓 태평한 척, 근엄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왕후를 간택하여 후사를 잇는 일보다는 왕국의 안정이 우선이니라.”
“하오나 왕국의 안정을 위하여서는 왕후와 왕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신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과 국가평의회 의원들 그리고 만백성의 뜻이옵니다, 폐하.”
“그 문제에 관하여서는 게마인샤프트의 일이 일단락된 후에 짐이 궁정대신을 통해 내각에 통보하겠노라.”
아딘의 말에 결국 안톤은 더 그를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다. 폐하도 그리고 정보대신도 모두 젊지 아니한가?’
그렇게 생각하며 안톤은 아딘에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다한 후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을 본 후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로제가 압박하는 거겠지.’
로제와 안톤 사이에 오간 밀약.
안톤의 팔을 재생시키는 대신, 로제를 아딘과 결혼할 수 있게끔 중매를 선다는 계약.
그것의 존재를 아는 만큼, 아딘은 지금 안톤이 한 말이 결국 로제의 뜻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결혼을 하기엔 너무 젊어. 그리고 할 일이 많아.’
무엇보다도 혼인을 올려 로제가 왕후가 되기라도 한다면, 로제는 더 이상 정보대신의 자리에 앉지 못할 터였다.
왕후가 내각에 각료로서 참여한다는 것은, 헌법이나 왕실 규범 그 어디에서도 금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관습적으로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 상 쉽게 용납될 수 없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지금은 트링겐과 라인하르트의 일에 집중하자.’
아딘은 가만히 두루마리를 펼쳤다.
곧 두루마리 위로 게마인샤프트 지도가 나타났다.
트링겐과 뵌가르트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라인하르트가 세운 카반드 왕조로 물들어 있었다.
‘카반드 왕조는 분명 강해. 사실상 모든 유목민을 군사화시켰으니까. 하지만 이런 유목민 군국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다수의 게마인샤프트 원주민을 노예화하는 경향으로 이어졌지.’
군사적으로 당장에 카반드 왕조는 매우 강한 축에 속했다.
적어도 카반드 왕조가 벨로디나나 제니스 공화국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면, 양국 중 그 누구도 손해를 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카반드 왕조의 군대는 결코 두 나라를 점령할 수는 또 없었다.
‘결국 기병 중심의 편제는 기동전 위주가 될 것이고, 기동전은 보급이 끊기는 순간 기병을 마적으로 전락시키지.’
탄생한 지 1년이 약간 넘은 카반드 왕조였지만, 이미 그 내부는 심각한 모순으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유목민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하는 통일 왕조였으니까.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게마인샤프트에 통일 왕조라는 아이디어를 심어 주었어.’
아딘은 가만히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치며 생각에 잠겼다.
‘벨로디나만으로 샤펠 제국과 싸운다는 건 말이 안 돼.’
샤펠 제국의 침략은 반드시 일어날 사건과도 같았다.
아딘의 뜻도, 심지어 김현수의 설정도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엮이고 엮인 묵시록 종단과의 일로 말미암아 필연에 가까운 일이 돼 버렸다.
‘게마인샤프트는 비교적 남쪽에 있는 만큼, 농업 생산력에 있어서 벨로디나를 압도해. 통일 왕조가 없는 지금도 전체 농업 생산량은 벨로디나보다 우위인데 만약 통일 왕조가 제대로 개발만 한다면 어마어마하겠지.’
마치 스노우볼링처럼, 루돌프 폰 콘스탄티노프의 봉신화 요청이 아딘의 뇌에선 왕권의 게마인샤프트로의 확장이라는 아이디어로까지 발전했다.
‘일종의 이중왕국을 세우는 거야. 나는 벨로디나의 국왕이면서 동시에 통일 게마인샤프트의 국왕이 되는 거지.’
벨로디나와 게마인샤프트가 유기적으로건 기계적으로건 하나가 된다면, 인구와 생산력에 있어서만큼은 가히 샤펠 제국과 견줄 수 있게 될 터였다.
‘하지만 벨로디나와는 달리 게마인샤프트에서 나의 명성은 초라해. 아무런 권위도 없어.’
아딘은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지긋이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화, 전설, 하나의 상징. 상징이 될 존재. 그런 존재…… 그런…… 아! 상징!’
순간 아딘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뇌리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정신없이 알현실을 돌아다니더니 이내 알현실 한쪽 벽면에 자리한 책상으로 가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두루마리는 곧 아딘이 보아야 할 정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아딘의 표정이 환해졌다.
‘됐어. 이거면 가능할 수도 있겠어!’
아딘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두루마리를 접었다.
* * *
광명력 995년 3월 9일 오전.
크리미아 항구에서 대규모 군함이 일제히 돛을 펼치며 남쪽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국왕과 3명의 대신, 300명의 실무진 그리고 1,5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함대는 그렇게 하루 동안 항해한 끝에 3월 10일 오후 트링겐 항구에 도착했다.
<민중의 국왕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 폐하를 환영합니다!>
게마인샤프트어와 벨로디나어로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항구 본부 건물에 걸린 가운데 아딘은 직접 자신을 마중하러 온 루돌프 3세의 인사를 받으며 그렇게 트링겐 땅을 밟았다.
“환영하옵니다, 폐하. 신하된 자로서 폐하께 최상의 예우를 바치나이다.”
자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루돌프 3세를 향해 아딘은 의례적인 인사를 던진 후 곧장 트링겐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은 듣던대로 견고하구나.”
“오랜 세월 콘스탄티노프 가문이 쌓아 올린 벽돌이 만든 단단한 성채이옵니다.”
“유목민 왕조의 병력이 기병 위주인 만큼, 쉽게 공략하긴 어렵겠어.”
“거기다 폐하의 힘이 더해진다면, 결코 저 야만적인 것들은 우리를 침탈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성채를 시찰하며 아딘은 동행한 불카르 아시오게에게 방어 병력의 재구성과 방어 전략의 재검토를 명했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이야?”
“그래. 민중의 왕 아딘 콘스탄틴.”
“민중의 왕은 무슨…… 그냥 지어낸 이야기 아닌가?”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내 사촌의 조카의 친구가 벨로디나로 보따리 지고 들락날락거리는 놈인데 거기 사람들 모두 입만 열면 왕을 칭송하기 바쁘다더라. 배당금인지 뭔지도 받았다고 막 좋아한다더라.”
“사촌의 조카의 친구면 그냥 남이잖아. 남 이야기만 듣고 어떻게……”
“그럼 뭐 영주님은 노망이 나셔서 저 사람한테 봉신으로 들어가시나?”
트링겐 시민들은 아딘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여론을 형성한 가운데, 희망과 불안이 함꼐하는 시선으로 아딘과 그가 이끌고 온 군대를 바라봤다.
‘이 사람들아, 아쉽게도 이곳에서는 내가 아닌 로제가 영웅이 될 거야.’
마차를 타고 영주 저택으로 가면서 아딘은 시민들의 시선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곳은 벨로디나면 족해. 게마인샤프트에서 영웅이 될 사람은 로제야, 내가 아니라.’
그렇게 아딘은 영주 저택으로 대신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아딘은 영주의 서재로 들어가 상석에 앉은 채 세 명의 대신과 루돌프 3세를 좌우에 앉히곤 회의를 열었다.
“현재 상황은 어떠한지 소상히 짐에게 아뢰거라.”
아딘의 말에 루돌프 3세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빠뜨리지 않고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고용한 용병만 2만입니다. 그마저도 이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일주일 전부터 2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
용병의 피로도, 점차 고갈돼 가는 자금, 불안에 지친 시민들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루돌프 3세의 입에서 나왔다.
“오늘 새벽, 정탐조로부터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유목민 놈들은 이미 서쪽 50km 지점에 장막을 친 상태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그는 유목민 왕조의 공격이 임박했으며 그 규모가 대략 기병 10만에 이른다는 것을 아딘에게 알렸다.
“유목민의 왕이 직접 행차했느냐?”
아딘의 물음에 루돌프 3세는 고개를 저었다.
“유목민 왕을 상징하는 노란 깃발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루돌프 3세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부하들이 정리하면 자기는 꽃길만 걷겠다는 심보지. 대충 사람 됨됨이를 알 만하겠어.”
하지만 그 말은 루돌프 3세에 의해 부정당했다.
“남쪽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아마 거기에 가 있을 겁니다. 유목민의 왕은.”
그러자 불카르 아시오게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제가 피식 웃었다.
“왕이 없다곤 하지만, 10만이나 되는 병력이라면 분명 중요한 인물이 이끌고 있을 겁니다. 군을 이끄는 자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까?”
빅토르 다비도프가 진지한 표정으로 루돌프 3세에게 물었다.
루돌프 3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슈타이너의 푸른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걸 보니, 분명 슈타이너의 본대일 겁니다.”
“슈타이너?”
“유목민 왕조의 동부 도시를 지배하는 자입니다. 도시를 점령할 때 가장 먼저 예쁜 처녀부터 찾는 변태 색정광이지요.”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와 불카르 아시오게 그리고 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의 뜻은 확고하노라. 이곳은 이제 벨로디나 왕국의 영토이며, 벨로디나 왕국의 영토에 허락없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명백한 전쟁이니라.”
그렇게 말문을 연 아딘은 시선을 빅토르 다비도프에게로 돌리고 명령했다.
“외무대신은 속히 사람을 보내 유목민 장수에게 짐이 이곳에 왕림했음과 짐의 뜻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리거라.”
그러면서 그는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한 가지 재량권을 주었다.
“만약 유목민 장수가 회담을 요청한다면, 장소와 시간은 외무대신이 직접 정하여 통보하라.”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아딘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짐이 이곳에 온 이상, 트링겐이 적들의 말발굽에 짓밟힐 일은 없을 것이로다. 짐은 결코 짐의 땅을 적들에게 내어주지 아니할 것이며, 짐의 국민이 적들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방관하지 아니할 것이다.”
아딘의 그 말에 루돌프 3세는 주름진 눈에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