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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48화 (148/175)

148 헌법과 천상의 신들 앞에서 (1)

광명력 994년 3월 1일.

콘스탄티노바, 크리미아, 노보로바야 기준 정오.

상트보가르 기준 정오에서 1시간 후.

드베르페르미야 기준 정오에서 3시간 후.

카판 대평원에 자리한, 드워프들이 임시로 세운 광산촌 기준 정오에서 1시간 전.

“천상의 신들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피고 계시는 선지자시여.”

콘스탄티노바 왕궁에 자리한 총대주교 성전에서 대대적인 정화 제의가 치러지고 있었다.

혁명 정부 요인 및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 1,500명은 직접 총대주교 권한대행 알렉세이 주교가 집전하는 제의를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총대주교 성전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도 콘스탄티노바 곳곳에 자리한 사원과 수도원에서 제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땅에 무너져 내린 정의와 신앙을 세우고자 흘린 피가 절규하오니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소서.”

그리고 총대주교의 말은 수정 구슬을 통해 벨로디나 전체로 실시간 전송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동방광명교 신자가 된 카판 대평원 광산촌의 드워프부터, 인구 200명의 드베르페르미야 주민들까지.

동방광명교의 신앙을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하지는 않는 쿠만족과 추상적인 관념의 천공을 숭배하여 자연스럽게 하늘의 신 아툰을 숭배하는 식으로 동방광명교를 받아들인 카판족 생존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시간에 제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다가올 새로운 왕국의 무궁한 발전과 영원한 평화 그리고 끝나지 않을 거룩함을 두고서 간구하오니, 이 나라를 굽어살피시옵소서.”

알렉세이 주교는 그렇게 기도문을 끝맺으며 제단 위에 놓인, 잘 손질된 어린 암송아지의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포도주를 살짝 부었다.

그리고 그가 뒤로 세 걸음 물러선 채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린 순간.

[번쩍-!]

마른 하늘에서 벼락 한 줄기가 어린 암송아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화르륵-!]

벼락을 맞은 어린 암송아지에 그대로 불이 붙었다.

그리고 불은 꺼지지 않은 채 오로지 제단 위에서만 하늘 끝까지 올라갈 기세로 타올랐다.

“오오…….”

“선지자시여…….”

“아툰이시여…….”

그 자리에 참여한 백성들은 물론 혁명 정부 소속 관료들까지 모두 두려운 마음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알렉세이 주교는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은은한 신성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신성력이 보임과 동시에 불꽃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던 찬양대가 현악기의 반주에 맞춰 정화의 장양을 부르기 시작했다.

‘마법?’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불꽃을 바라보던 빅토르 다비도프의 시선이 이내 아딘과 그 곁에 앉은 로제에게로 옮겨졌다.

로제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딘은 꽤나 엄숙한 경건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가만히 양손을 하늘 높이 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것조차도 연출이란 말입니까? 당신의 독재를 위한?’

그 순간, 로제와 빅토르 다비도프의 시선이 마주쳤다.

싱글벙글 웃던 로제는 정색하며 자기 검지를 자기 입술에다 갖다 붙였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다시 제단으로 돌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정확하게 그것을 조종해 제단 위 암송아지에게 떨어뜨리는 통제력, 제단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타오르는 불꽃…….’

빅토르 다비도프도 나름 한 가닥 하는 마법사였다.

아딘에게는 우연히 게마인샤프트에서 구했다고 거짓말했지만, 엘프숲 인근 버려진 신전에서 찾은 수정 구슬을 다시 활성화해 사용할 만큼 제법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러나 그의 능력으로는 조금 전 로제가 보인 연출을 결코 재연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의, 가히 대마법사, 아니 대마법사 이상의 대마법사라 불릴 소녀를 두고 있는, 온갖 신비로운 무기로 무장한,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 그리고 군사적 권위를 갖춘 군주…….’

이제는 확실히 자신이 꿈꾸었던 혁명 지도자, 민중 통합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할 국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진 아딘의 지위를 실감하며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선지자시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그렇게 혁명에서 흘린 피에 대한 정화 제의는 천계의 신들이 벼락을 통해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을 남긴 채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 * *

혁명 정부가 해산하고, 정식 정부가 들어선다면 그 체제는 어떤 체제인가?

그 정부의 수장은 어떠한 지위를 가지며, 어느 정도의 권력을 향유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 자리에 오를 것인가?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혁명중앙위원회 소속 총괄위원들은 물론, 일선 행정관 그리고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부자부터 빈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암묵적으로 단 한 사람만을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정화 제의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 3월 3일 오후에 혁명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왕국 헌법 초안이 공개됐을 때, 빅토르 다비도프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의장님…… 이건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당혹스러워하는 시선부터 불편해하는 시선 그리고 분기를 품은 시선까지.

대체로 호의적이지 않은,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그 눈빛들의 집중을 묵묵히 넘기며 빅토르 다비도프는 말했다.

“헌법에 따르면 국왕의 지위는 국가의 상징입니다. 뒤따르는 항목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게 재확인되고 있습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봤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여기, 이 국가기관 항목을 보면, 자칫 국왕의 상징적 지위를 해치고 국왕에게 막강한 독재권을 줄 수 있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빅토르 다비도프는 국가원로자문회를 문제삼았다.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은 왕실 규례에 따라 모든 유산을 이어받은 이가 맡으며, 그 임기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종신이다. 이 부분은 분명 문제가 될 부분입니다.”

어차피 이대로 아딘이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의 권력을 견제할 수 없을 터였다.

가장 작은 마을 단위부터 도시, 지역 그리고 최종적으로 국가 전체에 이르기까지 구성되는 평의회도, 평의회의 동의를 받아 국왕이 구성하는 내각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재판부도 아딘을 견제할 수 없다.

그에게 주어진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권위는 그런 제도나 기구들로 어떻게 침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딘 콘스탄틴이 죽으면, 그 이후부터는 어떻게든 그 권력이 약화될 것이다.’

그랬기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좀 더 멀리 보기로 했다.

적어도 아딘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는 헌법을 초월한 지도자가 되겠지만, 그가 죽고 그의 후손이 왕위를 잇는다면 분명히 헌법적 통제가 가능해질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아버지로부터 왕관만 물려받을 뿐인 2세로부터는 아버지가 지닌 종교적, 정치적, 군사적 권위를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조금만 참자고.

그렇게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왕국 헌법에 명시된 국가원로자문회와 그 의장직에 관한 조항은 그의 꿈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혁명의 대의는 민중을 위한 국가의 건설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이전에 없던 헌법이란 것을 만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권력의 한계를 정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헌법적 권한을 초월할 가능성이 있는 기구를 두고, 그 기구의 장으로 세습 군주를 둔다는 것은 혁명의 근본을 배신하는 행위나 다름 없습니다.”

다소 강한 빅토르 다비도프의 어휘에 일순간 회의실 내에 찬 바람이 불었다.

스스로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위원들은 물론, 주요 4인방에 속하는 안톤과 불카르 아시오게, 로제도 굳은 표정으로 빅토르 다비도프는 노려봤다.

심지어 인간의 정치에 무관심한 팔키르마저도 상당히 당황한 표정으로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봤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아딘만이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아딘에게 빅토르 다비도프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국가원로자문회는 국가평의회나 내각, 재판부 등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통제받지 않는 곳입니다. 위원의 자격도 추상적인데다 무엇보다도 어떤 기준으로 누가 어떻게 임명하겠다는 조항이 없습니다. 이건 분명 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독소 조항입니다. 이 부분은 헌법 최종본에서 빼야 합니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을 들으며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기세로 자신을 바라보는 빅토르 다비도프를 향해 이야기했다.

“국가원로자문회는 그저 자문 역할만 하는 곳입니다, 외무총괄위원. 국가평의회처럼 법률을 만들거나 심의하는 곳도 아니고, 내각처럼 법률을 집행하는 곳도 아니며, 재판부처럼 법률을 해석해 판결을 내리는 곳도 아닙니다. 그저 전반적인 국가 지도에 관하여 원로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자문을 하는 기구일 뿐입니다.”

“그 자문이 헌법을 초월한 명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문회의 뜻이 통일된다면 모를까, 다양한 배경을 지닌 노인들로 구성된 자문회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의장은 종신직이며, 심지어 그 지위가 국왕 아닙니까?”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외무총괄위원께서는 헌법 조항을 제대로 읽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아딘은 한 부분을 가리켜 읽었다.

“만일 왕실 규례에 따른 적합한 후보가 없다면, 의장직은 공석으로 한다.”

그의 시선이 다시 빅토르 다비도프에게로 향했다.

“이 정도 조항이면 우려는 충분히 불식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만.”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저었다.

“왕실 규례에 따른 적합한 후보. 그 기준이 모호한 이상,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빅토르 다비도프는 왕실 규례를 끄집어냈다.

“신의 가호를 받아 성검의 주인이 된 자는 국왕의 지위뿐 아니라 왕실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다. 이 문구 그 어디에도 객관적이고 명확한 기준은 없습니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불멸의 검을 그대로 뽑았다.

황금빛 찬란한 광휘가 일순간 회의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 찬란한 황금빛도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이진 못했다.

“의, 의장님…… 이, 이게 무슨…… 회, 회의 중입니다. 카, 칼을 뽑으시는 건……”

빅토르 다비도프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아딘을 불렀다.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여전히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걸치고 있던 아딘은 그런 빅토르 다비도프를 가만히 응시했다.

명백하게 살기라고 할 만한 기세는 없었지만, 그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시선이 빅토르 다비도프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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