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45화 (145/175)

145 새로운 벨로디나 (3)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헨리 피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크리스티나 콘테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정부군 설립이라…….”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정부치안대입니다.”

“어쨌건요. 공화국 수립 이후 민병대가 용병이 되고, 용병이 치안과 국방을 도맡은 전통 중 하나가 무너지는 건데…… 단순하게 이건 상단 총수들만이 아니라, 원로원의 늙은 것들로부터 일반 시민에게까지 광범위하게 동의를 받아내야 할 거예요.”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아무리 3대 상단이 공화국 중앙 정치를 좌우한다고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원로원을 완벽한 거수기로 쓰지는 못한다.

또한 지방에는 3대 상단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도 있으며 그곳에 자리한 유지들을 설득할 필요도 있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린 헨리 피셔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 크리스티나 콘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혹시 이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장기적인 독극물을 만들어내는 건 아닌가?

과연 다른 총수들이나 원로원 의원, 지방 유력자들이 동의할까?

용병이 과잉 공급되면 그건 그거대로 또 다른 문제를 낳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어쨌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헨리 피셔의 구상 중 하나가 3대 상단 총수 중 하나에게 승인을 받았다.

* * *

‘마정석이라……’

아딘은 곰곰이 옛일을 떠올려 보았다.

초창기, 세계관 설정을 짜던 김현수의 기억에서, 아딘은 비로소 마정석을 발견해냈다.

‘이것도 약간 맥거핀화 된 설정이란 말이야.’

광명력 993년 11월 26일 늦은 밤.

겨울 궁전 서재에 홀로 앉아 두루마리를 통해 마정석의 매장 위치를 탐색하던 아딘은 맥거핀으로 둔 장치들이 하나둘 자기 눈앞에 현실로 다가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왜 마정석 매장 지역을 여기로 국한했을까?’

아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두루마리 위에 뜬 지도를 확인했다.

지도는 벨로디나 북동부 페름 지방과 카판 대평원 남부 그리고 게마인샤프트 북부와 렝고스 전역 곳곳에 대량의 마정석이 매장돼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쨌건 당장에 작업하기에는 좋네.’

벨로디나 북동부 페름 지방의 경우 사람 자체가 살지 않는 곳이었던 만큼, 당장에 개발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터였다.

그러나 카판 대평원 남부의 경우에는 그래도 한때 카판족이 살던 곳이었던 만큼 그리고 지금도 벨로디나와 게마인샤프트 사이를 오가는 사람의 행렬이 있는 만큼, 개발이 용이했다.

‘만약 내가 팔키르와 로제에게 준 아이디어가 마정석의 힘으로 상용화된다면, 마정석은 이 세계의 석유가 될 거야.’

그리고 그 마정석 채굴과 가공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할 터였다.

‘이건 절대로 엄한 곳에다 넘겨서는 안 돼.’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 눈에 들어오는 콘스탄티노바는 오늘 오전부터 오후까지 내린 함박눈에 덮여 있었다.

달빛을 반사하는 눈을 바라보며 아딘은 생각했다.

‘내 뒤를 이어 벨로디나의 왕이 될 아이가 불멸의 검으로부터 선택을 받든, 그렇지 못하든, 최소한 누군가로부터 무시는 안 당해야 해.’

아딘의 구상에 따르면, 만약 그의 자식이 혹은 그의 뒤를 이을 누군가가 불멸의 검을 뽑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국가의 상징 역할만 하는 왕의 자리가 돌아갈 것이다.

그 어떠한 정치적 실권도 없이, 모든 정치를 내각과 각종 의회에 넘기는,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국왕은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할 그런 위치에 있어서는 또 안 된다는 게 아딘의 생각이었다.

‘마정석 채굴과 가공 그리고 유통을 단 하나의 기업에 맡기고, 그 기업의 대주주가 왕이 된다면, 설혹 불멸의 검을 뽑지 못해 정치적 실권을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각이나 의회로부터 무시를 당하지는 않겠지.’

무엇보다도 마정석이 향후 석유처럼 된다면, 이는 전략 물자가 된다는 소리고, 전략 물자는 반드시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 아딘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러시아도 석유와 천연가스는 국영기업에서 통제했잖아.’

아딘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두루마리를 말아 집어넣고, 백지를 꺼낸 다음 깃펜에다 잉크를 찍은 후 자신의 구상을 마구잡이로 서술하기 시작했다.

그림, 문자 그리고 정체불명의 기호가 뒤섞인 구상안 초안은 1시간에 걸쳐 완성됐다.

그리고 그것을 완성한 후 아딘은 곧장 새 종이에다 정갈하게 항목별로 조목조목 마정석 통제에 관한 구상을 서술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정이 지나 11월 27일이 됐을 때, 아딘은 자신의 구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됐어.’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구상이 적힌 종이를 바라봤다.

‘벨로디나 광업공사. 딱 좋네.’

평범한 이름이지만, 평범하지 않을 기관에 대한 관념을 바라보며 아딘은 그렇게 새로운 벨로디나에 대한 구상을 하나씩 구체화 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 * *

유리 콘스탄틴은 죽었지만, 혁명재판소의 재판은 예정대로 열렸다.

민중 가운데 선출된 배심원과 혁명중앙위원회 법무총괄위원이 임명한 재판관들로 구성된 혁명재판소에는 제니스에 부역한 귀족들이 피고인으로 섰다.

귀족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세상이 변한 것을 실감하지 못해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난동을 피웠다.

일부는 세상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며, 어떻게든 목숨이나마 부지하고자 자신과 타인의 죄를 모두 고자질하며 선처를 구했다.

그리고 일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담담하게 재판관의 질문에 솔직하게 응답했다.

“메로네프 공작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시키고…… 저에게 왕자를 임신한 거라 알리게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중 압권은 왕후의 재판이었다.

“유리 콘스탄틴은…… 선천적으로 남성의 기능을 하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 아이는 콘스탄틴 가문의 아이가 아니라…… 메로네프 가문의 아이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얼마 전 태어난 아이의 목숨을 살리고자 모든 것을 실토했다.

“저는 단지…… 메로네프 공작이 시켜서…… 모든 것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부디…… 선처를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수척해진 모습으로 재판정에 나타난 왕후의 고백에 재판관과 배심원은 모두 분노했다.

그러나 그 분노의 방향은 사람마다 달랐다.

“배은망덕한 자식! 어떻게 왕을 속이고, 왕가에 자기 피를 섞으려 한 거지? 이게 사람인가?”

“제니스에 부역하는 걸 넘어서 이거는 벨로디나 왕국의 근본을 뒤엎는 발상이고 행위야!”

“메로네프를 죽여! 그 일가 모두!”

한 부류는 분노를 메로네프 공작가로 돌렸다.

이미 여러 혐의에서 유죄가 입증돼 사형이냐 종신형이냐 형량 선고만 남은 메로네프 공작 일가에 대한 분노는 곧 그들의 형량이 사형으로 기울어지게끔 만들었다.

“감히 하녀 주제에 왕을 능멸하고, 왕실을 욕보여?”

“하녀가 분에 넘치게 왕후가 됐다면 그것에 만족해야 하거늘, 어찌 다른 이의 씨앗으로 왕가의 혈통을 뒤집으려 한단 말인가!”

“가을 궁전 시종들의 말을 들으니 패악질이 엄청났다고 하더이다. 저년에게도 사형이 필요하오!”

다른 한 부류가 내뿜는 분노는 왕후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메로네프 공작의 하녀 출신이라 하더라도, 그녀 또한 왕을 속이고, 왕실의 혈통을 더럽히려 했다는 책임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하녀가 주인 시키는 대로 한 건데 하녀한테까지 사형은 너무한 거 아니요?”

“하녀 따위가 왕실을 능멸한 죄는 분명 사형감이오!”

메로네프 공작가에 분노를 돌리는 쪽은 대체로 중산층과 하층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었다.

그리고 왕후에게까지 분노를 돌리는 쪽은 중상층 관료 출신 및 구 귀족 출신으로 구성된 일부 배심원단과 다수 재판관들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둘 다 나쁜 것들이니 그냥 다 죽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소수가 그런 의견을 펼쳤지만, 대체적으로 혁명재판소는 메로네프 공작가만 처단하자는 쪽과 왕후까지도 처단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재판소 내 의견 대립에 관한 보고는 빠르게 아딘의 귀에 들어갔다.

* * *

12월 1일 정오.

봄의 궁전 혁명중앙위원회 회의실.

의장 아딘의 주재하에 열린 혁명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왕후에 대한 판결이 안건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현재 재판소 상황은 이렇게 의견이 양쪽으로 나뉜 상태입니다.”

법무총괄위원이 왕후에 대한 이견을 보고하고 자리에 앉자 여기저기서 침음성과 헛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거 참…… 어이가 없구만.”

불카르 아시오게가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입을 열었다.

“왕이랍시고 허수아비를 앉혀놓은 것도 모자라, 그것도 안 되는 고자한테서 씨를 얻었다고 거짓을 이야기해? 허허, 이것 참…… 그간 우리더러 야만인이니 뭐니 해놓고 정작 자기들은 진짜 야만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구만?”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군무총괄위원 말씀대로입니다. 이는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비록 그녀가 메로네프 공작의 하녀였다곤 하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메로네프 공작의 혈족이자 왕후였습니다. 충분히 메로네프 공작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톤의 말에 어느새 자리가 빅토르 다비도프 맞은편으로 격상된 로제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요. 콘스탄틴 왕가를 더럽히려 한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없어요.”

그때, 잠자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빅토르 다비도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엄연히 계급 격차가 있는 상황에서 발생했던 일 아닙니까? 대외적 지위보다는 대내적으로 왕후에겐 메로네프 공작이 상전이라는 인식이, 메로네프 공작에게는 왕후가 하녀라는 인식이 더 강했을 겁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왕후는 상전에 의해 강제로 육신이 범해진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왕후마저 죽일 경우, 혁명의 성격이 지나치게 무자비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저도 외무총괄위원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현실적으로 혁명 정부가 다스리는 벨로디나에서도 시골 지역에 보면 여전히 종과 상전의 관계가 관습적으로 남아 있질 않습니까? 공작과 그 하녀의 관계에서, 아무리 하녀가 겉치장으로 왕후니 뭐니 자리를 가지게 됐다고 해도, 상전의 말을 거부할 순 없었을 겁니다.”

치안총괄위원이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동조했다.

뒤이어 식량총괄위원과 재무총괄위원도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동조했다.

“그래도 어쨌건 왕후도 제니스의 부역자 중 하나인데 마냥 죄가 없다고 하기도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형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형은 불가피하다 생각합니다.”

“하녀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 점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왕후의 자리에서 가을 궁전 시녀들에게 함부로 한 것도 있고 한 걸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의 형 집행은 불가피하겠지만, 사형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안총괄위원과 조세총괄위원이 절충안을 내놓았고, 팔키르는 자기가 뭘 아느냐며 발을 뺐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딘에게로 쏠렸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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