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새로운 벨로디나 (1)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세 남자는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리오 드라기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마르코 루비오도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집정관 헨리 피셔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눈빛으로 크리스티나 콘테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 세 남자를 바라보며 크리스티나 콘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미아에서 농성한 지도 벌써 반년 가까이가 됐어요. 그간 들어간 비용을 생각하면, 이제는 확실하게 노선을 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매몰비용 처리하고 완전히 철수하든, 아니면 이왕 돈이 들어간 거, 더 큰 돈을 부어서 더 많은 군대를 모아 확실하게 쓸어버리든. 어떻게든 이젠 결론을 내려야 할 때예요.”
다소 극단적으로 들리긴 했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콘테 총수 말이 맞긴 맞수다. 지금 우리 쪽 용병만 해도 7천이 크리미아에 묶여 있는데, 부총수 말로는 걔들 본국으로 돌아오면 단체로 파업할 기세라고 합니다. 이미 사직서를 품에 넣어 둔 베테랑들도 많고.”
마르코 루비오의 말에 마리오 드라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심지어 이미 우리 쪽 부총수한테 사적서 내고 무작정 배 타고 떠나려는 것들도 생겨났다고 하더이다.”
크리스티나 콘테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사공 가운데 상당수가 가족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다며 불안해한다는 보고가 부총수를 통해 올라왔으니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확실하게 자기 주장을 다시 한번 더 역설했다.
“그러니 이제 우린 결단해야 해요. 더 큰 돈을 쓰느냐, 이미 쓴 돈을 없는 셈 치고 철수하느냐.”
그 대목에서 두 총수들은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티나 콘테의 시선이 헨리 피셔에게로 향했다.
“집정관님은 혹시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가요?”
그녀의 지목에 두 총수의 시선도 헨리 피셔에게로 향했다.
헨리 피셔는 물을 한 모금 넘긴 후 입을 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벨로디나가 저렇게 건재한 이상 더는 크리미아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긴 합니다. 솔직히 벨로디나가 공화국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도 아니고. 다만…… 그곳에 공화국 시민들이 투자한 자산이 있고 그것들이 현재 부당하게 몰수된 상황이란 게 문제긴 합니다.”
사족을 붙였지만, 헨리 피셔의 의견은 철수 쪽에 가까웠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마리오 드라기와 마르코 루비오를 향해 말했다.
“몰수 자산 문제에 관해서는 외교적으로 계속해서 부당함을 알려야 해요. 신생 벨로디나 정부는 한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을 건데,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을 시킨다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보상할 수밖엔 없겠죠.”
그녀의 말에 두 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군을 철수하고, 외교적으로 저들을 봉쇄하는 거예요. 모든 교역을 막는 거죠. 현재 슈드 자치령부터 벨로디나까지 운항하는 선박의 9할이 콘테 상단 소유이니 봉쇄령은 구태여 공화국 차원에서 하지 않더라도 충분할 거예요.”
그녀가 말을 끝마치자 마르코 루비오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이제 돌아오는 용병들을 어떻게 달래느냐, 그리고 앞으로 몸값을 올리려고 발광할 용병들을 어떻게 억제하느냐인데…….”
“흐음…… 맞는 말이외다. 용병들이 아주 콧대가 하늘을 찌를 기세가 됐단 말이지.”
마리오 드라기가 동조하자 크리스티나 콘테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코 루비오는 미소를 지으며 헨리 피셔를 바라보며 물었다.
“집정관께서는 적절한 해법을 갖고 계시오?”
그 물음에 헨리 피셔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차례 크리스티나 콘테를 바라본 후 조심스럽게 이야기헀다.
“그 부분에 관하여서는 일단 급한대로 원로원에 용병 임금 상한제를 규정한 법안을 제출해 둔 상태입니다. 그것만 통과된다면 당장 급한 불은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억지로 누르기만 한다고 그 무식한 놈들이 마냥 가만히 있겠나?”
마르코 루비오의 말에 헨리 피셔는 다시 한번 더 크리스티나 콘테의 눈치를 살핀 후 이야기했다.
“일단 보다 심도 깊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에 관하여서는 조금 더 고민을 해보고 답변드리겠습니다, 총수님.”
그 말에 마르코 루비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오 드라기가 팔걸이를 톡톡 치며 말했다.
“뭐, 회의는 이 정도만 하지.”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는 끝났다.
* * *
광명력 993년 11월 8일 이른 아침.
아딘은 자신의 집무실로 불카르 아시오게를 불렀다.
“어쩐 일로 아침부터 날 찾는 겁니까, 의장님?”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군무총괄위원님께 따로 지시할 사항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겸사겸사 같이 조식이라도 들면 더 좋고 말입니다.”
“하하하. 지시 사항이라…… 회의실이 아니라 여기서, 위원들 모두가 모인 자리가 아니라 의장님과 나 이렇게 단 둘이서만 있는 자리에서 내리는 지시 사항이라면 굉장히 뭔가 비밀을 요하는 것인가 봅니다?”
그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장 지시 사항을 하달하기 시작했다.
“이르면 일주일 뒤에 크리미아에 주둔 중인 제니스 공화국 용병들이 모두 본국으로 퇴거할 겁니다.”
아딘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가 눈을 크게 떴다.
아딘의 말이 이어졌다.
“완전한 철수입니다. 아마 한동안, 아니 어쩌면 영원히 저들은 이 땅을 밟지 않을 겁니다.”
아딘은 두루마리 하나를 불카르 아시오게에게 건네주었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그것을 받아 펼쳐 보았다.
크리미아의 상세한 지형도와 주요 거점의 위치가 묘사된 지도였다.
“제가 명령을 내리는 그 순간, 이곳에서 출병하십시오. 민병대도 좋고 쿠만족 전사도 좋습니다. 5천을 모아서 크리미아로 가십시오. 그리고 그곳의 거점들을 모두 점거하십시오. 크리미아는 무정부 상태를 거치지 않고서 빠르게 정당한 정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될 겁니다.”
아딘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장께서 그리 명하신다면야, 당연히 따라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물었다.
“그런데…… 그 정보는 어떤 경로로 입수하신 겁니까?”
그 물음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던질 뿐이었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가 밖으로 사라지자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곧 두루마리 위로 제니스 공화국 지도부의 생각들이 카테고리처럼 잘 정리가 돼 떠올랐다.
“집정관 헨리 피셔…… 재미있는 사람이네?”
그가운데 아딘이 주목한 사람은 헨리 피셔였다.
“뭐, 나쁘진 않겠지. 이런 사람 하나 정도 있는 것도.”
아딘은 곧 시선을 크리스티나 콘테에게로 돌렸다.
“드라기 상단과 루비오 상단을 누르고 제1상단으로 우뚝 서고 싶은 욕망…… 뭐, 지극히 자본가다운 발상이고 나쁜 꿈은 아닌데…… 그 방법이 잘못됐어. 하필 그 방법으로 고른 게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늑대니까.”
아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니스 공화국은 당분간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못할 거야.’
본래 김현수의 설정에 따르면, 제니스 공화국은 유리 콘스탄틴을 앞세워 벨로디나를 괴뢰국으로 만든 후 승승장구할 예정이었다.
그 배경에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물류 유통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끈, 주인공의 아버지 프랭클린 하이로드의 천재적인 경영 덕이었다.
그러나 빙의한 현실에는 하이로드 가문 자체가 없었고, 그 자리를 대체한 루비오 가문은 금융이나 유통에 관하여 원래의 하이로드 가문보다 못한 자들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내적으로 굉장한 압박에 시달리겠지. 때마침 라인하르트가 의외의 활약을 해준 덕에 게마인샤프트 용병의 몸값도 덩달아 올랐으니까.’
즉, 당분간 제니스 공화국은 벨로디나 안보에 큰 위협이 되진 못한다는 것이었다.
‘남은 문제는 샤펠 제국이야.’
아딘의 상념이 샤펠 제국으로 옮겨갔다.
곧 두루마리 위로 샤펠 제국 지도와 함께 최근의 정세에 관한 보고가 한줄 뉴스 형식으로 떴다.
‘결국 북부마저도 황제가 직할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어. 저항하는 귀족도 있지만, 힘으로 눌러 버렸군.’
아딘의 상념이 곧 황제에게로 옮겨졌다.
샤펠 제국에서 샤를이란 이름을 가진 11번째 황제, 샤를 드 퐁피두.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이 젊은 황제는 샤펠 제국의 지존이라는 지위 외에도 묵시록 종단이라는 비밀 종교 집단의 교주라는 직책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종단은 김현수의 창조물이 아니다.
‘분명 자기 측근이 내게 죽은 것을, 최소한 이 땅에서 증발한 것을 알고는 있을 거야. 그럼 저 칼끝이 언젠가는 동쪽으로 향한다는 건데…….’
제니스 공화국과는 달리 샤펠 제국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일단 제니스 공화국과는 체급부터가 달랐다.
‘제니스의 인구는 700만 정도고 벨로디나의 인구가 1000만 정도지. 하지만 제국은 무려 2000만이야. 슈드 자치령까지 합하면 2500만이 넘어가고.’
무엇보다도 샤펠 제국은 중앙 집권화가 거의 완료된 절대주의 국가다.
황제의 명이면 순식간에 상비군 30만이 움직이며, 황제가 의지를 가지면 전 국토에서 징집병 100만을 차출할 수 있다.
물론 그 정도까지 징집해 버리면 경제에 큰 타격이 오겠지만, 그만큼 제국은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라는 의미였다.
‘북부가 확실하게 안정이 된다면, 황제의 칼날은 반드시 동방으로 향한다. 그전까지 어떻게든 나름의 대책을 세워야 해.’
아딘은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의 새 카반드 왕조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딘의 상념이 곧 라인하르트에게로 이동하자 두루마리 위로 그에 관한 정보 그리고 카반드 왕조에 관한 정보가 떠올랐다.
“호오? 확인 안 한 사이에 많이 컸네?”
드넓은 게마인샤프트 평원.
그곳의 중심부와 남부 일대가 모두 카반드 왕조의 강역으로 지도에 표시돼 있었다.
두루마리 위에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실제 카반드 왕조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영역이 그만큼이라는 것이리라.
아딘은 씩 웃으며 머릿속으로 몇 가지 구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구상들이 제 모습을 갖추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됐어. 이렇게 가면 순조롭게 다 진행이 되겠어.’
아딘은 두루마리를 주머니에 집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창가로 가 찬란한 태양 아래 빛나는 콘스탄티노바를 바라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전쟁은 판을 뒤집지. 이번 전쟁은 제니스 공화국을 당분간 외부로 뻗어나가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했고.’
동쪽에서 태양의 뒤를 바짝 따라 붙는 먹구름을 바라보며 아딘은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샤를 11세의 북방 정복은 또 다른 영향을 역사에 끼치게 되겠지. 압도적으로 강해진, 국내에 견제 세력이 전혀 없는 왕권하에 과연 샤펠 제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무리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딘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건 샤를 11세가 얼마나 미친놈이냐에 따라 갈리겠지.’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