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42화 (142/175)

142 밀수 (2)

“약속한 물량, 단 한 톨의 오차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광명력 993년 7월 13일 늦은 오후.

식량총괄위원의 보고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총괄위원은 아딘에게 가볍게 묵례한 후 자리에 앉았다.

아딘의 시선이 로제에게로 향했다.

“정보총괄위원은 수고했습니다. 며칠 휴식을 취하고, 다시 트링겐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아딘의 말에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딘은 마저 웃어준 후 위원들을 쭉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로써 현재 남아 있는 곡물과 새로 들어온 곡물을 합쳐서 늦가을, 조금 아끼면 초겨울까지는 버틸 만큼의 물자가 마련이 됐습니다. 앞으로 수레는 세 차례 더 들어옵니다. 그러면 내년 가을, 추수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마련되는 겁니다.”

아딘의 시선이 팔키르에게로 향했다.

“기술총괄위원.”

아딘의 입에선 벨로디나어가 나왔다.

그것은 곧 로제의 마법에 의해 드워프어로 변환돼 팔키르의 귀로 들어갔다.

“말씀하시옵소서.”

“일전에 이야기했던 장치는 어디까지 개발이 됐습니까?”

“뼈대는 개발이 됐사옵니다. 다만, 이게 어느 정도 충격파까지를 견디느냐가 관건인데…… 그 부분에 대해선 아직 무어라 확답을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어차피 식량이 확보된 이상, 소모전으로 가면 피곤해지는 건 제니스 공화국이니 말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결과물을 도출해 구…… 의장님께 보여드리겠사옵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그의 시선이 빅토르 다비도프에게로 향했다.

“공화국 측으로부터 별도의 연락은 없습니까?”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7월 20일 정오에 데오그라드에서 만나자는 말 빼고는 따로 없습니다.”

“저쪽도 슬슬 지쳐갈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들은 아마 우리가 지치길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자기들이 식량줄을 꽉 막아두면 알아서 내부에서 무너질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요.”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수고했다 손짓한 후 불카르 아시오게를 바라봤다.

“신병 훈련은 잘 돼 가고 있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정도로 잘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내년 봄이면 5만 명의 정예 강병들이 무기를 쥐고 이 땅을 지키게 될 겁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만히 눈치를 보던 법무총괄위원이 손을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법무총괄위원.”

“저…… 혁명재판소 구성이 끝났습니다.”

그 말에 식량 확보 및 상비군 육성에 관한 긍정적 소식으로 살짝 들떠 있던 회의실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흐음……”

“크흠……”

여기저기서 헛기침과 가벼운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딘 또한 진지한 표정으로 법무총괄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일정에 따라 재판을 시작하십시오.”

그 말에 법무총괄위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7월 14일 아침.

콘스탄티노바 왕궁 가을 궁전.

드넓은 방에서, 방문을 넘지 못하도록 연금 조치를 당한 채 생활하던 유리 콘스탄틴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스스로를 법무총괄위원이라 칭했다.

“혁명재판소가 설치됐습니다.”

이제 겨우 40대가 됐을까 싶은 법무총괄위원의 말을 유리 콘스탄틴은 가만히 그를 등진 채 시선을 창밖에 두며 들었다.

“재판 일정대로 일주일 후인 7월 21일 정오부터 재판이 시작될 것입니다.”

법무총괄위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 이내 크게 심호흡한 후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그날 가장 마지막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폐하를 심문할 사람은 사제, 농민, 광부, 상인을 대표하는 재판관들이 할 것이며, 판결은 다섯 차례의 변론 끝에 이르면 8월 말, 늦으면 9월 중순에 일반 민중 가운데서 추첨으로 뽑은 혁명 배심원단이 유무죄를 판단해 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유죄가 떨어질 경우, 구체적인 형량은 재판관들이 정할 것이라고 법무총괄위원은 말했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리 콘스탄틴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날더러 찬탈자라고들 이야기하지. 찬탈자 유리 콘스탄틴. 그게 일반적으로 날 지칭하는 말인 걸로 알고 있어.”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법무총괄위원을 바라봤다.

“그런데도 자네는 날 폐하라 부르는군. 어째서 그러는 건가?”

그 물음에 법무총괄위원은 주먹을 꽉 쥔 채 답했다.

“비록 외세의 힘을 빌려 조카를 죽이고 교회를 짓밟은 패악 끝에 집권하셨지만, 그래도 폐하는 콘스탄틴 왕실의 일원이십니다. 공식적으로 폐하의 존재는 역사에서 지워질 것이고, 지난 1년은 제니스 강점기로 다뤄질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와 대면하는 이 순간만큼은, 적어도 폐하를 폐하라 칭함으로써 예우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유리 콘스탄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일 다 봤으면, 나가보게.”

법무총괄위원은 가볍게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하아…… 제니스 강점기라…….”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 왕궁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문득 죽은 아버지, 제17대 국왕 일리야 3세가 생전에 했던 말들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욕심을 버리거라.]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진다.]

[왕관은 그 무게를 버티는 자에게 허용되는 것이다. 그것을 버티지 못하는 자는 왕관의 무게에 목이 부러져 죽을 것이다.]

[네 형을 잘 따르거라. 네가 내 말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행한다면, 네 형은 널 평생, 영원히 보살펴 줄 것이다.]

유리 콘스탄틴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끅끅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크흐흐흡…….”

그리고 그의 웃음은 이내 눈물로 변했다.

“죄송합니다…… 아바마마…….”

그렇게 그는 하염없이 울음으로 아침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석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 시종은 커튼을 엮어 만든 끈으로 목을 매단 채 죽은 유리 콘스탄틴을 발견했다.

* * *

“죄송합니다.”

치안총괄위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항상 신경을 쓴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품에서 인장을 꺼내 슥 내밀었다.

“모든 책임을 지고 총괄위원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제야 아딘은 그를 바라봤다.

아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인장을 도로 치안총괄위원에게로 밀어 넘겼다.

“됐습니다. 이게 어디 치안총괄위원 탓입니까? 이런 일 하나로 사임하기에는 그 직이 지닌 무게가 그리 가볍진 않습니다.”

“하, 하지만…….”

“넣어 두십시오.”

그러고나서 아딘은 안톤을 바라봤다.

“내무총괄위원께서는 최대한 간소하게 유리 콘스탄틴이 장사지낼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래도 어쨌건 왕족인 만큼, 성대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사제가 명복은 빌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안톤은 고개를 팍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그럼 다들 나가십시오. 머리를 좀 식히고 싶으니까.”

아딘의 말에 안톤과 법무총괄위원은 그에게 인사한 후 의장 집무실에서 나갔다.

아딘은 가만히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 콘스탄틴의 자살이라…….’

이건 두루마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긴 두루마리야 실시간 정보 내지는 확정 정보를 알려주는 도구지, 미래 정보를 알려주는 도구는 아니잖아.’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어둠이 내리깔린 왕궁과 그 너머 콘스탄티노바를 바라보며 아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라면 딱 여기까지나 내가 이루려던 목표의 전부인데…….’

처음 영문도 모른 채 아딘 콘스탄틴에 빙의됐을 때, 그리고 생전 처음 받아보는 온갖 끔찍한 고문과 더러운 모욕에 노출됐을 때, 아딘은 결심했다.

유리 콘스탄틴에게 복수하겠다고.

자신이 받은 고통, 그 이상을 그에게 전하겠다고.

그리고 지금, 그 이상의 고통을 주지는 못했지만, 유리 콘스탄틴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즉, 복수는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뭐…… 이젠 복수가 전부가 아니게 됐으니까.’

두루마리는 김현수가 설정해둔 내용 및 현재 이 세계에서 돌아가는 일들의 실시간 정보와 확정 정보만을 알려준다.

어떻게 하면 다시 김현수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진 않았다.

즉,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현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멸의 신전으로 들어가기에는…… 아직 난 젊잖아?’

아딘 콘스탄틴의 나이, 20대 초반 그리고 김현수의 나이 30대 초반.

어느 쪽이건 여전히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다.

그리고 이 나이에 불멸의 신전처럼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룡이나 찾아오는 오지로 가는 것은 성정 면에서나 사회적 욕구 측면에서나 맞지 않았다.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그날까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그리고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면, 최대한 주변 정리를 한 후에 떠나리라 생각하며 아딘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감상에 빠져 있기엔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 * *

제니스 공화국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추수할 시기가 지나고 점차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광명력 993년 11월 초였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데오그라드에서의 협상을 질질 끌며 최대한 벨로디나를 고사시키려던 제니스 공화국의 계획은, 벨로디나가 전혀 고사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완전히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게마인샤프트를 통해 벨로디나로 대규모 식량이 공급됐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잭슨 가문이 모든 식량을 보낸 후 그간의 흔적들을 다 지워버린 뒤였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광명력 993년 11월 7일 정오.

자신의 저택 서재에서 마리오 드라기는 의자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성질을 냈다.

“도대체 어떤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적국에 식량을 반출했어!”

그러면서 그는 헨리 피셔를 노려봤다.

3개월 차 최연소 신임 집정관 헨리 피셔는 목청을 가다듬고는 이야기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해서 추적해 봤습니다. 하지만 전부 유령 상단이었던 데다가, 그마저도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려서 더 이상 추적은 하지 못했습니다.”

“등록지가 있을 거 아니요! 유령 상단 등록지를 뒤지면 뭐라도 나올 거 아니냔 말이오!”

“그 등록지들을 다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상단 본부로 신고된 곳은 전부 허허벌판 아니면 폐가거나 버려진 창고였습니다. 그나마도 사람이 쓴 흔적은 불에 타 없어졌기 때문에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헨리 피셔의 말에 마리오 드라기는 그저 신경질적으로 콧김만 씩씩 뿜어낼 뿐, 달리 말을 잇질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크리스티나 콘테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됐어요.”

그러자 세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로 쏠렸다.

“전쟁을 하거나, 그냥 물러나거나.”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