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밀수 (1)
“허. 혁명을 일으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내분이……”
마리오 드라기는 조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그에게 마르코 루비오가 말했다.
“애초에 조합이 이상했지. 쫓겨난 왕자에 몰락한 귀족들에 거기다 야만인 용병까지…….”
두 사람의 말을 듣던 크리스티나 콘테가 헨리 피셔를 바라보며 물었다.
“법무관께서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시죠?”
가만히 총수들의 이야기를 듣던 헨리 피셔가 목청을 가다듬고는 말문을 열었다.
“일단은 소문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기에, 저는 신중하게 이 일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들 사이에서 분명 파벌이 없지는 않겠지만, 권력이 가장 강할 지금 이 시기에 이런 식으로 특정인이 몰락해 간다는 소문이 나돌아 아라곤까지 왔다는 건 뭔가 간단하게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헨리 피셔의 말을 이끌어냈다.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면?”
“의도적인 역정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도적 역정보?”
“네.”
“자세히 말해 주겠어요?”
헨리 피셔는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기본적으로 저들은 민중을 위한 혁명 정부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 구성을 보면 하나같이 민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 말에 총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두머리인 아딘 콘스탄틴은 왕족이고, 그 아래에 있는 안톤 르보프나 빅토르 다비도프는 귀족 출신입니다. 그리고 협상장에서 부총수들을 협박했다는 사람은 분명 쿠만족 내에서 지위가 있는 사람일 겁니다.”
즉, 그들은 모두가 기본적으로 통치 계급으로서의 소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건 너무 초보적이고 무성의할 정도로 노골적인 일입니다. 통치 계급 내에서 일어나는 권력 투쟁이 민중의 입을 통해 외국에까지 전해진다? 이건 전혀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닙니다.”
헨리 피셔의 말에 마르코 루비오와 마리오 드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부자연스럽긴 하죠.”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헨리 피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게 역정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까지는 제가 소양이 부족해 미처 생각하진 못했지만, 분명 우리의 오판을 의도하는 그런 종류의 공작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크리스티나 콘테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 피셔도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일단 우리는 경거망동하지 말기로 하는 게 좋겠소.”
마리오 드라기의 말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고사하는 쪽은 벨로디나의 아딘 콘스탄틴이오. 우리는 느긋하게 지켜보며 저쪽이 백기 투항하길 기다리면 될 것이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게 회의는 끝났고 모두가 각자의 마차에 올라탔다.
“법무관님?”
헨리 피셔가 관용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크리스티나 콘테가 자신의 마차 문을 열고서 그를 불렀다.
“아, 네. 총수님.”
“제 마차로 가시지 않곘어요? 할 이야기도 있고요.”
“아, 네. 영광입니다.”
헨리 피셔는 그대로 그녀의 마차에 올라탔다.
곧 마차가 출발했고, 크리스티나 콘테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요즘 아라곤에 그런 소문이 떠돌아요.”
“어떤 소문 말입니까?”
“저하고 법무관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란 소문이요.”
그 말에 헨리 피셔가 눈을 부릅떴다.
“아, 아니 어떤 정신 나간 작자들이 그딴 소문을 낸단 말입니까? 이건 명백히 총수님을 향한 공격입니다.”
그 반응에 크리스티나 콘테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뭐, 사람들의 소문이야 원래 자극적인 방향으로 퍼지잖아요. 전 이해해요.”
“하, 하지만…….”
“중요한건 이 소문이 그 어떠한 의도도 없이 자연스럽게 퍼진 진짜 소문이라는 거예요.”
헨리 피셔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가만히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그녀가 무얼 의도하고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런 헨리 피셔를 향해 크리스티나 콘테가 말했다.
“이 소문은 곧 법무관님이 저와 매우 가까운 사이란 사실이 일반 서민에게까지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녀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처음 제가 피셔 법무관님을 주목했을 때, 다른 두 총수는 회의적이었어요. 가문도 그저 그렇고, 경력도 별로고 무엇보다도 나이가 굉장히 어리니까요.”
헨리 피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총수들의 생각은 달라요. 이제 총수들은 당신을 인정하고 있어요, 피셔 법무관.”
크리스티나 콘테가 다시 그를 바라봤다.
“곧 선거가 있을 거예요. 원로원은 당신을 집정관으로 지명할 거고요.”
그녀는 가만히 헨리 피셔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세요. 그리고 권력을 획득하세요. 그런 다음에, 그 누구로부터도 공격받지 않을 권위를 얻었을 때, 그 길을 닦아주고 인도해준 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세요.”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질 알았기에 헨리 피셔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 콘테는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 * *
광명력 993년 6월 11일 새벽.
게마인샤프트 동부 항구도시 트링겐.
수많은 배가 오가는 커다란 항구로 거대한 삼단노선 5척이 들어왔다.
각각 서로 다른 문양을 깃발과 선체에 그려 넣었지만, 선수에 자리한 단 하나의 깃발은 그들이 모두 제니스 공화국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통관 검사를 맡은 항구의 관리는 선박에서 곡물 하적 작업이 진행되는 걸 보며 책임자들을 찾아갔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한 소녀와 두 늙은이를 뒤에 둔 채 제니스 상인이 관리에게 다가갔다.
“물품은?”
“식량입니다.”
“어디로 가는 식량이오?”
“중부 도시들로 갑니다. 아무래도 요즘 유목민들 때문에 바쁜 곳 아닙니까?”
“그렇지. 망할 유목민들…… 덕분에 일이 더 많아졌어.”
“헤헤헤. 안 그래도 피로 좀 푸시라고 슈드 자치령에서 가져온 약초를 좀 담았습니다.”
그러면서 제니스 상인은 품에서 주머니 2개를 꺼내 관리에게 건네주었다.
관리는 그 자리에서 주머니 속을 확인했다.
주머니 중 하나에는 말한 대로 약초가 담겨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금덩이가 담겨 있었다.
관리는 씩 웃으며 주머니를 챙긴 후 가볍게 제니스 상인의 어깨를 두드린 뒤 이내 관청으로 사라졌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니스 상인은 관리가 모습을 감추자 뒤로 돌아 소녀와 두 늙은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 관리들이란…… 어느 곳에서건, 어느 시대에서건 뇌물 앞에선 의무를 저버리는 법이지.”
“암. 스승의 스승의 스승의 스승. 그 위로 대대로 올라가는 계보에서도 관리에 대한 평은 똑같았어. 뇌물만 잘 먹이면 자기 나라도 팔 것들이라고.”
두 늙은이의 대화를 듣던 소녀, 로제는 둘을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 손짓했다.
그리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말했다.
“여기서 벨로디나어로 이야기를 한다면, 뇌물을 먹은 관리라도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 다들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세요.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로제의 말에 두 늙은이, 괴짜 마법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하적은 1시간가량 이어졌다.
잭슨 가문에서 몇 개의 경로를 거쳐 고용한 상인은 로제의 감시 아래에서 물품의 수량을 모두 확인했다.
“문제 없습니다.”
상인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거대한 짐 마차 행렬로 돌렸다.
족히 100개는 되는 짐 마차가 로제의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출발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출발하시죠.”
로제의 말에 제니스 상인은 크게 수신호를 보냈다.
수신호는 후미부터 선두에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선두가 신호를 받고 마차를 출발시킬 때쯤, 로제는 두 괴짜와 함께 적당히 중간쯤에 자리한 마차 지붕에 올라갔다.
제니스 상인이 선두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며 로제는 생각했다.
‘이대로 국경까지 1주일…… 국경에서 콘스탄티노바까지 2주일…… 3주일 뒤에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면 물건이 준비돼 있겠지. 그럼 또 그걸 운반하고…….’
괴짜를 찾는 것보다는 수월한 작업이었지만, 뭔가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지루한 반복이 벨로디나 혁명 정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로제는 불평하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잘돼야 나도 잘되니까.’
그러면서 로제는 가만히 동이 트기 직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딘이 일러준 주의 사항을 떠올렸다.
‘통관 자체는 문제가 없어. 어차피 이대로 길을 따라 도시를 거의 거치지 않을 예정이니까. 문제는 유목민인데…….’
아딘은 분명하게 로제에게 말해 주었다.
라인하르트가 조상을 만난 이후 변해서 카반드 왕조를 자칭하며 유목민을 끌어모았다고.
비록 모든 유목민을 통합한 것도 아니었고, 왕조를 자처한다지만 변변한 궁궐도 없고 관료 조직도 없는, 아직까진 마적단에 가까운 상태라곤 하지만 어쨌건 그 존재 자체가 현재 게마인샤프트의 안보에 크나큰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뭐 동부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지만…… 라인하르트……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괜히 그 사람하고 부딪히면 슬플 것 같아.’
그러나 아무리 함께 렝고스에서 어려움을 이겨냈고, 불멸의 신전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라인하르트의 군대가 식량 마차를 공격해온다면 로제는 그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아딘과 그가 통치하는 벨로디나지, 지나가듯 만난 용병과의 인연이 아니니까.
‘뭐, 국경에만 도착하면 야민 벤키시가 또 합류하고 할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가만히 지붕 위에 누워 눈을 붙였다.
지붕이 넓었던 만큼, 두 괴짜 노인도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
그렇게 벨로디나의 명운이 걸린, 잭슨 상단이 유령 상단을 통해 끌어모은 식량은 육로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 * *
벨로디나 혁명 정부와 제니스 공화국 3대 상단 부총수들 간의 협상은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큰소리를 치며 전쟁을 주장했고,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런 그를 말리면서도 때로는 다 포기하고 전쟁이나 마저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소리를 해대며 부총수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크리미아 근방은커녕 데오그라드 근방에서도 혁명군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제니스 공화국 측에서 여러모로 의문을 품고 있는 사이, 안톤은 재무와 조세 그리고 법무총괄위원을 지휘하며 벨로디나 내 제니스인 자산 몰수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파라곤에 소속을 둔 상단과 상인의 자산은 따로 분류를 해두도록.”
아딘에게 받은 명령을 안톤은 그대로 아래로 전달했다.
그 명령대로 행정관들은 순조롭게 몰수 작업을 추진했다.
그리고 광명력 993년 7월 12일 정오, 잭슨 상단으로부터의 첫 곡물이 짐수레 100대에 고스란히 실려 콘스탄티노바로 들어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