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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36화 (136/175)

136 밀약 (4)

광명력 993년 5월 17일 정오.

잭슨 저택 소연회장에서 아딘과 잭슨 남매가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한동안 별말 없이 점심으로 나온 생선구이를 버터에 찍어 먹던 세 사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생선구이를 반쯤 먹고서 포도주를 한 모금 넘긴 피터 잭슨이었다.

“먼저, 콘스탄틴 왕자께서 제안하신 것에 대해선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 말에 아딘인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피터 잭슨을 바라봤다.

피터 잭슨이 말을 이었다.

“반역 행위이긴 하지만, 제게는 파라곤 상인들의 생사가 달려 있는 만큼, 파라곤 상인을 위해서라도 왕자께서 제안하신 협약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습니다.”

아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 잭슨은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넘긴 후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인력확보입니다. 아시겠지만, 현재 용병의 값어치는 유례가 없을 만큼 높게 책정이 된 상태입니다. 예전처럼 몇 실버에 몇 명을 열흘씩 고용하고 그런 일은 이제 불가능합니다.”

피터 잭슨은 콧수염을 한 차례 쓱 쓰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거기다 이게 일이 일이니만큼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합니다. 혹여나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을 고려해, 최소한의 인원을 동원해야 하는데, 현재 잭슨 상단에서는 그런 비밀스러운 작업에 동원할 인력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가만히 피터 잭슨의 말을 듣던 아딘은 씹던 생선구이 조각을 넘기고 포도주로 입가심한 후 입을 열었다.

“인력은 우리 쪽에서 제공하겠습니다.”

내심 나오길 바랐던 말에 피터 잭슨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딘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파라곤에서 벨로디나로 직접 곡물을 수송할 순 없을 겁니다. 결국 게마인샤프트에서 하적해 그곳에서부터 육로를 이용하는 수밖엔 없는데, 이 경우에는 차라리 우리 쪽에서 처음부터 그걸 접수해서 국경 지대로 옮기는 게 더 싸게 먹히긴 할 겁니다.”

아딘의 말에 피터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규모가 규모인 만큼, 분명히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아딘에게 피터 잭슨은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곡물을 모아서 반출할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유령 상단으로 슈드 자치령과 샤펠 제국에서 곡물을 매입할 겁니다. 양이 양이니만큼, 의심받지 않으려면 못해도 유령 상단 열 곳 이상을 동원해야 할 겁니다.”

그런 식으로 유령 상단을 동원해, 마치 여러 경로를 통해 곡물이 자연스럽게 수입된 모양새가 나오면, 다시 또 다른 유령 상단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곡물을 게마인샤프트로 수출하는 모양새를 만든다는 게 피터 잭슨의 구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트링겐까지 가면, 그곳에선 벨로디나 측이 준비한 유령 상단이 필요할 겁니다. 어…… 만약 원하신다면 우리 쪽에서 트링겐 쪽에다 작업을 해둘 수는 있습니다. 교역 도시이니 만큼 거기사 상단을 등록하기엔 굉장히 간소한 절차만 두고 있어서 하루 정도면 족히 스무 개 이상의 유령 상단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 말에 아딘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겠습니다.”

“아, 네.”

“트링겐에서 육로를 통해 벨로디나 국경을 넘는데 걸리는 기한은 대략 1주일입니다. 그리고 그곳 국경지대에서 콘스탄티노바까지는 또 2주일 정도가 소요됩니다. 대략 3주 정도를 잡고, 그 기간 내에 최대한 곡물이 회전할 수 있게끔 준비하셔야겠습니다.”

아딘의 말에 피터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3주 텀이라고 하신다면, 문제 없습니다.”

그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는 그럼 이렇게 마무리하고, 구체적으로 협정서를 작성하는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협정서라는 말에 순간 피터 잭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협정서라…… 그게 분명 필요한 거긴 한데…… 이거 참…….”

그가 망설이는 모습에 아딘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유령 상단까지 동원하는 입장에서 협정서를 만들어 둔다는 게 꺼림칙한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잉크병을 끄집어 냈다.

“특별히 연금술사에게 부탁해 만든 잉크입니다.”

“연금술사의 잉크?”

“기밀을 요하는 문서를 작성할 때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러면서 아딘은 피터 잭슨에게 투명 잉크에 관한 설명을 간단히 요약해서 전달했다.

“이 잉크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그 피의 주인만이 잉크로 쓰여진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 그런…… 그런 물건이라면 충분히 비밀을 지킬 수 있겠습니다.”

“내 피와 잭슨 시장의 피를 섞어서 글을 쓴다면, 충분히 우리 둘 사이의 비밀 협정서로 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피터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식사가 끝났으면, 자리를 옮겨서 협정서를 작성하고 싶습니다.”

아딘의 말에 피터 잭슨은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리 잭슨도 따라서 일어나자 세 사람은 천천히 소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셋은 피터 잭슨의 서재에 도착했다.

“빈 잉크병이 있으면 하나 꺼내십시오.”

아딘의 말에 피터 잭슨은 찬장에서 빈 잉크병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아딘은 거기에다가 투명 잉크를 약간 부은 다음 바늘을 꺼내 손가락을 살짝 찔러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잭슨 시장께서도 떨어뜨리십시오.”

“아, 네.”

피터 잭슨도 마찬가지로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아딘은 토리 잭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땅히 공증인이 있어야하니, 그 역할을 토리 잭슨 양께서 맡아 주십시오.”

토리 잭슨도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러고서야 두 사람 사이에 본격적인 협정서 작성이 시작됐다.

협정서에는 구체적인 물량과 그 물량에 추가 물량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또 그 모든 비용에 관하여서는 철저히 후불의 원칙을 견지하며, 후불의 방법은 곡물에 대한 적정 대금 지급과 향후 벨로디나 시장 개방 시 잭슨 가문의 자금을 우선적으로 선정한다는 내용이 삽입됐다.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자잘한 사항이 협정서 작성 과정에서 들어갔다.

마침내 2시간이 지났을 무렵, 두 사람의 협정서는 완성됐다.

그리고 그 협정서는 오로지 아딘과 잭슨 남매 세 사람만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이 됐다.

마지막으로 협정서 하단에 각각 콘스탄틴 왕가의 인장과 잭슨 가문의 인장을 찍고서야 마침내 협정서 작성 작업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피터 잭슨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협정서를 마법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인력은 가급적 7월이 오기 전에 벨로디나에서 이곳으로 파견 올 겁니다. 물론 그들이 모든 걸 할 수는 없는 만큼, 잭슨 가문 측에서도 최소한의 인력은 차출하셔야 합니다.”

아딘의 말에 피터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의 안내 인원은 확보가 가능합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피터 잭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터 잭슨이 그 손을 맞잡았고,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우호를 다짐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토리 잭슨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 * *

5월 21일 정오.

데오그라드의 버려진 주교성전 예배당.

빅토르 다비도프와 불카르 아시오게가 3대 상단 부총수들과 또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부총수들의 요청이 있었기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따로 칼을 차고 들어오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칼을 놔두면서 동시에 웃통도 벗었다.

덕분에 그의 우람한 근육과 그 위에 새겨진 맹수와 싸우며 생긴 흉터가 고스란히 노출됐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부총수들을 더 기 빠지게 했다.

“보다 진전된 입장을 그대들이 가져와 줄 것을 기대했소이다.”

빅토르 다비도프가 살짝 기세가 눌린 3대 상단 부총수들을 향해 말했다.

부총수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하지만 그대들은 여전히 그 파렴치한 요구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음을 보일 뿐이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부총수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드라기 부총수가 입을 열었다.

“크흠. 우리 입장도 이해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는 투자를 했을 뿐입니다. 그대들은 찬탈자라고 하지만, 분명 유리 콘스탄틴은 우리에게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서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용병을 제공했고, 유리 콘스탄틴이 왕좌에 올랐을 때 우리는 투자에 있어 여러 특혜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 말을 루비오 부총수가 이어 받았다.

“그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이, 유리 콘스탄틴은 분명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벨로디나의 치안과 국방을 용병대에 위임하고, 국정 전반에 관하여서는 공화국에서 파견한 고문의 의견을 반영하겠다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콘테 부총수가 말을 이어 마무리했다.

“그대들이 혁명을 일으켰고, 유리 콘스탄틴을 끌어내린 만큼 새로운 계약이 필요한 건 우리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우리의 자산을 몰수한다거나,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요구를 관철하려 한다면 우리 입장에선 벨로디나의 신용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엔 없다는 것을 알아 주십시오.”

그들의 말이 끝나자마자 불카르 아시오게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콰앙-!]

폭발음과도 같은 충돌음에 이어 테이블이 반으로 갈라지며 주저 앉았다.

그 위에 올려져 있던 잔들 또한 모두 쏟아지며 바닥에서 깨졌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호랑이와 곰의 발톱이 남긴 흉터로 그득한 가슴 근육을 꿀렁거리며 콧김을 뿜어댔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반성은커녕 뭐? 신용 문제? 신사답게 해결하려니 아주 우리를 똥으로 보는 거야, 뭐야!”

벨로디나어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그의 모습은 분노한 맹수와도 같았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최대한 불카르 아시오게를 말렸다.

“왜 이러는 겁니까, 참으십시오.”

“참긴 뭘 참으란 말이오? 지금 저 식충이들이 우리를 협박하는 게 안 보이시오?”

벨로디나어를 알아듣는 부총수들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사색이 된 채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를 못했다.

“내 지금 당장 콘스탄티노바로 가서 의장께 건의할 거요. 이딴 개똥만도 못한 협상은 집어 치우고 당장 크리미아에 있는 벌레들을 쓸어버리자고 말이오!”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이렇게 열을 낸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나는 그런 유익 따위 신경 쓰지 않소이다! 말장난뿐인 것들 혀를 다 뽑아내는 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오!”

그렇게 이야기하며 불카르 아시오게는 부총수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할 만한 말을 뱉어냈다.

“만약 의장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계속 그대가 이딴 요란한 말장난이나 계속하려고 든다면! 난 그냥 나 혼자 우리 전사들을 이끌고 남부로 내려갈 것이오! 치안이야 그대들 민병대인지 뭔지가 알아서 하라 하시오!”

그러면서 불카르 아시오게는 부총수들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직접 선봉에 서서 저것들 혓바닥을 다 뽑아버릴 때까지 죽지 않고 싸울 것이란 말이오! 쿠만의 전사들이 내 말을 듣겠소? 그대들 벨로디나인의 말을 듣겠소!”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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