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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35화 (135/175)

135 밀약 (3)

‘이미 지나간 일, 만약을 가정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꼬?’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오늘은 고양이가 돼 돌다리 밑에서 잠이나 자야겠구나. 허허허.’

* * *

광명력 993년 5월 17일 아침.

제니스 공화국 동부 대도시 파라곤.

잭슨 저택.

자신의 서재에서 피터 잭슨은 토리 잭슨과 아침부터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피로는 좀 풀리셨어요?”

“포도주로 적당히 취한 상태에서 꽃차 한잔 마시고 자니까 피로가 어느 정도는 풀리네.”

그렇게 이야기하며 피터 잭슨은 꽃차를 쭉 들이켰다.

“아딘 콘스탄틴은 아직도 방에 있나?”

“하인들 말로는 계속 자고 있는 것 같다고 해요.”

“참 대단한 사람이야. 네 말대로라면 저 사람의 무력은 소드 마스터 그 이상이야. 내가 아라곤에서 봤던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오크 부족 하나를 쓸어버릴 순 없었을 거야. 아무리 마법사 하나가 같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 마법사. 여동생인지 하는 여자가 마법사라고 했잖아. 대단한 능력의 마법사라고.”

“맞아요. 로제는 능히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을 수준이었어요.”

“젠장…… 소드 마스터를 능가하는 전사와 어린 대마법사의 조합이라니…… 벨로디나는 복도 많구만.”

그렇게 이야기하며 피터 잭슨은 차를 한 모금 더 넘겼다.

그리곤 토리 잭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토리 넌 어떻게 생각해?”

“아딘 콘스탄틴의 제안 말인가요?”

“그래.”

“솔직히 우리 입장에선 도박이긴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우리가 잃은 건 아라곤의 신뢰와 아버지의 원로원 의원 직함이지만, 얻을 건 거대한 부와 벨로디나에서의 독점적인 지위니까요.”

“우리가 곡물을 벨로디나에 반출하다 들키기라도 하면, 아버지가 원로원에서 쫓겨나는 수준에서 징벌이 끝나진 않을 것 같은데?”

그 말에 토리 잭슨이 씩 웃었다.

“무슨 좋은 방도가 있어?”

피터 잭슨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토리 잭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니스 공화국의 사법 체계는, 비록 금권정치로 인해 타락했다곤 하지만, 유일하게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웠던 증거주의 원칙은 살아 있죠.”

“그렇긴 하지.”

“그리고 상행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서류고요.”

“빙빙 돌리지 말고 좀 응?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데?”

피터 잭슨의 재촉에 토리 잭슨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파라곤으로 곡물을 모으는 상단과 파라곤에서 선박을 통해 그 곡물을 게마인샤프트 동부 트링겐으로 보낼 상단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벨로디나와 게마인샤프트 경계까지 육상으로 운반할 상단이 각각 별개의 존재라면,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우리가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 이외에 따로 처벌받을 일은 없지 않겠어요?”

토리 잭슨의 말에 피터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는 쉽게 토리 잭슨의 구상에 동조하진 못했다.

“자금이야 우리가 댄다 해도, 이게 과연 직접 칼을 뽑고 앞장설 상단이 있을까?”

그 물음에 토리 잭슨은 살짝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유령 상단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 말에 피터 잭슨이 눈을 부릅뜨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가락을 자기 입술 앞에 갖다 댔다.

“여기서 유령 상단 이야기가 왜 나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잖아요? 우리를 포함해서 공화국의 주요 상단들은 전부 탈세용 유령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이 방에 저하고 오라버니 뿐인데 누가 듣는다고 그래요?”

“야, 모르는 거야. 낮말은 하인이 듣고 밤말은 거지가 듣는단 말이 있잖아!”

“참 쓸데없이 겁은 많다니까.”

피터 잭슨은 그대로 차를 쭉 들이켰다.

토리 잭슨이 그의 찻잔을 다시 채워 주며 말했다.

“탈세 목적으로 만든 유령 상단을 이용하면 될 거예요. 설령 중간에 발각된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우리 가문과의 접점은 없으니까 법정에선 우리에게 죄를 물을 순 없겠죠.”

“하지만 문제는 네가 알다시피 유령 상단은 말 그대로 유령이야. 서류로나 존재하지 실체가 없다고. 직원도 없고, 용병도 없어.”

“인력의 경우에는 콘스탄틴 왕자에게 차출해 보라고 하는 수밖엔 없지 않겠어요?”

“벨로디나 사람을 쓰자고? 야, 아서라. 벨로디나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오는 게 일이다.”

“과연 그럴까요?”

토리 잭슨의 말에 피터 잭슨은 그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토리 잭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국의 최고 지도자가 파라곤까지, 그것도 우리 저택까지 모든 경계를 뚫고 들어왔어요. 이게 뭘 의미하겠어요?”

“음…… 아! 맞네.”

피터 잭슨이 비로소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자 토리 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만의 루트가 있는 거예요. 벨로디나에서 제니스까지 통하는 루트가.”

“그 루트로라면 충분히 벨로디나에서도 인력을 차출할 수 있겠지.”

“그리고 사실 인력은 파라곤에서 게마인샤프트로 떠날 때에나 필요하지, 게마인샤프트에서부터는 딱히 필요는 없을 거예요. 거기 가면 용병들이 넘쳐나니까요.”

그 말에 피터 잭슨은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은 예전과는 달라. 게마인샤프트에 퍼져 살던 유목민들이 갑지가 한데 뭉치더니 여기저기 도시를 약탈하고 있거든.”

“유목민이요?”

“그래. 그것 때문에 도시 영주들이 용병들을 싹쓸이해서 아주 씨가 말랐어. 덕분에 예전 같으면 1실버에 1개월을 고용하던 것들을 1골드에 보름 고용하게 생겼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피터 잭슨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춰 말을 이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아라곤에서도 벨로디나를 추가로 치거나 하지를 못하고 있다고 해. 공화국 내의 정규 용병들은 당장 몸값 올려달라고 난리치고 있는데다 게마인샤프트에서 공요해야 할 비정규 용병들까지 몸값이 이미 올라갔으니까.”

토리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인력 문제를 벨로디나가 해결해 준다면, 우리 입장에서야 유령 상단 몇 개 날려 먹게 되기야 하겠지만, 충분히 감내할 수 있지. 암.”

“그럼 나중에 점심 때 식사를 하면서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그래야겠지. 피차 빨리 끝내고 협약을 맺는 게 편하니까.”

대화가 마무리되자 토리 잭슨은 편안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넘긴 후 이야기했다.

“만약 나중에 벨로디나에서의 사업이 커진다면, 오라버니 입장에선 아픈 손가락 하나 없이 후계 구도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피터 잭슨이 왼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나중에 우리 상단 규모가 벨로디나와 제니스에서 각각 대등해지면, 마이클이랑 브래드 사이에서 오라버니가 고민하지 않으셔도 된단 말이에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걔들이 나와?”

“나중에 마이클이랑 브래드한테 각각 상단의 영역을 나눠주면 되니까요. 예를 들면 정무 감각이 괜찮은 마이클에게는 파라곤을 상속하고, 편견이 없는 브래드에게는 벨로디나를 상속하는 식으로요.”

피터 잭슨은 잠시 할말을 잃었단 표정으로 토리 잭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야기했다.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하자. 일단은 천천히.”

그리고 그는 차를 한 모금 넘긴 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토리 네가 본격적으로 상단 일에 뛰어들었으면 좋겠어.”

“네?”

“아무래도 네가 콘스탄틴하고 친분이 좀 있잖냐. 그러니까, 이번 곡물 반출건을 네가 한 번 맡아 보라는 거지. 물론 서류로 남지 않게.”

“제가…… 이번 일을요? 잘 할 수 있을까요?”

토리 잭슨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손을 살짝 떨기 시작했다.

그것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피터 잭슨은 이야기했다.

“부담이 되면 안 해도 좋아. 하지만…… 이왕이면 난 네가 예전처럼 적극적이고 왕성하게 활동을 해 줬으면 좋겠어.”

그 말에 토리 잭슨은 잠시 고민하다가 차를 한 모금 넘긴 후 이야기했다.

“일단…… 그 부분은 제가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자.”

같은 시각.

3층에 자리한 손님용 객실에서 두루마리를 통해 실시간으로 피터 잭슨과 토리 잭슨의 대화가 기록되는 것을 보던 아딘은 게마인샤프트의 유목민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목민? 유목민이 무슨 하나로 뭉쳐서 약탈을 한다는 거야? 도대체 누가?’

그 순간, 아딘의 뇌리로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아딘의 생각이 그 사람에게로 향하자 곧 두루마리 위로 그 사람의 정보가 떠올랐다.

<라인하르트>

<광명력 964년 1월 6일 생>

<4년 차 용병>

<렝고스 탐험가 호위 업무 다수 참여>

<불멸자 샤푸르의 부계 후손>

<게마인샤프트 유목민-옛 구르간 제국 신민의 후예를 통합하여 카반드 왕조를 자칭하며 현재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아딘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카반드 왕조>

<광명력 993년 1월 6일 라인하르트에 의해 새롭게 개창된 왕조>

<서남부 대평원을 중심으로 점차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유목민 특유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상당히 주변 도시에 큰 위협을 가하는 중이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두루마리를 도로 말아 넣었다.

‘위대한 조상과의 만남에서 어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모양이지?’

내심 항상 어떻게 살고 있을까? 걱정했던 라인하르트였다.

그가 잘 살고 있다면 모를까,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괜히 자기 마음도 편치 않을 것 같아 그동안 아딘은 그의 근황을 두루마리로 확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딘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카반드 왕조가 성공을 거둘지, 아니면 유목민들의 집단 반란 정도로나 규정될지는 역사가 기록하겠지만…….’

아딘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리곤 창밖으로 보이는 파라곤 전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 내가 짰던 설정에는 없던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 벨로디나 혁명부터 토리 잭슨의 구출 그리고 라인하르트를 중심으로 한 유목민 결집까지…….’

이 시점에서 이미 김현수의 오리지널 설정은 폐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내가 설정하지 않은 것들까지…….’

샤펠 제국 황제를 정점으로 한다는 묵시록 종단과 엘프숲에서 만난 뱀 인간들 그리고 여전히 통일되지 못한 채 샤펠 제국에 의해 분열이 강제된 화산 열도까지.

‘구태여 오리지널 설정대로 잡아갈 필요는 없겠지만…… 그 정체조차 불명인 뱀 인간이야 그렇다 쳐도 묵시록 종단은 언젠가는 내가 태양 아래 드러내야 할 존재야.’

아딘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일단 혁명 정권부터 안정적으로 운영해서 정상적인 새 벨로디나 왕국을 개창해야 하는 거고.’

아딘은 심호흡을 몇 차례 했다.

심호흡과 함께 마음 가득 쌓여 있던 여러 생각과 번뇌가 사그라드는 것을 그는 느꼈다.

‘이번 식량난을 타개하고, 후에 벨로디나 경제를 일으키면 언젠가는 샤펠 제국과 한 번 싸워야 할 때가 올 거야.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그렇게 아딘의 생각은 아침 태양과 함께 깊어져 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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