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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34화 (134/175)

134 밀약 (2)

한동안 당황스러움과 황당함 그리고 약간의 경멸이 섞인 눈으로 아딘을 바라보던 피터 잭슨은 이내 목청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먼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여동생을 지옥에서 구해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이 부분에 관해선 저뿐만 아니라 제 아버님이신 앤드루 잭슨 원로원 의원께서도 동일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아딘은 가만히 피터 잭슨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분명히 이 은혜에 대해선 마땅히 가문 차원에서 보답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이 은혜를 갚기 위해 곡물을 적국으로 반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건 단순히 한 개인과 한 가문 사이의 은원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입니다.”

피터 잭슨은 말을 돌리고 있었다.

“국가 간의 민감한 문제를 일개 가문이 자기 구성원이 입은 은혜를 갚는답시고 함부로 나서서 건드는 일은 역사를 통틀어 없었습니다. 우리 잭슨 가문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 은혜를 갚기야 하겠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핵심 내용은 자기들이 피해를 볼까 두려워 아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피터 잭슨은 마냥 거부만 하지는 않았다.

“만약 공화국과 벨로디나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고, 더 나아가 양국 간에 다시 자유로운 교역이 시작되면 그때는 잭슨 가문이 나서서 원가에 가까운 가격으로 곡물을 벨로디나 정부에 수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합니다.”

피터 잭슨의 거절에 아딘은 시선을 그에게서 토리 잭슨에게로 옮겼다.

토리 잭슨은 약간은 가라앉긴 했지만, 여전히 놀란 상태였다.

그런 토리 잭슨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전한 후 아딘은 다시 시선을 피터 잭슨에게로 돌렸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딘은 잔을 들고 이야기했다.

“제가 잭슨 가문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은이 바로 이 시국에 벨로디나로 곡물을 수출하는 겁니다. 그 이후에 잭슨 가문과 벨로디나 사이에 체결될 여러 특혜 가득한 협약과 무관한, 순수하게 수출 시점을 내 뜻대로 잡는 것이 그대 가문이 나에게 갚아야 할 은혜라는 겁니다.”

순간 피터 잭슨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그것이 상인의 계산적인 눈빛임을 간파한 아딘은 곧장 자신이 생각한 조건을 읊었다.

“이번에 그대들이 벨로디나가 당면한 식량난 해소에 일조한다면, 향후 벨로디나에서 그대들의 자본은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조세부터 지분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말입니다.”

“흐음…….”

피터 잭슨은 살짝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딘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벨로디나는 찬탈자 유리 콘스탄틴을 앞세운 제니스 공화국 정부에 의해, 정확하게는 3대 상단에 의해 지난 1년간 착취당했습니다. 민중의 삶은 파탄 났고, 벨로디나의 자원은 수탈당했습니다. 혁명은 이것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당장에는 급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안정되는 순간 벨로디나는 제니스 공화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상인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것입니다.”

피터 잭슨은 가만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아딘에게 물었다.

“매력적인 투자처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3대 상단을 포함해 무수한 제니스 상인들이 벨로디나에 투자했지만, 지난 1년간 돌아온 건 이윤이 아닌 손실이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3대 상단이 벨로디나의 현지 풍속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제니스 3대 상단이 벨로디나를 괴뢰화하고 나서 통치한 방식을 보면 그들은 상단 경영과 국가 통치를 구분하지 못했음이 확연히 드러나고 말입니다.”

“흐음…….”

아딘은 포도주를 한 모금 넘긴 후 이야기했다.

“벨로디나는 향후 외국 자본에 문호를 개방할 때, 필수적으로 벨로디나 정부 혹은 기업 혹은 개인과 합작하여 회사를 세우도록 할 것입니다. 합작회사를 통해 벨로디나 현지 사정에 밝은 이와 함께 경영한다면, 분명 지난 1년간의 무식한 착취보다는 훨씬 서로에게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흐음…….”

처음 아딘이 곡물을 내놓으라 했을 때 기겁하던 것과는 달리 피터 잭슨은 고민하고 있었다.

앤드루 잭슨의 반대로 잭슨 상단이 투자를 하진 않았다지만,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 시점만 따질 경우 그게 현명한 판단이었다곤 하지만, 벨로디나가 지난 잠재력을 피터 잭슨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7백만에 이르는 인구, 남부에 집중돼 있긴 하지만 드넓은 곡창지대 그리고 전국토에 고루 퍼진 광산…… 벨로디나는 분명 충분한 잠재력을 지닌 땅입니다. 그걸 지난 1년간 제니스의 3대 상단은 헛되이 써먹었고.”

아딘의 말에 피터 잭슨은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그런 피터 잭슨에게 아딘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특별히 파라곤에 등록지를 둔 상인들에 한해선 몰수 자산을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피터 잭슨의 눈이 살짝 떨렸다.

“물론 돌려드리는 자산은 합작회사의 형식을 한 새로운 회사의 지분의 형태로 돌아가거나 하겠지만, 완전 몰수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피터 잭슨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고심하기 시작했다.

아딘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명백한 반역죄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아딘이 주는 것은 은원 관계 청산과 함께 어마어마한 수준의 투자 특혜였다.

‘분명 벨로디나는 무주공산이 될 거야. 합작의 형식이라곤 하지만 그런 곳에 잭슨 가문이 뿌리를 내린다면…….’

그가 고심하고 있을 때, 그때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토리 잭슨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하신 말씀, 분명히 전해 받았습니다.”

아딘과 피터 잭슨의 시선이 동시에 토리 잭슨에게로 향했다.

토리 잭슨이 말을 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선 오라버니께 생각할 시간을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오라버니께서는 지난 며칠간 시청에서 철야를 하셨습니다.”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기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피터 잭슨을 바라보았다.

“만약 시장께서 나에게 거처를 제공하신다면, 일주일이라는 기한 내에서는 얼마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딘의 말에 피터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허허, 사실 제가 좀 피곤해서…… 정상적인 판단력이 서지를 않고 있긴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피터 잭슨은 살짝 토리 잭슨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고맙다.’

토리 잭슨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나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건과 나비 가면을 꺼내 입가와 눈가를 가렸다.

피터 잭슨은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하인에게 아딘을 손님 전용 객실로 안내하게 했다.

그리곤 그대로 자리에 앉아 포도주를 쭉 들이켠 후 토리 잭슨의 손을 잡곤 이야기했다.

“고맙다, 토리. 정말 고마워.”

“매력적인 조건이긴 하지만, 오라버니 입장에서도 또 계산하셔야 할 게 있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에 피터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본격적으로 식기를 들어 이미 반쯤 식은 요리를 맛보기 시작했다.

토리 잭슨은 가만히 그런 피터 잭슨을 바라보며 미지근해진 수프만 떠먹을 뿐이었다.

* * *

광명력 993년 5월 17일 새벽.

빅토르 다비도프는 왕할멈의 집에서 나와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혁명 지도부의 일원치고는 경호원 하나 없이 너무나도 위험한 모습이었지만, 그가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위험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이고, 이제 가십니까, 백작님?”

비단 그의 마법 실력뿐만이 아니더라도, 그가 지닌 옛 작위와 현 직함의 위력은 그 누구도 새벽길에 그를 건들 수 없게 하고 있었다.

도리어 어떻게든 그의 눈에 잘 보이려고 아첨을 떠는 모습만이 계속될 따름이었다.

“이 나라가 앞으로 귀족 신분제가 폐지되고 모두가 평등한 국민으로서 사는 세상이 될 건데, 백작님이라니……. 차라리 총괄위원님 혹은 위원님이라 부르게.”

“헤헤. 무식한 제가 뭘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위원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위원님.”

“그래. 요즘 살 만한가?”

“헤헤. 뭐 어울리지도 않게 치안대에 참여하고 있어서 친구들이 놀리기는 하는데, 자식들이 놀리면서도 부러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재미있습니다.”

“그래. 그대에게 채워진 완장이 비록 치안대 병사로서의 것이지만, 가벼이 여기지 말게.”

“암요. 무겁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 수고하시게.”

“넵. 살펴가십시오!”

자신을 향해 경례하는, 옛 집창촌 건달이자 현 치안대 병사인 사내를 뒤로하고 빅토르 다비도프는 어두운 골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를 두 사내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멀리서 뒤쫓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두 사내는 빅토르 다비도프를 놓쳤다.

“어디 간 거야?”

“분명 여기로 갔잖아?”

“담을 넘었나?”

“저 높이를? 그 노인이?”

“마법사잖아.”

“마법사가 어떻게 육체적으로 저 담을 넘어?”

“날아갔을 수도 있잖아.”

“젠장…….”

막다른 골목에서, 무려 5m에 이르는 담장을 앞에 두고 두 사내는 발을 굴렸다.

“내가 말했지? 여긴 미로 같은 동네니까 거리를 좀 더 좁혀야 한다고.”

“거기서 더 좁혔으면 아까 그 치안병 같은 머저리도 자기가 미행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을 거다, 이 멍청아.”

“젠장…… 일단 노친네의 집으로 가 있자. 그쪽으로 들어오겠지.”

그렇게 두 사내는 골목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담장 위 지붕에 누운 검은 고양이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야옹~!]

검은 고양이는 한 차례 울음을 터뜨린 후 그대로 담장 반대편으로 내려왔다.

고양이가 담장에서 내려오자마자 회색 들개 한 마리가 고양이를 반겼다.

[컹-! 컹-!]

들개가 짖자 검은 고양이는 가소롭다는 듯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검은 고양이의 형상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빅토르 다비도프가 나타났다.

[깨앵-!]

그 모습에 들개는 화들짝 놀라며 달아났다.

“원, 겁도 많은 녀석이 짖기는…….”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 이내 그의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졌다.

‘내가 감시 대상이라…….’

어제 오후부터 빅토르 다비도프는 자신에게 감시가 붙었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 전, 그들을 기만함으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목적이 있는 감시가 붙은 것을 확신하게 됐다.

‘도대체 누가? 콘스탄틴이? 아니면 르보프가?’

누가 됐건, 자신에게는 좋은 징조가 아님을 빅토르 다비도프는 알고 있었다.

‘어찌하다 내 처지가 이리 됐을꼬?’

만약, 작년 겨울에 아딘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자신이 상트보가르로 가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됐을까?

‘만약 아딘 콘스탄틴이 단독으로 쿠만인을 이끌고 외부에서 공격할 때, 내가 독단적으로 민란을 일으켜 민중 지도자가 됐다면…….’

그런 상상을 하던 빅토르 다비도프는 이내 헛되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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