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33화 (133/175)

133 밀약 (1)

아라곤.

콘테 저택.

3대 상단 총수와 헨리 피셔 법무관이 원탁에 둘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예상대로 아딘 콘스탄틴 측에서는 우리의 요구 조건을 거절했어요.”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마르코 루비오와 마리오 드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군무위원이란 사람이 부총수들을 협박했다고 해요. 점점 온건파의 입지가 줄어들고 강경파의 입지가 커지고 있다고, 이대로 가면 자기 뜻대로 협상이 아닌 전쟁으로 이야기가 끝나게 될 거라고 말이에요.”

그 말에 마르코 루비오가 코웃음을 쳤다.

“허세 부리기는 있기는…… 제아무리 혁명군이 민중을 등에 업고 있다 해도 말이야, 우리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금방 무너질 것들이 하여간…….”

하지만 마리오 드라기는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도 지금 군대를 빼기가 힘든 상황이라는 걸 모르는가? 이미 벨로디나에서 너무 많은 용병이 희생됐다네. 당장 본토에 있는 정규 용병들부터가 자기 몸값 올릴 생각만 하고 있는데, 어떻게 추가로 군을 파병한단 말인가?”

그 말을 크리스티나 콘테가 이어받았다.

“거기다 게마인샤프트에서 인력을 추가로 모집하기도 어려워요. 아시다시피 유목민들의 소요가 상상 이상이라 게마인샤프트에 있는 영주들이 지금 경쟁적으로 용병을 끌어모으는 판국이고요.”

두 사람이 동시에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자 마르코 루비오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관망하던 헨리 피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샤펠 제국의 상황도 묘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헨리 피셔를 바라봤다.

“어제 친구에게 받은 편지에 최근 샤펠 제국 황제가 북부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직접 군을 이끌고 출병할 준비를 하고 있단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세 총수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황제가 직접 말인가요? 확실한 정보인가요?”

크리스티나 콘테의 물음에 헨리 피셔는 살짝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 현재 샤펠 제국을 여행 중인 친구에게 온 전서구 편지라…… 그 친구가 헛소문을 듣고 저한테 전서구를 보낼 그런 친구는 아니라서 말입니다. 뭐, 물론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정보는 아닙니다.”

그 모습에 마르코 루비오가 의자 팔걸이를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거 확인되지도 않은, 정확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정보랍시고 이 자리에서 말하면 되나? 어?!”

그러자 크리스티나 콘테가 마르코 루비오를 흘겨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오 드라기가 손을 들고서 이야기했다.

“마냥 헛소문 취급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실제로 논리적으로 보자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세. 작금의 샤펠 제국 황제의 권력은 어마어마하다는 건 상식 아닌가? 그런 사람이 맹주의 사망으로 사분오열된 북부를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것 자체가 사실 우스운 일 아닌가?”

그 말에 크리스티나 콘테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샤펠 제국 황제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항상 북부를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고 했어요. 그 막강한 맹주 디에고 공작이 죽은 이상, 젊은 황제에게 북부란 먹음직스러운 요리 아니겠어요?”

또다시 두 사람이 자신을 반대하는 이야기를 하자 마르코 루비오는 결국 콧김을 강하게 내뿜곤 입을 꽉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반면 헨리 피셔는 용기를 얻어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만약 샤펠 제국 황제가 북부로 친정한다면, 북부는 결코 황제의 군대 앞에서 버티질 못할 겁니다. 봉건 영주들의 징집병과 황제의 상비군 사이의 전력 격차를 생각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샤펠 제국 황제가 북부를 수중에 넣을 수 있는 확실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 말에 크리스티나 콘테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에 헨리 피셔가 더욱 용기를 얻어 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만약 황제가 북부까지 흡수한 상황에서 우리가 추가로 벨로디나에 군대를 보내둔다면, 분명 황제는 군대를 동쪽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라 감히 예측해 봅니다. 라폴리움 정도만 저들이 점령해도, 낙후된 제국 동부 지방을 개발할 명분과 경제적 실리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합당한 말이었기에 총수들은, 심지어 마르코 루비오조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피셔 법무관께서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시죠?”

크리스티나 콘테의 물음에 헨리 피셔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일단, 현실적으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할 수 없듯, 벨로디나 혁명 정부도 함부로 크리미아를 공격할 수는 없을 겁니다. 현재까지 정보를 종합하면 저들에게 있어 병력다운 병력은 기껏해야 쿠만족 용병 수 천뿐입니다. 민병대를 긁어모아 본들 한계가 분명할 거란 말입니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 피셔가 말을 이었다.

“반면 크리미아에 주둔 중인 우리 측 용병의 경우 총수님들께서 직접 육성하신 최정예로 2만 5천입니다. 비록 철군 준비 중이라곤 하지만, 당장에라도 그들은 크리미아를 절대 사수할 준비가 돼 있는 용사 중 용사 아니겠습니까?”

입이 바싹 타는지 헨리 피셔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로는,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저쪽에서 굶주림에 지쳐 역으로 혁명이 일어나게끔 유도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역혁명?”

“네.”

크리스티나 콘테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헨리 피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부연했다.

“굶주리다 보면 결국 민중은 혁명 정부에 실망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혁명가들 사이에선 내분이 발생할 거고, 그틈을 타 누군가가 또 역으로 혁명 정부를 향해 혁명을 일으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헨리 피셔가 말을 마치자마자 마리오 드라기가 씩 웃으며 말했다.

“혹은 외부의 누군가가 그것을 부추길 수도 있고 말이야.”

그 말에 헨리 피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오 드라기가 소리 내어 한동안 웃다가 이내 헨리 피셔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동안 사실은 고민을 좀 했다네. 콘테 총수는 그대를 차기 집정관으로 세우길 바랐지만, 난 솔직히 완전히 신뢰하진 못했거든. 어쨌건 이제 정치 초년생에 나이도 한참 어리니 말일세. 하지만 방금 그대의 말로 난 확신하게 됐다네. 차기 집정관의 자리를 그대에게 주는 게 좋겠다는 것을 말이야.”

그 말에 헨리 피셔의 표정이 살짝 얼어붙었다.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그런 그를 향해 크리스티나 콘테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피셔 집정관님? 아니지, 예비 집정관님이라 해야하나?”

곧 그녀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뒤이어 마리오 드라기의 웃음소리도 퍼져 나갔다.

오로지 단 두 사람, 바짝 긴장한 헨리 피셔와 뾰루퉁한 마르코 루비오만이 웃질 못했다.

* * *

무거운 침묵 속에서 아딘과 잭슨 남매의 저녁 식사는 진행됐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가볍게 씹고 마시는 소리만이 소연회장에 퍼졌다.

‘도대체 이 사람이 왜?’

피터 잭슨은, 토리 잭슨이 자신이 온다고 특별히 준비해둔 전복과 바닷가재 요리를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연거푸 포도주만 마시며 아딘의 눈치를 살폈다.

‘이 엄중한 시국에 그냥 왔을 리는 없잖아?’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아딘이 왔을 것이라 확신하였기에 피터 잭슨의 불안은 더 커져만 갔다.

‘스미스 씨가…… 그 아딘 콘스탄틴이라고?’

토리 잭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제대로 식사는 하지 못한 채 물만 마시며 아딘을 빤히 바라봤다.

렝고스에서 자신을 구해주며 오크를 학살하고, 오크와 대화하며 그들에게 무기를 전해주고, 거대한 괴수들을 죽이기도 하고 또 부려먹기도 하던 인물.

식인 오크의 마을에서, 오크에게 빌붙은 인간의 노예로서 언제 죽을지 모를 삶을 살던 자신을 구해준 구원자.

그런 사람이 작금에 제니스 공화국의 우환인 벨로디나 혁명을 이끄는 사람이란 사실이 토리 잭슨의 심경을 복잡하게 했다.

유일하게 식사를 식사답게 즐기는 것은 아딘이었다.

“제니스 공화국은 주요 대도시가 모두 바다를 끼고 있어서 해산물 요리가 아주 발전했다고 아는데, 과연 먹어 보니 사실입니다. 하하하.”

모든 요리를 먹은 후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아딘은 그렇게 요리를 칭찬했다.

피터 잭슨과 토리 잭슨은 그저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딘은 씩 웃었다.

그런 아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토리 잭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어쨌건 일국의 왕족인데 그것을 몰라 마땅히 갖췄어야 할 예우를 갖추지 못했음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에 아딘은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왕족이 아닌 여행자였습니다, 잭슨 양.”

“하지만 지금은 왕족…… 아니 혁명 지도자로서 이곳을 방문하셨으니 마땅히 예의를 갖출 건 갖춰야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두 사람의 말을 듣던 피터 잭슨이 끼어들었다.

“어…… 음…… 우선 이렇게 파라곤을 찾아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비록 지금은 적국이라지만 제니스와 벨로디나는 항상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던 관계였던 만큼, 그 친교가 후에도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렇게 의례적인 인사를 한 후 피터 잭슨은 포도주를 한 모금 넘긴 뒤 본론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전쟁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적국으로 친히 오신 것은 단순히 예전에 은혜를 입었던 사람에게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 목적을 확실하게 알려주시겠습니까?”

피터 잭슨의 물음에 아딘은 포도주를 쭉 들이켠 후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잭슨 가문과 거래를 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거래…… 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벨로디나에 곡물을 제공해 주십시오.”

그 말에 피터 잭슨은 물론 토리 잭슨마저도 눈을 부릅떴다.

“고, 곡물이라니…… 그게 무슨…… 지금 저더러 공화국에 반역하라는 말입니까?”

현재 벨로디나와 제니스는 전쟁 상태다.

그런데 전쟁 와중에 적국에 식량을 보낸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역 행위였다.

발각된다면 제아무리 파라곤의 지배자 가문이라 하더라도 멸문을 면치 못할 터였다.

“하하. 이거 잭슨 시장께서는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피터 잭슨을 향해 아딘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는 지금 잭슨 시장께 국가에 반역하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그럼 뭡니까?”

“은혜를 갚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그 말에 피터 잭슨은 물론 토리 잭슨마저도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남매의 모습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잔에 새 포도주를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마시는 아딘의 눈에 순간적으로 씁쓸한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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