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잭슨 가문 (2)
“누구요?”
다리아논 잘못들었다는 양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빅토르 다비도프. 그 인간 뒤를 좀 캐 보라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예요?”
“그럼, 내가 너 여기에 불러놓고 헛소리하고 있겠니?”
“더위 먹고 헛소리할 수도 있죠?”
“이게 더위 먹을 날씨니?”
“쿠만에 비하면 굉장히 덥죠.”
“아 됐고. 아무튼, 그 인간 좀 감시해 봐.”
“왜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인간,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뒤가 구려보인단 말이야.”
“증거가 있는 의심이에요? 아니면 또 생사람 잡을 의심병이 도진 거예요?”
“촉이 온단 말이야, 촉이.”
“아 진짜, 또 그놈의 촉 타령. 여기가 무슨 쿠만인줄 알아요? 촉으로 사냥이나 하게?”
“그러니 너한테 뒷조사를 맡기는 거 아니겠니?”
다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나서려다 말고 뒤를 돌아 불카르 아시오게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그 사람이 꿍꿍이가 있건 없건 그게 아버지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 당연히 상관이 있지. 내 사위가 될 놈한테 자칫 누가 될 수도 있는 일을 저지르는 거라면 당장에 내가 처단해야지. 안 그래?”
“아 진짜, 아딘 콘스탄틴은 로제랑 그렇고 그렇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드셔 왜?”
다리아는 징글징글하다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거 자기 좋은 일 시키려고 그러는 건데…… 하여간 아직 어려서 그런가 철이 없어요, 철이.”
불카르 아시오게는 그런 딸의 모습에 혀를 차며 물을 쭉 들이켰다.
* * *
“오랜만입니다, 토리.”
아딘의 인사에 토리 잭슨은 결국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아딘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한동안 소리죽여 울던 토리 잭슨은 이내 마음을 추스르곤 아딘을 응접용 테이블 소파에 앉혔다.
“차를 내오라 할까요?”
토리 잭슨의 물음에 아딘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니, 오신다면 오신다고 미리 말씀이라도 주셨으면 오라버니랑 아버지한테 말해서 크게 대접을 해 줬을 건데…….”
토리 잭슨은 물주전자와 잔 2개를 들고 아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가 물을 따라 자신에게 잔을 건네는 것을 보며 아딘은 말했다.
“그렇게 요란을 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이렇게 조용히 찾아오면 될 일을.”
“그래도…… 참, 로제는 잘 지내죠?”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같이 안 오셨나요?”
“로제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지금 잠시 저와 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 참, 지금 어디서 지내고 계시죠? 여전히 여행 중이신가요?”
아딘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여행은 일단 당분간은 안 할 예정입니다. 진득하게 한 자리에 앉아서 해야 할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아…… 어디 정착하신 모양이네요? 하긴, 스미스 씨 정도의 능력이면 어디서든 높게 쓰일 테니…….”
아딘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토리 잭슨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저야 뭐…… 늘 그렇죠. 항상 집에만 있고…… 아직 밖으로 나가긴 좀 힘들어서 말이에요.”
“상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츰 씻겨질 겁니다. 시간은 만물을 부스러뜨리는 힘이 있으니, 힘들었던 시간의 기억도 차츰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그러길 바랄 뿐이예요.”
그러면서 토리 잭슨은 아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난밤 꿈에 아딘이 나왔단 말부터, 피터 잭슨이 자신에게 다시 상단 업무를 맡았으면 좋겠다는 서신을 보냈다는 것까지.
마치 오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그녀의 입에선 쉴새없이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그것을 잠자코 듣던 아딘은 그녀의 말이 끝날 때 쯤 입을 열었다.
“상단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지금 상단의 총수는 누굽니까?”
“총수요? 어…… 제가 알기론 명목상으로는 조던 피터슨 씨인데 실제로 그분은 도장 찍는 역할만 하고 있어요. 여전히 실권은 아버지랑 오라버니에게 있죠. 다만 두 분 모두 공적으로 지위가 있는 만큼, 대놓고 상단 일에 개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여전히 상단의 실권은 피터 잭슨 시장이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까?”
“그렇죠?”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리 잭슨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요?”
“사실 제가 여기에 온 건 아가씨에게 오랜만에 인사하려는 것도 있지만, 사업적으로 잭슨 상단의 총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게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어머, 스미스 씨도 그럼 어디서 상단을 운영하기 시작하신 거예요?”
“상단…… 보다는 좀 규모가 큰 무언가를 운영하는 중입니다.”
“어머. 잘됐네요. 솔직히 렝고스에서 스미스 씨가 보여주신 모습을 보면서 느꼈지만, 떠돌이 여행자로 썩기에는 아깝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토리 잭슨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모습에 아딘은 웃음을 가볍게 터뜨린 후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오늘 저녁에라도 아가씨를 동반해서 피터 잭슨 시장과 만나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아딘의 말에 토리 잭슨은 살짝 난색을 표했다.
“요즘 오라버니가 바쁘셔서…… 지금 며칠째 시청에서 돌아오고 계시질 않고 있으세요. 벨로디나에서 일이 터지는 바람에 파라곤의 상인들이 모두 시청에 몰려들고 있어서 말이죠.”
“그 벨로디나 일과 관련하여 할 말이 있습니다.”
“벨로디나 일로요?”
토리 잭슨은 의아한 눈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집으로 와 달라고 서신 한 장 쓰십시오. 제가 왔다고 이야기하면, 아무래도 달려오시지 않겠습니까?”
아딘의 말에 토리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오라버니도 좀 쉬긴 하셔야 해요. 계속 저렇게 시청에서 일만 하시다간 과로로 쓰러지실 수도 있으시니까요.”
* * *
광명력 993년 5월 16일 초저녁.
거대한 4두 마차가 대로를 지나 시청에서 잭슨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 내부에선 피터 잭슨이 피로에 찌든 얼굴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 해서 그가 자고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토리의 은인이 찾아 왔다는데 안 가볼 수도 없고…….’
온몸의 근육 하나하나가 마치 물먹은 솜처럼 느껴질 만큼 피곤했지만, 그는 시청에서 며칠간 퇴근하질 못했다.
벨로디나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혁명으로 혼란이 극대화된 가운데 중앙 정부는 침묵하고 상인들은 난리를 피우는 만큼, 시장 입장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벨로디나에 투자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이야. 아버지의 혜안이 빛을 발한 거지.’
잭슨 상단의 경우 벨로디나에 직접 투자를 하지 않음으로서 큰 혼란이나 손해는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잭슨 상단과 직간접적으로 거래를 하는 중소 상단들이 문제였다.
그들이 일거에 파산한다 해서 잭슨 상단 자체에 큰 타격이 가거나 하진 않을 터였다.
문제는 피터 잭슨이 파라곤의 시장이라는 공적 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잭슨 상단의 실소유주이자 실질적으로 총수를 뒤에서 조종하는 최고 경영자로서는 무관할 일이, 시장으로서는 매우 신경을 써야 할 일이었기에 피터 잭슨은 이렇게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충 밥이나 먹이고 돈이나 몇 푼 쥐어주고 보내면 되겠지.’
분명 토리 잭슨을 구해준 사람이니 만큼, 그에게나 가문 전체적으로나 은인이긴 했다.
다만 찾아온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좀 내가 심신에 여유가 있을 때 찾아 왔다면 사업적 이야기니 뭐니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피터 잭슨은 한숨을 돌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그가 막 얕은 잠에 들려 할 때, 마차는 잭슨 저택 마당으로 들어서 멈췄다.
“끄으윽…….”
피터 잭슨은 마치에서 내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가 기지개를 켜자 우드득하는 소리가 그의 전신에서 퍼져 나왔다.
‘힘들군.’
피터 잭슨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라버니!”
저택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토리 잭슨이 피터 잭슨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피터 잭슨은 힘겹게 웃으며 토리 잭슨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미안해. 내가 그동안 바빠서 말이야.”
“알고 있어요, 오라버니.”
“손님은?”
“소연회장에서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계세요.”
“그래? 허허. 이거 은인을 기다리게 하고, 참 결례를 범했구나, 내가.”
그러면서 피터 잭슨은 토리 잭슨과 함께 소연회장으로 향했다.
“하인들은 다 어디갔니?”
“스미스 씨가 하인들은 가급적 소연회장에서 멀리 떨어져 주길 바라셔서요.”
“그래?”
피터 잭슨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참 유난을 떠는구만.’
그렇게 피터 잭슨은 은인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감정을 지닌 채 소연회장에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피터 잭슨 시장.”
그리고 그곳에서 은인과 만났을 때, 피터 잭슨은 얼음장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토리 잭슨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피터 잭슨을 바라봤다.
피터 잭슨은 한동안 얼어붙은 채 아딘을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이, 이…… 이게…… 이게 무슨…….”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아라곤에서 각 도시의 시장들에게 보내 준 벨로디나 동향 보고서에 실려 있던 아딘 콘스탄틴의 초상이었다.
비교적 아딘의 신체적 특징을 잘 살려낸 초상은 실제 아딘의 모습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촛불 아래 빛을 발하는 담갈색 머리와 눈동자는 초상 속 인물과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피터 잭슨은 아딘을 바라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피터 잭슨을 향해 아딘은 품에서 콘스탄틴 왕실 인장을 꺼내 들어 보여 주었다.
“남의 나라에서 왕족으로서 그리고 혁명 정부 수장으로서의 대우를 바라진 않소. 뭐, 어떻게 보면 지금 내 나라와 그대의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한창이니.”
아딘의 말에 피터 잭슨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아딘과 피터 잭슨을 번갈아 보던 토리 잭슨도 그제야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하곤 놀란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스, 스미스 씨…… 서, 설마……”
그런 토리 잭슨에게 아딘은 말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토리 잭슨 아가씨.”
아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토리 잭슨에게 제대로 자기를 소개했다.
“벨로디나 왕국 제18대 국왕 블라디미르 일리치 콘스탄틴 폐하의 장자이자 벨로디나 혁명 정부 혁명중앙위원회 의장인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이라고 합니다. 뵙게 돼 반갑습니다, 토리 잭슨 양.”
아딘의 자기 소개에 토리 잭슨은 입을 벌린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피터 잭슨은 계속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입으로 “이게 무슨 일이야?”를 중얼거리며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아딘은 이야기했다.
“갑작스럽게 적국에서 찾아온 손님이지만, 그래도 이왕 저녁 식사를 하는 거, 자리에 앉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서 아딘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