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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31화 (131/175)

131 잭슨 가문 (1)

광명력 993년 5월 16일 아침.

제니스 공화국 동부 대도시 파라곤.

파라곤의 지배 가문인 잭슨 가문의 대저택.

총 5층에 달하는 석조 건축물의 3층 동쪽 끄트머리.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중년 하녀의 물음에 방의 주인인 토리 잭슨은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 대답했다.

“응. 일어났어요.”

“들어갈게요.”

“네.”

하녀가 곧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침대에 앉은 토리 잭슨을 위해 세숫물을 가져다 주었다.

“간밤에 좋은 꿈 꾸셨어요?”

하녀의 물음에 토리 잭슨은 멍하니 허공을 지켜보다가 흠칫 놀랐다.

“으, 응?”

“표정이 평소보단 좋아 보이시네요.”

“그, 그래요?”

“네.”

하녀의 말에 토리 잭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꿈…… 이라면 좋은 꿈이겠죠. 절 악몽에서 구해준 사람이 꿈에 나타났거든요.”

그녀의 말에 하녀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오크를 다 쳐 죽였다는 용사요?”

“응. 맞아요. 그 사람.”

“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어요?”

토리 잭슨은 침대에서 내려와 하녀가 물을 올려둔 원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녀에게 말했다.

“구체적인 대화는 기억이 안 나요. 다만…… 그 사람이 저한테 뭔가를 원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가씨한테요?”

“그게 뭔진 모르겠는데, 분명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일 거예요. 표정이 간절했거든요.”

그러면서 토리 잭슨은 세안을 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녀가 씻는 것을 지켜보던 하녀는 그녀가 세수를 끝마치자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꿈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기도 해요. 신들께서 그렇게 종종 하시죠.”

“그래요?”

“그럼요. 건국의 아버지들도 꿈에서 신들께서 나타나셔서 용기를 주셨기 때문에 이 나라의 초석을 세우실 수 있었잖아요.”

“그런가요?”

토리 잭슨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거울을 바라봤다.

‘존 스미스…… 잘 있겠지? 로제하고의 관계는 잘 정리했으려나?’

집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8개월 가까이 됐다.

그녀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라비 파라곤 시장 피터 잭슨과 부친 원로원 의원 앤드루 잭슨은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토리 잭슨은 틈날 때마다 자신을 구해준 남매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바쁜 일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번쯤은 파라곤에 들를 법도 한데 말이야.’

제대로 은혜를 갚은 것도 없이 구출 순간부터 집으로 오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받기만 했던 은인을 떠올리며 토리 잭슨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하녀는 화제를 돌렸다.

“참, 그거 아세요?”

“뭘?”

“어제 세인트 파라곤 산에 별똥별이 떨어졌대요.”

“별똥별?”

“네. 어제 제 남편이 밤에 순찰하다가 봤다는데, 글쎄 황금색 별똥별이 산 중턱에 떨어졌다는 거 있죠?”

“소원은 빌었데요?”

“어휴. 그 인간이 퍽이나 그때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었대요.”

“아쉽네. 그때 딱 소원을 빌었으면 좋았을 건데.”

“노름에서 이기게나 해달라는 소원 빌고 바로 투전판으로 가지나 않았으니 다행이죠.”

“아직도 남편이 노름판 돌아다녀요?”

“자기 말로는 반년째 안 가고 있다는데 누가 아나요?”

그렇게 하녀와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아침 단장을 마친 토리 잭슨은 1층으로 내려갔다.

“오라버니는요?”

1층 식당에서 토리 잭슨은 아무도 없음을 보고는 집사장에게 물었다.

“시장님께서는 어제도 시청에서 밤을 지내셨습니다.”

토리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디나 일 때문에 오라버니도 바쁘신가 봐요.”

“아무래도 잭슨 가문은 직접적으로 벨로디나에 투자한 게 없다지만, 파라곤에 있는 많은 상인들이 그곳에 투자를 해둔 상황이어서 말입니다.”

토리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곁에서 자리를 지키던 집사장은, 그녀가 디저트로 나온 사과를 먹을 때쯤, 그녀에게 서신 하나를 건넸다.

“시장님께서 보내오신 것입니다.”

“오라버니가요?”

“네. 오늘 아침에 왔습니다.”

토리 잭슨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신을 받아 펼쳤다.

그녀에 대한 애정이 담긴 인사말과 함께 10월부터 상단 업무에 복귀해주길 바란다는 요청이 담긴 서신이었다.

토리 잭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신을 품에 집어 넣었다.

“잘 먹었어요.”

그녀는 집사장에게 인사를 남기고 다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지난 8개월간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간 일이 없었다.

집안에서 누군가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괜찮았지만, 대문 밖을 벗어나는 순간 주위에 누가 있건 상관없이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일이 반복됐다.

사방의 공간이 자신을 조여오는 느낌에 몇 차례 실신까지 했고, 결국 그녀는 집안에서만 줄곧 생활했다.

“휴우……”

언제쯤 자신의 상처가 치유받을 수 있을까,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우려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봅니다?”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들린, 익 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토리.”

방문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선 남자.

“스, 스미스 씨?”

아딘은 자신의 가명을 언급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토리 잭슨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그래서, 지금 의장이 어디 계신 거요?”

콘스탄티노바 왕궁, 봄의 궁전 혁명중앙위원회 회의실.

의장석에 앉은 의장 대리 안톤을 향해 불카르 아시오게가 물었다.

“의장님께서는 기밀을 요하시는 일을 위해 몰래 움직이시는 중입니다. 저도 자세한 행선지는 모릅니다.”

“아니, 그럼 우린 지금 의장께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거요?”

“의장님께서는 단지 잠시 자리를 비우셨을 뿐입니다. 의장님의 권한을 위임받아 대리하는 저를 중심으로 당분간 회의가 진행될 뿐,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내가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소. 혁명의 핵심이, 구심점이 의장인데 그런 의장이 사라졌다는 게 문제 아니냔 말이오?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여기저기서 다른 위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하십시오, 군무위원. 의장님이 어디서 봉변을 당하실 만큼 허술한 분이 아니심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끄응…….”

불카르 아시오게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결국 입을 다물었다.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는지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딘 콘스탄틴이 우리를 버렸다?’

물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자신이 일구어 놓은 혁명 정부를 버리고 도망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우리한테 공식적으로 통보하는 것도 아니고 르보프에게만 몰래 이야기하고 가는 건…….’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안톤을 바라봤다.

불카르 아시오게를 조용히 시키고, 새로 임명된 위원들에게 아딘이 남겼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빅토르 다비도프는 생각했다.

‘결국, 자신에게 가장 충성을 다 바치는, 그것도 무조건적인 충성을 다하는 구시대적 기사도를 따르는 인물에게 권력을 집중시킨다는 건가?’

왕이 국정을 장악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군권을 장악하여 스스로 대장군격인 위치에 올라선 후 군부 정치를 하는 방법.

막대한 부를 이용해 모든 주요 귀족들을 매수하여 금권 정치를 하는 방법.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친위 세력을 구축하여 하명 정치를 하는 방법.

‘그리고 아딘 콘스탄틴은,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군부 정치와 하명 정치를 동시에 하려고 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혁명 지도자이자 전장의 최선봉에 선 전쟁 지휘관의 상징을 모두 가진 아딘이 자신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안톤을 내세워 국정을 운영하는 것.

그것은 결코 빅토르 다비도프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꿈꾸었던 새로운 벨로디나에서 아딘의 역할은 상징적이고 의전적인 국왕일 뿐, 그 어떠한 정치 권력에도 발을 담그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아딘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가 가장 우려하는 형태의 국왕이 되려 하고 있었다.

‘당장에는 막을 방법이 없어. 하지만 계속 이렇게 일이 진행되도록 두고 볼 수도 없고.’

그런 생각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건너편에서 불카르 아시오게는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 * *

“바쁜 사람이 왜 일개 현장 지휘관을 부르고 있어요?”

정오.

봄의 궁전에 자리한 군무총괄위원 집무실에 찾아온 다리아의 첫 말은 그것이었다.

“거, 되게 틱틱거리네. 좀 살갑게 해 줄 순 없니?”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다리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배급받은 밀가루랑 감자 가지고 싸움 나는 인간들 중재하는 일을 한 이틀만 해 보세요. 입에서 말이 곱게 나오나.”

“어쩌겠냐? 당장에 전쟁할 일이 없는데.”

“그냥 크리미아인지 뭔지에 있는 새끼들 다 쓸어버리면 안 돼요? 뭘 밍기적거리고 있어요?”

“전쟁의 영역은 일단 끝났어. 이제는 외교랑 정치의 영역이야.”

“허. 벨로디나 임금님한테 봉급 받아먹으니 벨로디나 사람 다 되셨네요? 말하시는 게?”

“거 말뽄새하고는…… 일단 거기 앉아. 앉아서 이야기하자.”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다리아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순순히 원탁에 앉았다.

불카르 아시오게도 원탁으로 다가가 앉은 다음 그녀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

다리아는 그대로 물을 쭉 들이켠 후 거칠게 잔을 원탁 위에 내려 놓았다.

“거, 좀 부드럽게 좀 행동해 봐라. 어디 그래서 아딘 콘스탄틴이 너하고 결혼하려고 하겠냐?”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다리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도 그 생각하고 있어요? 아딘 콘스탄틴은 로제랑 뭐가 있다니까요? 제가 거기에 낄 틈이 어딨어요?”

“얌마, 왕이 부인 하나만 어디 들이디?”

“벨로디나는 하나만 들인다던데요?”

“거 그거야 바꾸면 되는 거고. 야 들어 보니까 저기 샤펠 제국인가에서는 황제가 부인을 원하는 만큼 들일 수 있다더라.”

“그래서, 저보고 뭐 둘째 부인이나 첩이 돼 로제하고 싸우기라도 하라고요? 막 로제가 아들을 낳으면 암살하고?”

“아, 진짜 말을 좀…….”

다리아는 자신의 잔에 물을 따른 후 또 그것을 한 번에 넘겼다.

“그래서, 왜 부르셨어요? 고작 이 이야기하려고 바쁜 저를 부르신 거예요?”

그녀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고개를 흔든 후 살짝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너, 사람 하나 뒷조사 좀 해줘야 겠어.”

“뒷조사요?”

“네가 콘스탄티노바 치안 총괄 책임자잖냐. 적당히 괜찮은 애들로 구성해서 순찰대인 척, 그 인간 뒷조사를 해봐.”

“누구요?”

“빅토르 다비도프 외무총괄위원.”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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