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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30화 (130/175)

130 정치 (3)

광명력 993년 5월 14일 정오.

콘스탄티노바와 크리미아 사이에 자리한 소도시 데오그라드.

그곳 중심부에 자리한 버려진 주교성전의 예배당에 빅토르 다비도프와 불카르 아시오게가 제니스 공화국 3대 상단 부총수와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빅토르 다비도프는 코웃음을 치며 부총수들을 바라봤다.

부총수들은 헛기침하며 말을 아꼈다.

“곡물 무상 공급과 무관세 혜택을 조건으로 벨로디나에 있는 당신들 자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빅토르 다비도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제니스어를 모르는 불카르 아시오게에게 그대로 부총수들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통역을 들은 불카르 아시오게는 콧방귀를 뀌며 칼자루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벨로디나어로 부총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개인적으로 이런 협상을 싫어해. 이건 쿠만족이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야. 그냥 깔끔하게 칼부림으로 승부를 내고 이긴 놈이 다 가지면 되는 거 아닌가?”

벨로디나어를 알고 있음에도 제니스어로 꾸역꾸역 이야기하는 부총수들더러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불카르 아시오게의 흉흉한 기세에 부총수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외, 외교 협상에서는 혀, 협상 상대방에 대한 무, 물리적 영향력 행사가 어, 엄격히 금지되는 것이 과, 관례라는 점을 좀 명심해 주시면 조, 좋겠습니다.”

드라기 상단 부총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피식 웃었다.

“무력 사용은 외교의 연장이라는 옛 현인의 말도 기억해 주시면 좋겠소.”

그 말에 부총수들은 떨리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린 후 입을 열었다.

“어차피 벨로디나는 이미 우리 혁명중앙위원회가 통치하고 있소. 그대들이 원하건 그렇지 않건 그대들의 자산은 정당한 소유자에게 되돌아갈 것이오.”

그러자 루비오 상단 부총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 자산의 정당한 소유자가 바로 우리란 말입니다. 우리가 강도질이라도 해서 뺏은 줄 아십니까?”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가 정색하며 대꾸했다.

“노보로바야에 있는 그대들이 지은 호텔과 고급 음식점들, 그것들을 짓기 위해 부지를 구입할 때, 전통적으로 그 땅에서 살아오던 사람들더러 소유증명이 불가하단 이유로 여러 역사적 증거가 있음에도 강탈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소.”

그 말에 루비오 부총수는 입을 다물었다.

빅토르 다비도프가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왕실에서 관습적으로 소유해왔던 북부의 광산들, 당신들은 그걸 소유권 확립 명분으로 헐값에 산정해 마구잡이로 시장에 내놓았소. 그리고 말도 안 되는 헐값에 당신네들이 광산을 사들였고.”

빅토르 다비도프는 점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들은 오랜 세월 그곳에서 광산업을 하던 벨로디나 상인들과 광부들을 폭력적으로 내쫓고 그들 모두를 감자 한 소쿠리 사기도 힘든 수준의 일당을 받는 임금노동자로 전락시켰소.”

[쾅-!]

급기야 빅토르 다비도프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런 사례가 지난 1년간 이 나라 전역에서 확인됐소. 근데 지금 당신들은 정당한 권리 운운하며 강도짓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거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빅토르 다비도프는 부총수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우리의 요구 조건은 명확하오. 그대들이 무얼 원하건, 우리는 이미 그대들이 강탈해간 벨로디나의 정당한 자산을 되찾는 중이오. 헛된 희망 따위, 붙들고 있을 생각 하지 마시오! 일주일 뒤 이 시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날 때, 보다 진전된 이야기를 준비해야 할 것이오.”

그러면서 그는 예배당 밖으로 나갔다.

불카르 아시오게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칼 손잡이를 쥔 채 부총수들을 바라보며 벨로디나어로 말했다.

“다비도프 외무총괄위원은 그래도 협상을 하자는 사람이야. 근데 나는 협상보다는 전쟁을 하자는 쪽이거든?”

그러면서 그는 칼을 스스릉 뽑아갔다.

부총수들은 모두 안색이 노래진 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아주 당신네들의 그 허튼소리 덕분에 다비도프 위원의 입지가 혁명정부 안에서 위축될 지경이야. 뭐, 나야 좋지. 다비도프 위원의 입지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전쟁을 하자는 내 입지는 높아져 갈 거니까.”

그렇게 이야기한 후 불카르 아시오게는 반쯤 뽑은 칼을 도로 집어넣고 예배당을 나섰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도 한동안 부총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연기 잘 합디다?”

콘스탄티노바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불카르 아시오게는 빅토르 다비도프를 향해 말했다.

빅토르 다비도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는 아시오게 위원님은 각본대로 잘 하셨습니까?”

“뭐, 약간의 추임새를 더 넣어서 잘 했수다. 칼을 한 반쯤 뽑았는데, 다 뽑으면 그 세 놈 똥오줌 지릴 것 같아서 중간에 멈췄지요. 흐하하하!”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도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의장님 말대로 저놈들이 저런 식으로 나오니 우리는 우리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이까?”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지 않겠습니까?”

“듣자 하니 크리미아 쪽에서도 당장 다비도프 위원이 말만 하면 폭동을 일으킬 사람들이 득시글하다던데?”

“과장된 소문입니다. 득시글까지는 아니고, 작은 소요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민중의 궐기는 내부에서의 작은 소요와 외부에서의 거대한 유입에 따라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거고 말입니다.”

“하하하. 암요. 그렇겠지요.”

웃음을 터뜨리는 불카르 아시오게를 바라보던 빅토르 다비도프는 이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데오그라드에서 콘스탄티노바로 이어지는, 그리 길지 않은 길의 양쪽에 펼쳐진 드넓은 논에선 농민들이 힘겹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혁명은 저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코앞에서 평화냐 확전이냐를 가를 담판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늘 그렇듯 열심히 일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혁명을 꿈꾸었건만, 막상 혁명의 현실은 빅토르 다비도프가 바라는 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이대로 다시 옛 벨로디나 왕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난 무얼 위해 목숨을 걸고 집창촌 다락방에서 살았단 말인가?’

그의 내적 갈등은 곧 긴 한숨의 모습을 하고서 외부로 표출됐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불카르 아시오게는 생각했다.

‘묘하게 이 사람은 과몰입하고 있어.’

불카르 아시오게 입장에선 솔직한 말로 제니스 공화국이 얼마나 벨로디나를 착취했느냐는 관심 밖이었다.

애초에 그는 동방의 쿠만 땅에서 사냥이나 하던 쿠만족 전사였고, 벨로디나는 1년에 몇 번씩 담비 가죽을 사러 곡식과 무기를 짊어지고 오는 상인들의 고향일 뿐이었다.

아딘과의 계약과 딸 다리아를 아딘의 부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개인적 야망 때문에 자신은 열심히 하는 것일 뿐이었다.

반면 그의 관점에서 빅토르 다비도프는 다소 과하게 혁명이란 것에 몰입하는 경향을 보였다.

‘르보프는 아딘 콘스탄틴한테 충성하니까 그러는 거지만, 이 인간은 정작 아딘 콘스탄틴에게 딱히 충성심을 가진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불카르 아시오게는 어깨를 으쓱하며 반대쪽 창문을 바라봤다.

그쪽으로도 마찬가지로 농민들이 밭을 가는 대지가 보였다.

‘아마 쿠만 땅이 여기처럼 막 농사가 잘되었다면 우리도 전사가 되지는 못했을 거야.’

사냥과 육식은 쿠만족의 유전자에 있는 거인족의 DNA를 유지시켜 주었다.

만약 편하게 농사나 짓고 밀가루나 감자로 된 음식만 먹었더라면, 자신들 역시 벨로디나인처럼 됐을 것이라고 불카르 아시오게는 생각했다.

‘쿠만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정착하는 애들이 만약 계속 후손을 낳고, 그 후손들이 사냥꾼이 아니라 농사꾼으로 큰다면…… 걔들도 결국에는 벨로디나인처럼 되겠지?’

뭔가 알 수 없는 씁쓸한 감정을 느끼며 불카르 아시오게는 이내 눈을 감았다.

* * *

“전쟁은 최후의 선택지가 되어야만 해.”

불카르 아시오게와 빅토르 다비도프가 콘스탄티노바로 귀환하고 있던 시간, 아딘은 봄 궁전에 자리한 집무실에서 안톤과 독대한 채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혁명군은 이미 공세종말점에 도달했어. 여기서 크리미아에 있는 25,000의 용병을 상대하고 그곳을 점령하려면 농민을 징집해서 정예 병사로 길러야만 해.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지.”

아딘의 말에 안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사옵니다, 의장님. 당장 어제 재무와 식량총괄위원이 올린 보고서만 보더라도 더 이상의 전쟁은 불가능하옵니다.”

안톤의 말에 아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안톤을 향해 말했다.

“뭐, 나하고 르보프 경하고 지난번 습격단원들이 소수 정예로 침투해서 크리미아에 있는 용병대장들 목을 다 따버리는 식으로 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랬다간 아마 제니스 공화국에서 아예 대대적인 침략을 하기로 방향을 바꿀 거야.”

그렇게 된다면, 전술에선 이기겠지만 전략에선 지는 것이라 아딘은 말했다.

안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나 르보프 경은 어떻게든 살아는 남겠지. 도망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됐다간 이 나라와 백성들은 더한 고통에 시달리게 될 거야.”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딘은 안톤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안톤은 의아한 표정으로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 내용이 위임장임을 확인하고선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의, 의장님. 이, 이게 무, 무슨 뜻이옵니까?”

“말 그대로 위임장이야. 내가 자리를 비우면, 내무총괄위원인 그대가 의장대리가 된다는 일종의 칙령이라고 봐도 좋겠지.”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딘은 또 다른 종이를 한 장 더 건넸다.

거기에는 혁명중앙위원회 위원들의 서열이 나열돼 있었다.

1위는 의장 아딘이었고 2위는 내무총괄위원 안톤 르보프, 3위는 군무총괄위원 불카르 아시오게 그리고 4위가 외무총괄위원 빅토르 다비도프였다.

“정보총괄위원?”

그리고 빅토르 다비도프 바로 다음 서열이 정보총괄위원이었다.

“로제 아가씨께서도 위원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당장은 아니고. 자네가 내 대리 역할을 끝낼 때쯤 공식적으로 로제도 임명하고 회의에 참석시킬 예정이야.”

안톤은 아딘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실 생각이시옵니까?”

안톤의 물음에 아딘은 씩 웃었다.

“제니스 놈들이 비겁하게 먹을 걸로 인질 잡고 협상을 하려고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어디 가서 구걸을 해서라도 우리 백성들이 먹을 식량을 사 와야지.”

아딘의 말에 안톤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미리 약조하신 곳이라도 있으신 것이옵니까?”

그 말에 아딘은 살짝 과거를 회상한다는 양 허공을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창 돌아다닐 때, 씨를 좀 뿌려둔 게 있어. 그게 열매를 맺어 나에게 줄 때가 지금이 아닐까?”

뜬구름 잡는 소리였지만, 안톤은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여 의장님의 역할을 대리하여 수행하겠사옵니다.”

안톤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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