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정치 (2)
광명력 993년 5월 12일 오전.
콘스탄티노바 왕궁 봄 궁전.
이제는 혁명중앙위원회 위원회의실로 쓰이는 어전에서 아딘은 새로이 위원의 자리에 오른 다섯 사람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었다.
식량, 법무, 조세, 치안, 재무까지 총 다섯 개 분야의 분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각 위원회를 담당할 위원들은 모두가 안톤이 선출한 사람들이자 과거 블라디미르 2세 치세하에 중간 직업 관료로 활약했던 이들이었다.
“여러분들은 현재 가장 중요한 혁명 과업 중 하나인 초석 세우기를 위해 세워진 분들입니다.”
그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곧장 회의를 열며 아딘은 발언했다.
“찬탈자 유리 콘스탄틴과 그를 앞세워 이 나라 국토와 백성을 착취한 제니스 공화국의 세력은 사실상 벨로디나에서 일소된 상태입니다. 유리 콘스탄틴과 그의 음란한 부인은 현재 가을 궁전 첩탑에 유폐돼 있고, 제니스 공화국의 점령군은 크리미아에서 당장에라도 본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아딘은 발언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제니스 공화국은 강대한 국가입니다. 그들은 무역과 상업을 통해 돈으로 세상 모든 것을 사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곳을 점령한 지난 1년간 이 나라의 지도층이라던 귀족들 가운데 대다수는 그들의 돈에 매수가 됐으며 지금도 시골 지역을 중심으로 반란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아딘의 말에 새로이 임명된 위원들의 얼굴이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암울한 지난 1년을 뒤로하고 다시 빛을 발하게 됐다는 기대감에 싱글벙글하던 것도 잠시였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책무의 무게감을 알아차린 이들은 무거운 심정으로 아딘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당면 과제인 제니스와의 협상은 외무총괄위원과 군무총괄위원께서 해결해 주시겠지만, 그 협상 이후 벨로디나의 재건에 관하여서는 여러분들 모두가 힘을 쓰셔야 합니다.”
아딘은 찬찬히 다섯 사람의 신임 총괄위원들을 바라보며 발언을 마쳤다.
“여러분들의 어깨에 이 나라의 국토와 백성, 역사 그리고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이 점을 명심하시고 항상 여러분들의 자그만 결정 하나하나가 새로이 탄생할 혁명 벨로디나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딘의 발언이 끝나자 다섯 위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한 목소리로 외쳤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장님!”
그 모습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당분간 여기서 지내면 돼요.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을 테니까, 뭐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마시고 계세요.”
로제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문을 닫았다.
호화로운 왕궁 별채-수국 정원에 딸린 99개의 게스트룸 가운데 벌써 12개를 채운 그녀는 게스트룸 복도를 지나치며 가볍게 한숨을 돌렸다.
“이제 여덟 남았나?”
로제는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거기에는 아딘이 적어 준 괴짜 은둔 마법사들의 위치와 특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중 12명의 이름 위에는 줄이 2개가 쳐져 있었고, 나머지 8명의 이름만이 깨끗하게 아딘이 써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라버니는 통 바쁘셔서 얼굴도 못 보고 그냥 또 가야겠네.’
로제는 가만히 수국 정원의 드넓은 마당에 서서 겨울 궁전을 바라봤다.
수국 정원에서 서남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겨울 궁전은 이름대로 새하얀 벽돌로 지어져 있었는데 오늘따라 유달리 그것이 차갑게 느껴진다고 로제는 생각했다.
‘일단 그다음 사람이…… 보자…… 뭐야? 제일 가까운 게 카판 대평원 한복판이야?’
로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이내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종이를 도로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막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한 근위병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의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근위병의 말에 로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디로 가면 되죠?”
“봄 궁전 집무실에 계십니다.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근위병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근위병이 모는 마차를 타고 봄 궁전에 도착한 로제는 곧장 궁전 최고층에 자리한 의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라버니!”
로제의 부름에 책상에 앉아 두루마리를 살피던 아딘이 씩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수고가 많아, 로제.”
“아니예요. 오라버니가 하시는 일에 비하면 수고랄 게 있나요, 뭐. 히히.”
“와서 앉아. 곧 차가 나올 거야.”
“네!”
아딘은 로제를 귀빈 응접용 원탁에 앉혀 놓곤 다시 두루마리를 살폈다.
로제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궁전 관리인이 차를 두고 나가자 그제야 아딘은 두루마리를 접고 로제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꼭 하루 평균 2명씩은 모셔 왔구나, 로제?”
아딘의 말에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위치를 특정해 주신 덕분에 쉬웠어요.”
“아니야. 아무리 위치를 특정했다고 해도 괴짜들이 걸어 둔 마법을 파훼하고 들어가서 설득한 건 로제야. 이번 일은 사실상 로제 네가 다 한 거야. 이 공로는 반드시 혁명 정부에서 인정될 거야.”
아딘의 말에 로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냥 오라버니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공로를 인정 받고 그럴 마음 때문이 아니라.”
“알아. 그래도 확실하게 해둘 건, 확실하게 해 둬야 해.”
아딘의 말이 단순한 공치사 이상의 것임을 로제는 순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조심스럽게 아딘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따로 생각해두신 게 있으신가요, 오라버니?”
그녀의 물음에 아딘도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네가 20명의 괴짜 은둔 마법사들을 모두 모으면, 그 사람들을 주축으로 해서 나를 위한 첩보 조직을 만들어 운영해 줬으면 해.”
“오라버니를 위한 첩보 조직이라구요?”
“응. 첩보 조직은 네가 담당할 정보총괄위원회 산하 비밀 조직이 될 거야.”
“정보총괄위원회요?”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제에게 말했다.
“난 로제 네가 혁명 정부에서 정보총괄위원의 직을 맡아 줬으면 싶어.”
로제는 눈을 껌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딘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샤펠 제국도, 제니스 공화국도 그리고 옛 벨로디나 왕국도 모두 자체적으로 최고 지도자 산하에 정보 조직을 두고 있었어.”
하지만 그것들 중 체계화된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최고 지도자의 측근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인맥과 자본을 동원해 활동하는 것이 그들이 지닌 정보 조직의 실체이자 전부였다.
“그런 측면에서 빅토르 다비도프의 체르노비치는 제법 세련되고 구체적인 형태의 정보 조직이라 할 수 있어. 비록 비밀 결사이긴 했지만.”
그리고 그런 체르노비치를 와해하고 빅토르 다비도프로 하여금 정보 관련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하는 것이 자신의 뜻임을 아딘은 로제에게 숨기지 않고 밝혔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위험한 인물이야.”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라버니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나요? 옛날에는 오라버니의 반대자이긴 했는데…….”
“어디까지나 나를 민중을 위한 상징적 우상으로 써먹기 위해 충성을 바치고 있을 뿐이지, 그 마음에 진실된 충심은 없어. 르보프와 같은 유형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로제는 가만히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다시 아딘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다비도프 그 사람은…… 오라버니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그 물음에 아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체르노비치 중간 간부급 인사들 가운데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행정관에 임명했어. 그리고 그 모든 행정관은 내무총괄위원인 르보프에게 모든 걸 보고하고 결재를 받지.”
아딘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반면 다비도프에게는 외무총괄위원이란 자리만 줬어. 그를 위한 관료는 하나도 없지.”
아딘이 씩 웃으며 치아를 드러냈다.
“당연히 깨닫지 않았을까?”
아딘의 말에 로제는 우려 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역으로 그 사람이 오라버니를 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아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되는 걸 방지하려고 내가 일부러 최전선에 나섰잖니.”
아딘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노보로바야에서부터 콘스탄티노바까지, 나와 함께한 쿠만족 전사들은 나를 위대한 전사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나의 지휘를 받은 콘스탄티노바 민병대와 민중도 나를 구세주처럼 생각하고 있지.”
그리고 그러한 관념은,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적 감정으로 민중 사이에서 퍼질 것이라고 아딘은 이야기했다.
“다비도프는 나를 그저 민중을 혁명에 동참하게 하기 위한 안전장치 정도로나 생각했겠지만, 난 그 이상이 됐어. 쿠만족 전사와 민병대 그리고 일반 민중으로부터 확실한 지지를 받고 있는 나를 과연 그가 칠 수 있을까? 민중은 그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는데?”
아딘의 말에 로제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로제에게 아딘은 이야기했다.
“로제 네가 할 일은 비밀 정보 조직을 운영하는 것뿐만이 아니야. 앞으로 각 지역마다 파견될 민정관들에 대한 총괄 통제도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민정관이요?”
“각 지역의 자잘한 정보부터 중요한 정보까지 거의 모든 것들을 수집하는 사람들이야. 작게는 농촌의 소가 몇 마리인지부터 크게는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각종 범죄 음모까지.”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바빠지겠네요?”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들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바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로제. 내가 경계하는 다비도프조차도 제니스 공화국과의 평화 협상 문제로 씨름을 하고 있는 실정이야.”
아딘은 가만히 차를 쭉 들이켰다.
“지금은 모두가 바쁜 때야, 로제. 그리고 아마도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만스러운지 다소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럴 수도 있지만…….”
로제가 말끝을 흐리자 아딘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로제는 찻잔을 들어 쥔 채 한숨을 포옥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전 옛날이 그리워요. 오라버니와 함께 슈드 자치령에서부터 시작해 여행을 하던 그 시절이요. 뭐, 옛날이라기엔 그렇게 또 오래 전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러면서 그녀는 차를 한 입에 훌러덩 다 넘겨버렸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딘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언제까지 제가 어린아이일 수는 없듯이, 언제까지 여유롭게 오라버니랑 여행만 하면서 살 수도 없지 않겠어요?”
로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전 또 한 사람 잡으러 갈게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녀는 아딘에게 가볍게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런 로제를 아딘은 붙잡았다.
“오늘은 좀 쉬는게 어떻겠니?”
아딘의 말에 로제가 뒤로 돌았다.
“나하고 같이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자, 로제.”
그 말에 로제의 표정이 환해졌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