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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28화 (128/175)

128 정치 (1)

“잘 했습니다, 다비도프 위원.”

아딘의 칭찬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저 고개를 한 차례 숙이며 웃을 뿐이었다.

“흐허허. 거 나야 뭐 외교에 대해 뭘 알겠냐만, 다비도프 위원이 아주 야무지게 잘 하더구만. 잘 했습니다. 흐허허.”

불카르 아시오게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슬쩍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봤다.

“아시오게 위원께서 동석하신 덕분에 기선 제압에 성공한 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도 종종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허. 나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다비도프 위원.”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 덕담하는 것을 지켜보던 아딘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본론을 이야기했다.

“아마 공화국 측에서도 당분간은 생각을 좀 해야 할 겁니다. 우리의 요구가 우리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지만, 저들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 어차피 관리도 제대로 못해서 적자 투성이라면서 뭐 그리 따지는 게 많답니까? 어차피 그네들 의장께서 거병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여기서 철수했을 놈들 아닙니까?”

불카르 아시오게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딘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막상 모든 걸 잃는다 생각하니 아쉬운 게 많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공화국 놈들이 수전노라는 말은 동방의 얼어붙은 쿠만 대지에도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빌어먹을 것들. 에잉.”

불카르 아시오게의 반응에 아딘은 한 차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다른 세 위원들을 모두 한 차례씩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우리는 저쪽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해서 하면 되는 겁니다.”

아딘의 시선이 안톤에게 고정됐다.

“르보프 위원께서는 조속한 시일 내에 세무와 치안, 농업 그리고 임업에 관한 사무를 총괄할 위원들을 추려 나에게 보고해주십시오.”

안톤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혁명 정부가 성공적으로 과도기적 과업을 끝마치고 정식으로 수립될 정부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현재 혁명 벨로디나의 기반을 닦는 작업이 여러분들의 어깨 위에 있으니 모두 그 무게감을 견디시며 맡은 바 소임을 끝까지 다 하시길 바랍니다.”

아딘의 말에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가 끝날 분위기를 향해 나아가자 빅토르 다비도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찬탈자 내외의 재판은 언제부터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물음에 아딘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어 답했다.

“조속한 시일 내로 혁명 재판소가 설치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난 1년 반 동안 이 나라를 수탈하는 외세에 빌붙었던 매국노들의 처단을 위한 재판이 민중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혁명중앙위원회 의장이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사람에 대한 처분을 결정할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그거야말로 혁명 정신을 위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딘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빅토르 다비도프도 겉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광명력 993년 5월 7일 새벽.

콘스탄티노바 외곽 집창촌.

한때 자신의 은신처였던 왕할멈의 다락방에서 빅토르 다비도프는 오랜만에 왕할멈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의장이 굉장히 정치적인 판단을 하고 있어, 왕할멈.”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을 왕할멈은 묵묵히 듣기만 할 뿐이었다.

“분명 본인도 유리 콘스탄틴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한데,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진 않나 봐. 구태여 재판소를 따로 설치해서 처벌하겠다는 걸 보면 말이야.”

왕할멈은 빅토르 다비도프의 잔에 차를 따랐다.

“혁명중앙위원회가 내부 회의 끝에 유리 콘스탄틴에 대한 사형을 선고한다면 도덕적으로 조카가 삼촌을 죽인 친족살해자가 되겠지만, 민중으로 구성된 혁명 재판소에서 유리 콘스탄틴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면 그건 민중의 뜻이 되는 거겠지.”

빅토르 다비도프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왕할멈을 보며 물었다.

“왕할멈이 보기엔 어때?”

“뭐가 말이우?”

“아딘 콘스탄틴을 혁명의 상징으로 내세운 내 결정. 맞는 결정인 것 같나?”

그 물음에 왕할멈은 코웃음을 치며 자기 잔에 차를 따랐다.

“나는 처음부터 말했잖수. 민중을 위한 나라를 만들 거라면서 왕족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모순이라고.”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

왕할멈이 찻잔을 들고서 말을 이었다.

“아딘 콘스탄틴이 정치적 야망이 강한 사람이었던 건 누구나 알고 있수. 그 인간이 망나니였던 거야 귀족들이나 알고 있었다지만.”

왕할멈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런 야심 가득한 인간이 자기 삼촌의 손을 피해 도망했다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되돌아왔는데, 퍽이나 야망이 없었겠수?”

왕할멈의 말은 거기서 멈췄다.

하지만 그 말에는 빅토르 다비도프에 대한 힐난이 담겨 있었다.

‘그걸 감안하고 부른 거였지.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을 통제할 수 있다고 처음엔 생각했었다.

헉명의 주체가 될 민중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들 가운데 선별한 민병대가 혁명의 전위가 될 것이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혁명의 최전선에서 아딘이 날뛰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쿠만족 용병까진 그렇다 치자고. 본인이 직접 왕궁에 침투하고, 유리 콘스탄틴을 사로잡고, 왕궁을 지키던 5천 용병을 별다른 전투 없이 무장해제 시킬 줄 누가 알았겠어?’

빅토르 다비도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정치적 판단은 분명 혁명에 도움이 돼. 유리 콘스탄틴을 혁명 재판소에 세우겠다는 건 결국 차후 벨로디나가 법치를 하겠음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협상에서 강한 요구를 관철하려는 것은 향후 벨로디나가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겠음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문제는 혁명 이후였다.

‘저 칼날이 나를 향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빅토르 다비도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서 혁명을 뒤짚고 아딘 콘스탄틴을 축출하기 위한 작업을 할 수는 없어. 그렇게 하기엔 아딘 콘스탄틴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생각 이상이야.’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찻잔을 바라봤다.

‘내가 상처받은 여우를 끌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다 큰 호랑이를 끌고 왔어.’

“허허허…….”

그렇게 그의 새벽은 지나갔다.

* * *

5월 9일 초저녁.

마르코 루비오의 저택 응접실에 4명이 모였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는 건가? 이걸 우리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마르코 루비오의 분노에 크리스티나 콘테와 마리오 드라기는 모두 침음하며 턱만 만질 뿐이었다.

법무관 헨리 피셔는 가만히 세 총수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어느 것도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건 없지 않소이까? 응?”

마르코 루비오의 말에 마리오 드라기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곡물 무상 제공이나 10년 무관세는 뭐 충분히 수용 가능하다고 생각하네. 어느 정도 협상을 통해 구체적인 기한이나 양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줄여야겠지만. 하지만 벨로디나 내부에 있는 공화국의 자산에 대한 몰수는 수용 불가능한 것이지.”

그러자 크리스티나 콘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과정이야 어찌 됐건, 그건 우리가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구매한 우리 자산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나머지 총수들은 모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헨리 피셔가 입을 열었다.

“총수님들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그가 말끝을 흐리자 총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입에 쏠렸다.

헨리 피셔는 차로 목을 적신 후 말을 이었다.

“벨로디나 내의 우리 측 자산에 대한 동결 및 몰수 조치는 사실상 일방적 통보에 가까운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와의 상호작용이 필요 없는 조치 말입니다.”

그 말에 세 총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 보시오.”

마리오 드라기의 말에 헨리 피셔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곡물 무상 공급이나 무관세의 경우 우리 측에서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와의 상호작용 없이는 그 무엇이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 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산 몰수 조치는 우리의 동의가 없더라도 저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들에게 보낼 곡물이나 저들의 물건을 수입하고 거기에 관세를 면제할 법적 권한은 모두 이 땅에 있지만, 우리의 자산은 저들의 점령지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 말을 이해했다는 듯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사실 제일 큰 문제예요. 우리가 아무리 정당한 법적 권리를 이야기해 봤자, 사실 저쪽에서 야만적이게 그걸 무시하고 일방적인 행정 조치만 하면 끝이거든요.”

그 말을 헨리 피셔가 이어 받았다.

“그리고 사실 벨로디나는 애초에 무역이나 상업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아니었잖습니까? 농업과 목축으로 먹고사는 나라인 만큼, 우리가 경제적으로 보복 조치를 시행하더라도 큰 타격은 없을 겁니다.”

헨리 피셔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마르코 루비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법무관에게는 어떤 천재적인 묘안 같은 건 없나?”

그 말에 헨리 피셔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좀스럽긴 하지만, 곡물 무상 지원을 지렛대 삼아 어떻게든 우리의 자산을 지키는 방향으로 협상을 유도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코 루비오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허허. 뭐, 솔직히 이런 말 하면 그렇긴 하지만, 벨로디나 놈들 굶긴 덕분에 어쨌건 우리에게도 무기가 생긴 셈이야. 응? 흐허허허.”

마리오 드라기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리 고의는 아니었지만, 일부 박애주의자들이 식량을 공급하자고 할 때 그걸 무시한 덕분에 일이 이렇게 된 것 아니겠나?”

크리스티나 콘테만이 웃지 않은 채 그들의 말을 살짝 반박했다.

“결과적으로 벨로디나가 굶은 덕분에 혁명이 성공했던 것이기도 하죠. 애초에 그들이 굶지도 않았더라면 이렇게 일이 됐을까요?”

헨리 피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흠흠.”

“크흠.”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마리오 드라기와 마르코 루비오는 헛기침하며 차를 마셨다.

크리스티네 콘테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일단 피셔 법무관 말대로 부총수들에게 지침을 하달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는 걸로 하죠. 어쨌건 우리 입장에선 지금 당장 뭐라도 해야하니까요.”

“그렇게 하지.”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세 총수와 피셔 법무관의 회의는 좀스러운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쪽으로 결론이 난 채 끝났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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