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혁명 (5)
광명력 5월 2일 자정.
노보로바야로부터 서남쪽 방향으로 50k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 붉은 산.
봄이기에 푸르지만, 가을이 되면 산 전체가 단풍에 붉게 물들 예정인 이곳 정상에서 로제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기감을 활짝 열고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기감에 산 중턱에서 무언가가 잡혔다.
로제는 곧장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빠르게 산 중턱으로 내려간 그녀는 기감을 따라 어느 암석 앞에 멈춰 섰다.
한동안 암석을 바라보던 로제는 피식 웃으며 그것을 쓱 쓰다듬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손에서 강한 용의 힘이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용의 힘은 곧 암석의 형상을 뭉개기 시작했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있던 굳건한 암석은, 곧 그 형상이 와해됐다.
그리고 암석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딘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로제는 가만히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쉬익-! 쉬익-!]
얼마쯤 내려갔을까?
어둠 속에서 수백 마리에 이르는 뱀들이 나타나 로제를 바라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하지만 로제는 뱀들을 향해 가볍게 콧방귀를 뀐 후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수백에 이르던 뱀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로제는 계속해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뱀에 이어 곰, 호랑이 심지어 오거까지 다양한 맹수와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 로제의 손짓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로제는 계단 맨 아래에 자리한 드넓은 공간에 도착했다.
[크르릉-!]
그리고 그곳에서 로제를 맞이한 것은 공간을 가득 채운 거대한 푸른 용이었다.
[크우와아아앙-!]
푸른 용이 로제를 바라보며 포효했다.
하지만 로제는 냉소를 지으며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그 순간, 푸른 용이 순식간에 와해됐다.
그리고 푸른 용이 사라진 자리에는 잔뜩 겁에 질린 푸른 머리의 노파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로제는 가만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히이익-! 가까이 다가 오지 마!”
노파는 지팡이를 로제를 향해 내밀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바들바들 떨리는 지팡이를 바라보며 로제는 이야기했다.
“올가 크라쿠바.”
로제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노파는 화들짝 놀랐다.
“어, 어떻게…….”
그런 노파를 향해 로제는 말했다.
“당신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요. 큰 일을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한 사람이 있죠.”
노파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로제를 바라봤다.
로제는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로제의 손에서 푸른 불덩이가 생겨났다.
“당신은 환상 마법에 능하죠. 원한다면 용의 환영까지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해요.”
노파는 떨리는 눈으로 로제의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을 바라봤다.
“하지만 당신의 환상은 물리적 실체가 없어요. 그래서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죠.”
로제의 손에 있던 푸른 불꽃이 허공에 떠올랐다.
“과연 이 불꽃도 환상일까요? 이 불꽃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요?”
노파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 뭘 원하는 겁니까?”
한층 공손해진 노파의 태도에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내, 내 힘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쓸모가 있고 없고는 그분이 판단할 문제죠. 난 그분으로부터 당신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걸 수행할 뿐이에요.”
“나, 날 찾아오라고?”
노파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로제를 바라봤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세상에 단 한번도 드러난 적이 없었으니까.
“내 마법에는 물리적 실체가 있어요. 이걸 당신에게 사용하면 강제로 끌고 나가는 건 일이 아니겠죠. 어쩌실래요? 제가 끌고 나갈까요? 아니면 당신 발로 나갈까요?”
노파는 잠시 고민했다.
고민은 길어졌다.
로제는 그 정도는 기다려 주었다.
그녀가 콘스탄티노바로 데려가야 할 괴짜 은둔 마법사는 노파 말고도 19명이나 더 됐지만, 다행히 아딘이 그녀에게 기한을 정해 주거나 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 같으니…….”
노파의 말에 로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물품들 있으면 챙겨요. 콘스탄티노바까지는 공간이동으로 한 번에 갈 거고, 혹시 모를 충돌을 피하고자 계단 위까지만 걸어 올라갈 거예요.”
“내가 관절이 좀 많이 안 좋은데…….”
“그럼 나랑 같이 날아서 올라가면 되죠. 말했잖아요, 내 마법에는 물리적 실체가 있다고.”
로제의 말에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녀는 6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됐다.
* * *
로제가 붉은산에서 은둔형 괴짜 마법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던 때, 콘스탄티노바 왕궁 겨울 궁전에서 아딘은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르보프는 나의 충신이다. 그의 기사도에 관한 신념이 그의 충성심을 이끌고 있지. 거기다 로제의 치유와 내가 전장에서 보인 능력이 그걸 더 강화해주고 있고.’
그를 혁명중앙위원회 내무총괄위원으로 임명한 것은, 그의 충성심에 대한 확증에 기인한 인사였다.
두루마리가 확인해 준 그의 절절한 충성심은 향후 정국을 장악할 아딘의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내정 장악의 전초전을 그에게 맡기도록 만들었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충신이 아니야. 사실, 나를 자기보다 위로 보지도 않는 것 같고. 무력으로야 내가 자기보다 우위지만 어쨌건 불카르 아시오게는 쿠만 지방에서 지도자격인 인물이니까.’
그러나 불카르 아시오게에게는 여러 가지 야심이 있다.
하나는 좀 더 실속 있고 권위 있는 직위를 갖고 싶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딸 다리아와 아딘을 이어줘 왕실의 일원이 되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향후 쿠만족이 벨로디나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중요해. 무엇보다도 그는 나를 사윗감으로 보고 있지 다른 무언가로 보지는 않으니까.’
문제는 빅토르 다비도프였다.
두루마리로 확인한 그의 마음에는 아딘에 대한 충성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향후 아딘이 구상하는 새로운 벨로디나의 통치 구조하에서 빅토르 다비도프는 분명한 반대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민중의 지능을 폄하하고 무시하면서 동시에 민중을 위한 세상을 만들려는 모순. 그런 모순이 나를 왕으로 세우고 자기는 재상으로서 재상정치를 주도할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
향후 혁명정부가 끝나고 제대로 된 국가 체제가 완비되면 아딘은 국가의 상징이자 동시에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될 예정이었다.
과거의 벨로디나나 현재의 샤펠 제국보다는 다원화된 의사 결정 구조 및 상호 견제 시스템을 가지게 되겠지만, 빅토르 다비도프가 꿈꾸는 수준의 체제로 가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당장 빅토르 다비도프를 치는 건 위험해. 자칫 체르노비치가 지하 조직이 돼 나에 대한 반란을 주도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체르노비치 조직원들이 모두 지하로 숨어든다 하더라도 아딘에게는 그들을 찾아낼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두루마리를 통해 그들의 위치를 특정하고, 군대를 보내 그들을 잡아내는 작업을 하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처리 방식이었다.
그래서 아딘이 생각해낸 것이 자연스럽게 체르노비치를 빅토르 다비도프로부터 떼어놓는 것이었다.
‘체르노비치가 최대한 점조직 형태를 유지했다곤 하지만 어쨌건 조직이니 만큼 중간 간부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지.’
그런 중간 간부들 중 상당수를 아딘은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크게는 한 도시를 책임지는 행정관부터 작게는 조그만 촌락의 특정 분야, 예컨대 농업이나 임업 혹은 가축 등을 책임지는 행정관까지.
다양한 행정 업무에 아딘은 그들을 투입했다.
그리고 그들을 총괄 관리하는 것이 내무총괄위원 안톤 르보프의 역할이었다.
‘당장에는 르보프가 체르노비치를 완전히 통제하거나 하진 못하겠지. 아직은 여전히 비밀조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니까.’
그러나 시간 앞에서 체르노비치의 결속력은 결국 약해질 것이고, 지하조직적 성격은 옅어질 것이다.
‘시간 앞에선 거대한 암석도 무너지고 마니까.’
그리고 그때가 아딘이 빅토르 다비도프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실행할 때가 될 것이다.
‘본인이 적당히 숙이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역전의 기회를 만들려 한다든가 하면……’
아딘은 피식 웃었다.
‘참…… 팔자에도 없는 정치를 하고 있으니…….’
아딘은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김현수의 육체는 어떻게 됐을까?’
1년 하고도 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딘이 된 김현수는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많은 일을 겪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 세상의 창조주인 김현수의 육신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딘의 관심 밖이었다.
아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두루마리를 펼쳐 제니스 공화국 요인들과 크리미아에 있는 3대 상단 부총수들에 관한 정보를 확인하며 며칠 후 있을 평화협상에 대한 전략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 * *
5월 6일 정오.
빅토르 다비도프와 불카르 아시오게는 100명의 쿠만족 전사들을 이끌고 콘스탄티노바 남부의 소도시 데오그라드의 중심부에 자리한 주교 성전에 도착했다.
주교 성전에는 이미 3대 상단 부총수들이 100명의 정규 용병들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합이 200에 이르는 병력들을 모두 주교 성전 담장 너머로 내보낸 후 성전 내부 예배당에 마련된 협상 테이블에 다섯 사람이 둘러 앉았다.
“이곳은 원래 주교가 다스리던 곳이었소.”
빅토르 다비도프가 유창한 제니스어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대들이 찬탈자 유리 콘스탄틴을 앞세워 이 땅을 점령한 이후 주교 성전은 폐쇄됐고, 지배권은 그대들이 임명한 행정관에게로 넘어갔지.”
그 말에 콘테 상단 부총수가 고개를 숙였다.
“초창기 동방광명교 사제들에 대한 탄압은, 비록 그 명분이 구악 일소였다고는 하지만, 굉장히 부적절했다는 것이 본국의 주된 의견입니다. 벨로디나에 파견된 고문 제임스 틸러의 독단을 미처 막지 못했던 점에 대해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가 씩 웃었다.
“그거 참 편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모든 죄를 떠넘긴다는 것 말입니다.”
부총수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 저야 그렇게 독실한 신자도 아니었고 하니까 이 문제는 넘어갑시다. 동방광명교에 가해진 핍박에 관한 문제는 추후에 교단 사제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그쪽에게도 편할 거니 말이오.”
그러면서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이 이야기한 세 가지 조항을 그들에게 통보하듯 읊었다.
부총수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았다.
말을 모두 끝마치고 빅토르 다비도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살짝 의아해하면서도 따라서 일어났다.
“협상이란 게 하루 만에 담판이 지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일단 오늘 우리는 우리의 뜻을 그대들에게 통보하러 온 것이니, 가서 본국과 협의를 해보든 하고 추후에 보는 걸로 합시다.”
그러면서 빅토르 다비도프는 성전 밖으로 나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