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26화 (126/175)

126 혁명 (4)

‘외무총괄?’

빅토르 다비도프는 겉으론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오만상을 찌푸리는 중이었다.

외무총괄위원.

겉보기에는 굉장히 좋아 보이는 자리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상당히 중요한 자리였다.

왜냐하면 혁명 정부의 첫 외교 무대가 제니스 공화국과의 협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직책이 주는 무게감보다는 그 직책이 행사할 정치적 지배력에 관한 문제가 빅토르 다비도프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르보프 경이 내무총괄위원이야. 즉, 체르노비치 출신 행정관들은 모두 르보프경에게 보고를 올리고 결재를 받아야 한다는 거지.’

반면 외무총괄위원의 밑에는, 현재로서는 적어도 체르노비치 조직원이 따로 배치되거나 한 것이 없었다.

사실, 외무총괄위원의 경우 따로 많은 관료를 통솔할 필요도 없었다.

도시 관리부터 경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총괄하는 내무총괄위원과는 달리 외무총괄위원은 오로지 타국과의 외교 관계에 관해서만 업무를 전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군무총괄위원이라는 직책…… 여기서 군무가 어디까지 해당되는 거지?’

당장 떠오르는 건 치안과 국방이었다.

그러나 향후 과거 빅토르 다비도프 자신이 운영하던 첩보단 같은 조직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 조직에 체르노비치 조직원들이 대거 등용된다면, 그리고 그것을 군무총괄위원이 담당한다면?

‘젠장…….’

빅토르 다비도프는 이를 살짝 꽉 깨물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이런 식으로 체르노비치를 나에게서 떨어뜨려 놓겠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서 아딘은 차근차근 빅토르 다비도프를 숙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직을 받기로 했다.

‘여기서 거부해 봐야 숙청 속도만 더 빨라지는 거야. 지금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가 나서서 일을 맡아야 해. 그러면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대비를 세워야 하고. 어떻게든 지금은 시간을 벌어야 해.’

빅토르 다비도프를 당장에 숙청할 만큼 아딘이 체르노비치를 공고히 지배하고 있진 않았다.

반대로 아딘을 제거하고 다시 혁명의 판을 짤 능력도 빅토르 다비도프에겐 없었다.

단순히 신민의 상태에 머무르는 민중을 결집시키는 상징을 넘어서 혁명 과정에서 아딘이 보여준 모습으로 말미암아 민중 사이에선 그를 신격화하려는 시도까지 일어나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딘 콘스탄틴을 공격했을 때, 그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

빅토르 다비도프는 분명히 보고를 받았다.

아딘이 전장에서 보여주었던 위용들에 대해서.

‘거기다 동생이라는 정체불명의 마법사 꼬맹이까지……’

지금 당장 빅토르 다비도프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부족한 제가 그 역할을 도맡아 할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아딘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다비도프 백작이 아닌 그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나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빅토르 다비도프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딘의 손을 잡았다.

아딘은 가볍게 세 차례 맞잡은 손을 흔든 후 이야기했다.

“환영합니다, 외무총괄위원님.”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도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장님.”

* * *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소이다.”

집정관의 말에 정무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소문 말입니까?”

“피셔 법무관이 콘테 총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란 소문 말이오.”

정무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집정관을 바라봤다.

“아, 아니 누가 그런 망측한 소문을 낸단 말입니까?”

“상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모양이외다.”

“아니, 그것들이 미쳤나? 어디 입에 담을 게 없어서 콘테 총수를!”

“뭐, 안 보이는 곳에선 황제도 욕하는 게 사람인데 그 정도야 할 수 있는 법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소문이 돌 정도면 큰일 아닙니까?”

정무관의 호들갑을 보며 집정관은 피식 웃었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보게 이 사람아. 지금 큰일은 피셔 법무관과 콘테 총수가 그렇고 그런 사이란 소문 따위가 아닐세.”

“그럼 뭐가 큰일입니까?”

집정관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더 낮춰 이야기했다.

“3대 상단 총수들이 선거인단에 거액의 현금을 뿌리고 있어.”

“네? 아니, 다음 선거까진 2년이나 남았지 않습니까?”

“원로원과 민회가 자진해서 해산한다면 당장에라도 선거는 치를 수 있겠지.”

“아니, 무엇 때문에 자진 해산한다는 말입니까? 민회야 뭐 그렇다쳐도 원로원의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들이 퍽이나?”

“벨로디나의 일을 우리한테 덤터기 씌우는 거지.”

“네?!”

정무관의 목소리가 커졌다.

순간, 집정관실 입구에서 서류를 작성하던 서기가 정무관과 집정관을 힐끔 쳐다봤다.

정무관은 잠시 서기의 눈치를 살피다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아, 아니 그걸 왜 우리한테 책임을 씌운단 말입니까? 우리가 자기네들한테 거길 괴뢰국으로 만들라 했습니까?”

“뭐, 형식적으로는 원로원의 결의로 공적 권위를 지닌 채 출병한 거잖나.”

“아니 그건…… 허어…… 이건 진짜……”

정무관이 맥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찻잔을 내려다봤다.

집정관은 씁쓸한 표정으로 찻잔을 든 채 말했다.

“피셔 법무관이 지난번 회의 이후로 종종 혼자 상단 총수들의 회의에 불려갔다고 하외다.”

그는 가볍게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보나마나 그를 집정관의 자리에 올리려는 거겠지. 에효.”

“집정관님…….”

“뭐, 어차피 나야 명예로운 자리는 다 겪어 봤고, 허수아비지만 집정관까지 해 봤으니 여한은 없긴 하외다.”

그러면서 집정관은 가만히 정무관을 바라봤다.

“그대는 그래도 아직 앞날이 창창하니 피셔 법무관하고 지금부터라도 더 친하게 잘 지내 보시오. 혹시 아오? 더 명예로운 자리를 얻게 될지?”

정무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피셔 가문에서 거 참 이런 경사도 일어나는구먼. 항구에서 멸치나 털던 것들이 말이야. 허허허허.”

* * *

광명력 993년 5월 1일.

크리미아에 3대 상단의 부총수들이 도착했다.

철군 준비를 끝마친 용병들 사이를 지나 그들은 총괄지휘관 에이브 제퍼슨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총수들은 총수들의 합의된 뜻을 분명히 전했다.

“벨로디나에 억류된 용병을 방치한 채 그대들이 이곳을 떠날 일은 없을 것이오.”

그 말에 에이브 제퍼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분명한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이대로 싸움도 못 합니다.”

부총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브 제퍼슨의 뜻을 수락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콘스탄티노바로 사신을 보냈다.

“평화협상이라…… 허허.”

5월 3일 정오.

아딘은 안톤, 불카르 아시오게 그리고 빅토르 다비도프와 함께 사신을 접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니스 공화국에선 누가 왔다고?”

아딘의 물음에 사신은 제법 의연하게 대답했다.

“드라기 상단, 콘테 상단, 루비오 상단의 부총수 세 분이 대표단으로 참석하셨습니다.”

“부총수라…….”

아딘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나름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겠다는 건가?’

상단 부총수는 총수 부재 시 상단을 총괄하는 자리다.

즉, 총수 일가의 핵심 가신 내지는 유력한 후계자만이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들을 보냈다는 것은 제니스 공화국이 진지하게 협상 테이블에 앉고 싶다는 방증이었다.

‘다만…… 대표단의 급이 높다고 해서 꼭 협상을 상식적으로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아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장소는 크리미아와 콘스탄티노바 사이에 자리한 옛 주교령 데오그라드로, 우리 쪽에선 외무총괄위원과 군무총괄위원이 대표단으로 참석할 것이다. 날짜는 5월 6일, 시간은 정오.”

아딘의 말은 통보였다.

그러나 사신은 여전히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상호 기습을 방지하기 위해 수행병력은 100명으로 한정한다.”

“알겠습니다.”

아딘은 사신을 내보냈다.

그리곤 세 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저들은 분명 무리한 조건을 요구할 겁니다.”

아딘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가 물었다.

“무리한 조건이라면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는 겁니까?”

“대표적으로 벨로디나 내 제니스 공화국 시민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그대로 보장한다는 것일 겁니다.”

“날강도 같은 것들……”

불카르 아시오게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외무총괄위원과 군무총괄위원은 사흘 후 협상장에 갔을 때, 분명하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아딘은 검지를 먼저 세웠다.

“첫째, 벨로디나 내 제니스 공화국 시민의 자산은 그 형태와 무관하게 모두 벨로디나 혁명 정부에 귀속된다.”

그다음으로 그는 중지를 세웠다.

“둘째, 제니스 공화국은 지난 1년간 벨로디나를 수탈하고 벨로디나인을 괴롭게 한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벨로디나에 충분한 양의 곡물을 제공한다. 여기서 충분한 양이란 지난 1년을 제외하고, 그 이전 10년간 평균적으로 벨로디나에서 생산된 곡물의 양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아딘은 엄지를 폈다.

“셋째, 향후 10년간 제니스 공화국은 벨로디나에서 수출하는 물품에 대해 의무적인 수입과 관세 면제를 약속한다.”

아딘은 진지한 얼굴로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세 가지 조건 중 그 어떠한 것도 뒤로 밀려나서는 아니됩니다, 외무총괄위원.”

빅토르 다비도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셋 중 하나라도 제대로 성사가 된다면 굉장히 성공적인 외교 협상으로 역사에 남을 만한 조건들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3개 모두 관철하라?

‘뭐지? 처음부터 날 궁지로 몰려는 건가?’

이것이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한 고도의 작전인지, 아니면 아딘의 외교적 무지에서 오는 고집인지, 빅토르 다비도프는 순간 헷갈렸다.

그런 그의 의문을 아딘은 곧 해소해주었다.

“이렇게 우리쪽에서 초강수를 둬야만 제니스 공화국 측도 우리와의 협상을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아딘은 씩 웃었다.

그제야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의장님. 반드시 우리의 3대 요구 사항이 관철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빅토르 다비도프도 씩 웃었다.

“뭐, 정 저쪽에서 안 들어줄 것 같으면 들어줄 때까지 사냥터 노동요를 들려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으허허허!”

불카르 아시오게도 호탕하게 웃으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이 미소와 함께 그들에게 당부했다.

“항상 외교는, 특히 외교적 수사는 완급조절이 중요합니다. 내가 두 분을 함께 보내는 게 무엇을 위함인지는 두 분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새로이 태어날 벨로디나의 첫 시작을 위한 협상에서 지혜와 총명으로 최선의 결과가 도출될 수 있도록 애써주십시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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