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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25화 (125/175)

125 혁명 (3)

광명력 993년 4월 20일 저녁.

엿새 동안 침상에 누워 국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황제 샤를 11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누워 있는 동안 섭정 역할을 했던 대장군 라르고 드 라르고스 백작은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곧장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라르고스 백작은 침실에서 수프로 식사를 하는 황제 앞에 몸을 바짝 낮춘 채 그의 입에서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크어…….”

빠르게 수프를 먹어 치운 샤를 11세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시종에게 가져가라 명했다.

시종이 나가자 샤를 11세는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 라르고스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장로 로이가 죽었다.”

그 말에 라르고스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황금갑옷이 그를 죽였다.”

이어진 말에 라르고스 백작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샤를 11세는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변방이라고 무시했는데…… 벨로디나를 그간 우리가 너무 과소평가했어.”

샤를 11세의 말에 라르고스 백작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벨로디나의 추장이 제아무리 황금갑옷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전체 국력에 있어서 폐하의 제국이 조금만 힘을 쓴다면 알아서 무너질 것들이옵니다.”

그 말에 샤를 11세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바로 옆에 붙어 있다면 그렇겠지. 대형 선단을 이용하면 1개월 이상 걸리고, 육로를 이용하면 3개월이 걸리는 원정인데 그걸 감당할 수 있다면 그렇겠지.”

“화, 황공하오나 충분히 감당할 수 있사옵니다.”

“북부가 안정돼 있다면 그렇겠지!”

샤를 11세의 고성에 결국 라르고스 백작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로이의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는 제국의 근위대장이기 이전에 종단의 장로였다. 그를 살해한 자가 이 땅에서 숨 쉬며 살게 내버려 둔다면 그건 내가 황제의 자격도, 교주의 자격도 없다는 의미겠지.”

샤를 11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일주일 내로 출병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기병 5만에 보병 10만으로.”

도합 15만.

총 병력 30만에 이르는 샤펠 제국 상비군 중 절반을 동원한다는 이야기에 라르고스 백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지금 당장, 북부 귀족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라. 당장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친정하여 모두 쓸어버리고 그들의 모든 작위와 봉토를 회수해 버리겠다고.”

샤를 11세의 말에 라르고스 백작은 고개를 다시 치켜들었다.

“원수를 갚기 전에 내부부터 정리해야지. 그동안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내버려 뒀지만, 이젠 그럴 순 없지.”

샤를 11세의 타오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라르고스 백작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 * *

크리미아와 카판 대평원 정도를 제외하고, 벨로디나 왕국의 관습 권역으로 여겨지던 곳에는 모두 혁명군의 깃발이 내걸렸다.

소수의 쿠만족 용병과 다수의 벨로디나인 민병대로 구성된 치안대가 각 성과 주요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고, 콘스탄티노바에 설치된 혁명정부가 임명한 행정관이 곡식 분배부터 도시 관리까지 다양한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전하께서 수령님을 확실히 밀어주시려는 모양입니다.”

광명력 993년 4월 21일 오전.

이제는 당당하게 콘스탄티노바에서 가장 높은 상업 건물에 앉아 아침부터 차를 마시는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체르노비치의 간부 하나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무슨 소리지?”

빅토르 다비도프는 차를 마시다 말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주요 도시 행정관을 전부 우리 조직 간부들로 채우지 않으셨습니까. 당장 콘스탄티노바 행정관도 얼마 전에 알렉산드르가 임명됐고 말입니다.”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의미 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간부가 빵 한 조각을 먹으며 말을 이었다.

“뭔가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혈통에만 의지한 너저분한 귀족 놈들이 아니라, 우리처럼 밑바닥에서 민중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기회가 오는 그런 제대로 된 세상 말입니다.”

“제대로 된 세상이라…….”

“이거 우리 같은 간부들한테 도시 행정관 자리가 오는 걸 보면, 수령님한테는 어쩌면 재상 자리가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간부의 은근한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새로운 세상이라…….’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콘스탄티노바를 바라봤다.

저 멀리 성곽에는 민병대와 쿠만족 용병이 함께 서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관청에서 밀가루와 콩 등을 배급받은 시민들이 미소를 띤 채 움직이고 있었다.

한때 귀족들이 기거했던 곳에는 그곳의 주인이었던 자들이 혁명정부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유폐돼 있었고, 입구와 사방 담장은 민병대와 쿠만족 용병에 의해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왕궁은 여전히 소수의 사람만이 들어가 있었다.

‘과연 새로운 세상이 올까?’

왕궁을 점령한 아딘은 혁명군 수뇌부와 일부 병력만을 궁내로 들였다.

그 외에 그 누구에게도 왕궁은 열리지 않았다.

‘행정관으로 임명된 간부들은 나에게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저곳 왕궁에 보고하고, 저곳의 의지를 받아 일을 집행할 뿐이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배급 계획, 군사 계획 그리고 더 나아가 제니스 공화국과의 협상은 모두 왕궁에 있는 자들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과연 이전과 다를 게 있을까?’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다비도프 백작님.”

남자의 부름에 체르노비치 간부와 빅토르 다비도프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내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눈을 찡그리고 그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이내 빅토르 다비도프는 사내가 한때 드미트리 콘스탄틴을 따르던 궁정기사였음을 깨달았다.

“아! 스테판! 스테판 안드레아노프!”

“기억하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이리 앉게. 허허허.”

빅토르 다비도프가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빼주었다.

사내, 스테판 안드레아노프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곳에 앉았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잠시 스테판 안드레아노프의 복장을 살폈다.

“다시 기사로 복귀했는가?”

안드레아노프는 철제 흉갑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콘스탄틴 의장님 덕분에 복귀하게 됐습니다.”

“의장님?”

빅토르 다비도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저녁, 혁명정부를 총괄할 혁명중앙위원회가 세워졌습니다. 콘스탄틴 의장님께선 의장으로 취임하신 상태입니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누구 마음대로?!”란 말을 차와 함께 넘긴 그는 안드레아노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런가? 허허. 축하드려야 할 일이군.”

“사실 여기에 온 것도 혁명중앙위원회와 관련해서 찾아온 겁니다. 의장님의 명으로 말입니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안드레아노프가 아딘의 뜻을 전했다.

“의장님께선 백작님이 혁명중앙위원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아 주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중요한 자리?”

“자세한 건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자 하신다는 뜻만을 전해 받았습니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맞은편에 앉은 간부는 살짝 들뜬 표정으로 빅토르 다비도프와 안드레아노프 사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예상을 하긴 했는데…… 이미 판을 다 짜놓고 날 부른다는 건…….’

빅토르 다비도프는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의 빈 찻잔을 채워주며 안드레아노프가 말했다.

“가능하시다면 오늘 오후 중으로 입궁하시라는 의장님의 전언입니다.”

“입궁이라…….”

빅토르 다비도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네. 해가 지기 전에 찾아뵙겠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안드레아노프는 자리를 떴다.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던 체르노비치 간부가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되게 중요한 자리를 주실 모양입니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간부를 바라봤다.

“아니, 그렇잖습니까. 알렉산드르 같은 놈도 콘스탄티노바 행정관이 되는데, 수령님이라면 그놈 따위 발가락 때만도 못하게 여길 만한 자리에 오르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왕궁을 바라보며 조용히 차만 들이켤 뿐이었다.

* * *

당일 오후.

빅토르 다비도프가 왕궁을 찾아갔을 때, 그를 마중한 것은 앞서 그를 찾아간 안드레아노프였다.

그가 이끄는 마차에 올라타 빅토르 다비도프는 봄 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자리한 어전에 그가 들어갔을 때, 그를 반겨준 것은 상석에 앉은 아딘과 그 우편에 앉은 안톤, 좌편에 앉은 불카르 아시오게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을 향해 예를 갖췄다.

“전하란 말보단 의장님이란 말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소.”

아딘은 그런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웃으며 이야기한 후 그를 안톤의 곁으로 안내하도록 안드레아노프에게 손짓했다.

빅토르 다비도프가 안톤의 곁에 앉자 아딘은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안톤과 불카르 아시오게를 소개했다.

“르보프 경은 잘 알고 있겠지만, 제대로 소개하자면 혁명중앙위원회 내무총괄위원으로 이번에 임명되셨소.”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미소를 지으며 안톤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아딘은 그런 그에게 이번엔 불카르 아시오게를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아마 처음 봤을 건데, 불카르 아시오게라고 쿠만족 사냥터지기라오. 사실상 족장이라고 봐도 무방한 쿠만족의 실세지. 이 사람은 이번에 혁명중앙위원회 군무총괄위원으로 임명되었소.”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쿠만어로 불카르 아시오게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빅토르 다비도프라고 합니다.”

그 인사에 불카르 아시오게가 벨로디나어로 화답했다.

“반갑소이다. 불카르 아시오게라오.”

그 인사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 차례 가볍게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의 인사를 바라보던 아딘이 이내 입을 열었다.

“뭐, 혁명중앙위원회라고 거창하게 조직을 발족시키긴 했는데 아직은 우리 셋뿐이오. 의장 하나에 내무총괄, 군무총괄. 물론 앞으로 계속해서 자리는 채워나갈 생각이긴 하지만, 당장에는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소?”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다비도프 백작이 혁명중앙위원회에서 자리를 하나 맡아 주셨으면 해서 불렀소.”

“제가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자리일 것 같습니다.”

“하하. 뭐 하는 자리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 그러기요?”

아딘은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어딘지 모르게 기계적인 그 웃음에 빅토르 다비도프도 비슷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곧 아딘이 웃음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개인적으로 빅토르 다비도프 그대를 외무총괄위원에 임명하고 싶소.”

외무총괄위원이란 말에 순간 빅토르 다비도프의 눈이 빛났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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