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혁명 (2)
광명력 993년 4월 20일 정오.
제니스 공화국 수도 아라곤.
드라기 상단 총수 마리오 드라기의 저택.
그곳에 크리스티나 콘테와 마르코 루비오 그리고 법무관 헨리 피셔가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벨로디나는 끝났소이다. 우리의 손을 완전히 벗어나게 됐소. 제퍼슨은 크리미아 주둔군을 철수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하더이다.”
마리오 드라기의 말에 세 사람은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용병대장이니만큼, 당연한 결정이긴 합니다. 다만…… 우리가 별도의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그런 판단을 한 것에 대해선 추후 단단히 유감 표명을 받아야할 것 같습니다.”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세 사람은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왕궁을 지키던 우리 쪽 애들이 포로로 잡혔소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쪽 연락책을 통해 벨로디나 혁명 정부에서 접촉을 해 왔고.”
마리오 드라기의 말에 세 사람은 관심을 보였다.
“혁명 정부라…….”
마르코 루비오가 냉소를 머금었다.
“미개한 놈들에겐 과분한 명칭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말에 마리오 드라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혁명 지도자는 누구죠?”
크리스티네 콘테의 물음에 마리오 드라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딘 콘스탄틴이오.”
“흐음…….”
아딘의 이름이 나오자 세 사람은 저마다 알 수 없는 표정과 한숨 그리고 신음을 내뱉었다.
“도망쳤다길래 혹시나 했는데 살아 있었다…… 허허.”
“살아있을 뿐 아니라 혁명까지 일으켰어요. 쿠만족 용병과 민중을 동원해서.”
“왕족끼리 싸운거면 혁명보단 정변에 가까운 거 아닌가?”
마르코 루비오의 말에 마리오 드라기가 확실히 못 박아 두었다.
“공식적으로 자기네들이 혁명 정부를 자처하더이다.”
그 말에 마르코 루비오는 가당찮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왕족이 혁명 정부를 자칭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러면서 그녀의 시선은 마르코 루비오나 마리오 드라기가 아닌 헨리 피셔에게로 향했다.
헨리 피셔는 목청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벨로디나 귀족 사회에서 아딘 콘스탄틴은 악명을 떨친 인물입니다. 오죽하면 귀족 중 상당수가 동생인 드미트리 콘스탄틴에게 붙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세 총수의 시선이 집중돼서 그런 건지 헨리 피셔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숨을 한 차례 돌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만큼 자기 숙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어려운 만큼 차라리 지지기반을 민중으로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건, 벨로디나 민중이 분노하는 대상은 왕족이 아니라 우리 공화국이니 말입니다.”
그 말에 세 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법무관님 말씀대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쩌면 의외로 아딘 콘스탄틴은 우리 공화국에 적대적인 인물이 아닐 수도 있어요. 혁명 정부를 자청한 만큼, 왕정으로 가건 공화정으로 가건 아니면 둘을 절충한 형태로 가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헨리 피셔를 바라봤다.
헨리 피셔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아딘 콘스탄틴의 혁명 정부는 분명 우리에게 곡물 수출 혹은 대출을 요구할 겁니다. 그때 우리가 적절히 잘 외교적으로 대처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벨로디나의 직접 통치에선 손을 떼면서도 영향력은 계속해서 유지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법무관님 말씀대로, 어쩌면 이게 우리에겐 더 큰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마르코 루비오와 마리오 드라기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광물과 부동산에 투자를 많이 해둔 두 사람이었기에 크리스티나 콘테와 헨리 피셔의 분석은 그들에겐 반드시 일루어져야 할 정언명령으로 다가왔다.
“일단 혁명 정부 쪽에서 우리 쪽 용병들의 신병을 대가로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니, 한번 잘 접촉을 해보시기 바라오.”
마리오 드라기의 말에 헨리 피셔가 고개를 숙였다.
“노력하겠습니다.”
마리오 드라기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벨로디나도 벨로디나지만 최근 제국과 게마인샤프트의 상황도 심상치 않소. 제국 북부 귀족 간의 내전이 대량 학살로 이어지고 있고, 게마인샤프트에선 유목민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하고 있소. 대륙의 안정은 우리의 번영을 위해선 필수적인 것이니 만큼, 세계 정세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소이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는 끝났다.
“법무관님?”
회의가 끝나고, 나가는 길에 크리스티나 콘테는 헨리 피셔를 불렀다.
“네, 총수님.”
“이따 저녁에 제 집에서 식사라도 하시겠어요?”
“네, 네? 시, 식사 말입니까?”
“법무관님과 최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좀 따로 나누고 싶어서 말이죠.”
“아, 네. 알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수님.”
허리 숙이는 헨리 피셔를 바라보며 크리스티나 콘테는 활짝 웃었다.
* * *
아딘은 콘스탄티노바를 점령한 뒤 5일간 대대적으로 군량미를 풀어 민중을 배부르게 했다.
그러면서도 빅토르 다비도프와 안톤, 불카르 아시오게를 시켜 점령지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체제 정비가 이루어지게끔 만들었다.
“성불구자인 유리 콘스탄틴의 아이를 가졌다라…… 참 웃기군.”
그러면서 동시에 본인은 유리 콘스탄틴의 왕후를 심문하여 그녀로부터 모든 전말을 자백 받았다.
물론 두루마리가 있는 만큼, 그녀의 자백은 아딘에겐 별 의미는 없었다.
단지 그녀 스스로 제니스 공화국과 벨로디나 내 친공화국 귀족들의 음모를 토해내도록 했다는 측면에서 정치적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침조차 하지 않은 상대방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아딘의 말에 왕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따로 고문을 하지도 않았고,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오로지 살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모든 것을 아딘에게 토했다.
“…….”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유리 콘스탄틴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려고 왕이 되셨소?”
그런 유리 콘스탄틴을 바라보며 아딘이 물었다.
유리 콘스탄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나까지 죽었다면, 자칫 콘스탄틴 가문은 근본 없는 씨에 갈려버릴 뻔했소. 선왕뿐 아니라 역대 콘스탄틴 가문의 모든 조상들 앞에서 부끄러운 짓 아니오?”
아딘의 말에 유리 콘스탄틴은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선 내 손으로 당신을 찢어 죽이고 싶소. 내가 당했던 그대로 고문도 하고 싶고.”
아딘의 말에 유리 콘스탄틴은 살짝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내가 세우고자 하는 새로운 벨로디나는 그런 야만적인 풍습과는 거리가 있는 국가가 될 것이오.”
그 말에 유리 콘스탄틴은 고개를 들어 아딘을 바라봤다.
“그대와 저 음탕한 계집은 정식으로 혁명 재판소의 재판을 받게 될 것이오. 그대를 위한 변호인을 그대가 스스로 선임할 수도 있고, 원한다면 무작위로 백성들 가운데 배심원을 뽑을 수도 있소.”
유리 콘스탄틴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나라 백성들 중…… 나를 변호해 줄 사람 누가 있겠으며 또 나에게 죄 없다 할 사람 누가 있겠는가? 헛수고하지 말고 그냥 쳐 죽이게, 조카님.”
유리 콘스탄틴의 말에 아딘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그는 유리 콘스탄틴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당신에게 너무 편한 죽음이야. 내가 당신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이로 주건, 아니면 바다 건너 렝고스에 사는 오크들에게 밥으로 던져주건, 그것도 아니면 노충형으로 벌레들의 밥이 되게 하건, 뭐가 됐건 그 모든 죽음은 당신에겐 너무도 편한 죽음이야.”
아딘의 말에 유리 콘스탄틴은 몸을 한 차례 떨었다.
“그대의 죄악은 모든 민중 앞에 모두 드러날 것이오. 어떻게 그대가 제니스 공화국과 내통했는지, 그들에게 무엇을 대가로 바치고 허울뿐인 왕좌의 주인이 됐는지, 어떻게 이 나라 왕실이 더러운 년놈의 피로 오염될 뻔했는지. 그 모든 게 이 나라 백성에게 공개될 것이오.”
아딘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유리 콘스탄틴은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아딘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대는 죽게 될 것이오. 백성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들이 요구하는 방법에 따라서. 그게 참수가 됐건, 교수형이 됐건, 사지절단이 됐건, 노충형이 됐건, 아사가 됐건, 호랑이 밥이 됐건 말이오.”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쿠만족 전사들을 불렀다.
“정중히 모시고 잘 감시하라.”
그 명령을 남기고 아딘은 가을 궁전을 떠났다.
“오라버니.”
그가 가을 궁전에서 나오자 로제가 따라 붙었다.
“안 피곤해요?”
그녀의 물음에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안 피곤해. 오히려 더 힘이 나는 것 같아. 해야 할 일을 이루고 나니까.”
“아직 완전히 이룬 건 아니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 행정력도 복구해야하고, 크리미아에 남은 잔당들도 철수시켜야 하고 무엇보다도 식량 확보 문제도 남았고.”
“하긴 혁명이란 게 하루 아침에 끝날 일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도 혁명 정부에서 역할을 하나 맡아 줘야 겠어, 로제.”
아딘의 말에 로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봤다.
“로제 네가 벨로디나 내에 있는 마법사들을 한 깃발 아래에 뭉치게 해 줘야겠어.”
“마법사들을 뭉치게 해요?”
“그래.”
아딘은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벨로디나 내에는 많은 마법사가 있어. 샤펠 제국이나 제니스 공화국이었다면 그들을 어떻게든 끌어다 썼겠지만, 여긴 벨로디나잖아. 그래서 여전히 깊은 산이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추운 벌판에서 혼자 연구만 하며 사는 괴짜들이 많아.”
아딘의 시선이 다시 로제에게로 향했다.
“그 사람들을 로제 네가 콘스탄티노바로 이끌고 왔으면 좋겠어.”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정도야 충분히 해야죠. 언제부터 할까요?”
“이래저래 정치적인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가 좀 해결되고 나면. 그 전까지는 일단 콘스탄티노바 주변에 있는 마법사들이나 좀 섭외해 주고.”
“네, 그렇게 할게요, 오라버니.”
“그래. 고맙다.”
그러면서 아딘은 가만히 로제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오랜만에 느끼는 아딘의 손길에 로제는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혁명 정부 체제가 끝나고 정식으로 내각이 수립되고 하면 본격적으로 쳐낼 놈들은 쳐내고 해야 해. 특히 다비도프. 그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두고두고 위협으로 남겠지.’
괴짜들을 한데 모으려는 발상.
그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빅토르 다비도프의 숙청과 그의 조직 체르노비치의 흡수였다.
‘괴짜 마법사들만 잘 모으면 빅토르 다비도프를 제거하고도 충분히 체르노비치를 내 조직으로 삼을 수 있게 될 거야.’
혁명 이후의 정국에 대해 고뇌하며 아딘은 가볍게 코로 숨을 내뱉었다.
그런 아딘의 손을 로제는 조심스럽게 꼭 잡아 주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