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20화 (120/175)

120 종단의 장로 (1)

이 시대가 현실의 19세기나 20세기 초였더라면 혁명에 왕이나 성직자의 존재는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빅토르 다비도프의 지적대로 이 시대의 벨로디나 민중은 착취로부터 자신을 해방해 줄 존재를 갈망함과 동시에 유형의 상징으로서 국왕의 존재 또한 바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더해 아딘은 종교적 권위까지도 혁명 이후 벨로디나를 통치하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안톤으로 하여금 왕궁 수장고 깊은 곳에서 먼지나 머금고 있던 총대주교의 홀을 찾아오게 한 이유였다.

“그간 총대주교라는 자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권위를 보이지 못한 건 이게 없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화려하다기보단 차분한,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뽐내는 총대주교의 홀을 들고서 아딘은 이야기했다.

31인의 기사들과 안톤 그리고 유리 콘스탄틴은 모두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건, 혁명 이후 국왕의 존재처럼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능할 것이다. 잃었던 동방성전의 권위가 회복됐음을 알리고, 선지자의 재림을 고대하는 이들의 신앙을 결집할 그런 상징으로서 말이야.”

“어, 어, 어디서…….”

유리 콘스탄틴의 물음에 아딘은 피식 웃었다.

“왕실 수장고는 오로지 국왕이 차기 국왕에게만 그 위치를 알려주는 곳이오.”

아딘의 말에 유리 콘스탄틴은 입을 다물었다.

“표면적으로야 선왕께서는 나와 드미트리 사이에서 갈등하시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나를 차기 국왕으로 염두에 두고 계셨소. 그랬기에 병환이 더 깊어지시기 전에 날 따로 불러 수장고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셨던 것이고 말이오.”

“…….”

“외세를 등에 업고 왕좌를 찬탈한 그대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아딘의 말에 유리 콘스탄틴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딘은 씩 웃으며 가만히 총대주교의 홀을 바라보았다.

‘뭐, 사실은 선왕이 아딘 콘스탄틴에게도 이야기해 주진 않았지만.’

선왕 블라디미르가 아딘에게 수장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말은 물론 거짓이었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아딘이나 드미트리에게 그 위치를 알려주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알려주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쯤 중풍을 강하게 맞아 말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비밀로 남겨질 뻔한 수장고의 위치였지만, 수장고의 존재를 떠올린 아딘에 의해 그 문이 열리게 되었다.

혹시나 해서 열어본 두루마리에서 그 위치가 나왔을 때를 떠올린 아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모아둔 보석과 금을 어떻게든 활용한다면 당장에 식량난부터해서 인플레이션은 해결이 가능하겠지. 쿠만족에게 약속한 금액도 지급이 가능할 거고.’

수장고의 존재 자체가 왕실이 위기에 처했을 시 사용할 비상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아딘이 생각하는 활용법은 그것을 만든 이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했다.

‘거기다 귀족과 제니스 공화국 상단의 재산을 몰수한다면…….’

유리 콘스탄틴과 왕후를 사로잡은 이상, 혁명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진배 없었다.

남은 건 콘스탄티노바에 주둔 중인 정예 용병을 제압한 후 공식적으로 혁명의 성공을 선포한 후 제니스 공화국의 반응에 따라 대응하는 것 뿐이었다.

‘로제는 잘 하고 있을까?’

아딘은 가만히 활짝 열린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 * *

“흐아아아악-!”

“끄아아악-!”

몽둥이 따위를 든 민중의 공격을 두꺼운 갑옷으로 막아내고 검과 도끼, 철퇴로 그들을 공격하던 용병들의 몸에 갑작스럽게 불이 붙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을 찾아 돌아다니다 결국 바닥에 누워 그대로 타 죽어버렸다.

‘적군이랑 아군이 다 뒤섞여서 제대로 크게 한 방 먹이기도 힘들어.’

허공에서 가만히 지상을 내려다보던 로제는 타죽은 용병들 근처에 뭉쳐있는 다섯 용병들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이내 그들 또한 자연발화를 일으키며 타오르다 죽어버렸다.

‘오라버니는 성공하셨을까?’

아딘인 그녀와 혁명군에 내린 명령은 최대한 콘스탄티노바 성곽과 도심지에 피해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완전히 피해를 끼치지 않을 순 없었지만, 전후 복구를 감안했을 때 최대한 투입될 자원을 아끼고자하는 아딘의 판단에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랬기에 로제는 최대한 주변에 피해를 덜 끼치는 자연발화 마법으로 용병들의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흐아아앗-!”

“하하하하-!”

물론 그녀의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공격 지원일 뿐이었다.

지상에서 용병을 제압하는 건 대다수가 쿠만족으로 이루어진 혁명군 정예들이었다.

‘다리아 아시오게…….’

그중 특히 눈에 띄게 활약하는 사람은 단연코 다리아였다.

어린 나이에도 소드 마스터로서의 위엄이라 할 수 있는 화려한 검기를 내뿜으며 그녀는 지상에서 그야말로 적 용병을 도축하고 있었다.

용병의 갑옷과 무기는 그녀의 검기 앞에서 힘없이 잘려나갔고, 그녀에게 덤볐던 용병들은 순식간에 신체가 절단된 채 바닥에 드러누워야 했다.

‘저런 야만인 살인광을 오라버니랑 엮으려 한 르보프 경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저런 모습을 모르고 그랬겠지?’

그러면서 로제는 민중을 집단 구타하는 용병들의 얼굴에 불을 질러 그들을 떨어뜨려 놓았다.

‘어찌됐건 곧 끝날 거야. 이 추세라면.’

[쉬이익-!]

[까앙-!]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이 실드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로제는 곧장 궁수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퍼엉-!]

그대로 궁수의 머리가 터졌다.

로제는 좀 더 허공으로 높이 떠올랐다.

‘어느 싸움이나 결국 우두머리만 사로잡으면 끝나는 거라고 할아버지가 말했었지.’

로제는 불멸자 샤푸르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가만히 왕궁을 바라봤다.

그때, 그녀의 품속에 있던 수정구슬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로제는 곧장 수정구슬을 꺼냈다.

“로제. 거기 상황은 어때?”

아딘의 연락에 로제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쿠만족이 잘해 주고 또 제가 잘 돕고 해서 호각에서 점점 우리 쪽으로 기세가 기울고 있어요.”

“다행이네. 우리는 목표물 1, 2, 3을 모두 확보했어.”

“그럼 끝났네요?”

“뭐, 완벽하게 끝내려면 콘스탄티노바에 남아 있는 제니스 공화국 용병들을 모두 제압해야겠지.”

“네. 최선을 다해서 정리해둘게요.”

“성벽이랑 도심에는 큰 피해는 주지 말고.”

“네.”

그렇게 교신은 끝났다.

로제는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지상의 제니스 용병들을 향해 마법을 뿌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머리통이 터지고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궁수들과 용병단에 섞여 있던 마법사들이 로제를 방해하려 했지만, 그들의 공격은 번번이 허공에서 멈출 뿐이었다.

도리어 로제가 궁수와 마법사만 골라서 죽이기 시작하자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감춰야하는 처지에 놓이기까지 했다.

‘오라버니의 뜻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야!’

로제는 그렇게 생각하면 환하게 웃었다.

* * *

“전하! 수상한 자를 잡았사옵니다!”

겨울 궁전에 자리한, 한때 아딘 콘스탄틴이 이용했던 서재에 홀로 앉아 두루마리를 통해 전황을 살피던 아딘은 궁전을 수호하던 기사의 보고에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수상한 자?”

“자신을 아라곤에서 온 사자라고 밝혔사옵니다.”

“아라곤?”

아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두루마리로 그 정체를 확인해 보았다.

‘제이크 로버츠?’

아딘은 실소를 지으며 기사에게 명했다.

“온 목적은?”

“아라곤의 뜻을 전하께 전해드리고자 한다 하옵니다.”

“그래. 들여보내.”

곧 포박된 제이크 로버츠가 양쪽에서 기사들에게 붙들린 채 서재로 들어왔다.

아딘은 기사들에게 제이크 로버츠의 포박을 풀어줄 것을 명한 후 제이크 로버츠의 팔이 자유로워지자 기사들을 내보냈다.

“프런티어 상단의 총수인 줄 알았더니, 외교관 노릇도 하고 계셨나?”

아딘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그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가만히 땅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딘은 다리를 꼰 채 물었다.

“그래, 그대가 전하고자 하는 아라곤의 뜻이 무엇인가?”

아딘의 물음에 제이크 로버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아라곤에서는…… 저, 전후 협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전후 협상?”

“벨로디나에 투자된 공화국의 자본에 대한 논의와 그…… 향후 투자 방향에 관한 협의를 원한다고 합니다.”

아딘은 코웃음쳤다.

“내가 혁명의 지도자라 판단한 것까진 좋았는데…… 그걸 협의 대상으로 생각한 건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닌 것 같군.”

아딘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가서 전하게. 협상은 없다고. 그대들이 지난 1년간 이 땅에 투자라는 명목으로 뿌리내린 탐욕과 그것이 착취한 백성의 고혈을 우리가 청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라고.”

“그, 그건…….”

“곧 콘스탄티노바는 우리 손에 들어올 걸세. 그리된다면 사실상 혁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지. 그대들이 크리미아에서 철수할 시간 정도는 우리가 주긴 주겠지만, 만약 그대들이 크리미아를 거점으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다면 우리는 그대들 모두를 파묻어 버릴 걸세.”

“…….”

아딘은 씩 웃었다.

제니스 공화국의 의도는 이로서 명확해졌다.

그들은 벨로디나를 버렸다.

적자만 쌓이는 괴뢰국을 유지하기보단 버리면서 자산이나 지키고 교역 조건이나 유리하게 설정하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러는 것이리라.

“내 뜻은 이만하면 충분히 전해진 것 같은데…… 그만 나가지?”

그러면서 아딘은 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을 불렀다.

“정중히 모셔라. 어떻게 들어오셨는진 모르겠지만, 나가시는 길도 알아서 잘 찾아 나가시겠지.”

기사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제이크 로버츠를 끌고 나갔다.

아딘은 힘없이 밖으로 나가는 제이크 로버츠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곧 문이 닫혔고 아딘은 다시 혼자가 됐다.

“폐하께서는 결코 그대와 대면하지도 말고, 대면하거든 도망치라고 내게 명하셨지.”

그때, 느닷없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와 아딘으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끔 만들었다.

“뭐, 뭐야?!”

아딘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반사적으로 불멸의 검을 뽑고 불칸의 갑옷으로 무장했다.

“오오…… 가까이서 보니 왜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는질 알 것 같군.”

그 순간, 서재 구석 그림자 속에서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검 한 자루를 든 남성은 황홀한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은?”

아딘의 물음에 남성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로이. 위대한 샤펠 제국의 황제 폐하 샤를 드 퐁피두 님의 충직한 종복이다.”

“로이? 설마…….”

범상치않은 기세를 풍기며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 로이.

그를 바라보며 아딘은 비로소 그가 카판 족장 아르게 벤바사를 죽인 자임을 깨달았다.

“샤펠 제국에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온 거지?”

아딘의 물음에 로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모든 것은 위대한 황제 폐하 샤를 드 퐁피두 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면서 로이는 단검을 고쳐 쥐었다.

로이의 단검에서 음울한 색상의 검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딘이 쥔 불멸의 검에서도 찬란한 금빛 검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드디어…… 드디어 싸워볼 만한 상대와 만나는구나.”

아딘의 전신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황금빛을 바라보며 로이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