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혁명의 대의 (1)
처음 북부와 동부가 혁명군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콘스탄티노바에서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딘의 명령하에 혁명군이 외부로의 정보유입을 철저하게 차단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는 또 없는 노릇이었다.
제니스 공화국 용병이야 사로잡아 감옥에 넣거나 죽여버림으로써 입을 막을 순 있었지만, 일반 민중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까지는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오!”
광명력 993년 3월 30일 오전.
벨로디나 왕국 수도 콘스탄티노바.
대신들의 집무실과 어전이 있는 봄 궁전.
그곳 어전에서는 어전회의가 한창이었다.
“반란이라니? 도대체 누가 수괴란 말이오?”
재상 알레그로프 백작이 국왕 유리 2세를 대신하여 어전회의를 주재하며 격앙된 목소리로 고함쳤다.
“수괴에 대해선 아직 확인된 바가 없소이다. 다만, 반란군의 핵심 전력으로 보이는 자들이 쿠만인으로 보인다는 첩보가 들어와 분석 중에 있소이다.”
왕실 외척이자 국왕 유리 2세의 장인인 메로네프 공작의 말에 다른 대신들이 모두 화들짝 놀랐다.
“쿠, 쿠만족이라니? 그, 그 야만인들이 어째서?”
“민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저 천한 것들이 돈이라도 모아서 쿠만족을 용병으로 샀다는 말입니까?”
“이건 반란이 아니라 침략 아닙니까?”
대신들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설왕설래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중심을 잡아 줘야 할 알레그로프 백작은 안색이 새파래진 채 입술만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메로네프 공작이라고 해서 달리 의연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대신들이 혼란해할 때, 한 목소리가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침착하십시오.”
회의 테이블 끝자리, 왕좌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남성의 말에 대신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봤다.
“노보로바야와 노르드바 그리고 동부의 상트보가르와 소보렌그라드가 함락당한 것은 분명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벨로디나를 지키는 핵심 병력의 대부분은 이곳 콘스탄티노바에 주둔 중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성, 제니스 공화국에서 보낸 고문 제임스 틸러의 말에 대신들은 저마다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임스 틸러의 말이 계속됐다.
“일단 재상께서는 반란이라고 규정하셨지만, 아직 현재 진행되는 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확정적으로 정의할 순 없다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쿠만족에 의해 점령된 곳에서 민중 소요가 목격됐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는 하지만 현재까지로서는 이것을 반란이라고 할 수도 없고 침략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점을 알아 주십시오.”
그러자 알레그로프 백작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고문께서 그러시다면야.”
제임스 틸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대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벨로디나를 지키는 우리의 용병 5만 중 고작 4천에서 5천 정도가 당했을 뿐입니다. 여전히 4만 5천은 건재하며, 특히 이곳 콘스탄티노바 왕성을 지키는 5천은 특별히 드라기 상단에서 엄선한 최정예 베테랑 용병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적들이 콘스탄티노바를 포위할 순 있겠지만 함락은 불가능하다 보시면 됩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을 가지다가 마지막에 나온 콘스탄티노바 포위라는 말에 대신들의 안색이 다시 죽어가기 시작했다.
주변의 반응을 지켜보던 제임스 틸러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제가 오늘 아침 아라곤으로 서신을 보내 뒀습니다. 공화국 지도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니, 대신 여러분께서는 각자의 자리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제임스 틸러의 입에서 나온, 제니스 공화국 지도부의 적절한 조치라는 말에 대신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단순한 것들.’
그런 대신들을 바라보며 제임스 틸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한 조소였지만, 대신들은 그 미소를 자신감 넘치는 승자의 미소로 인식했다.
“아무렴 아무리 쿠만족 그 야만인들이 잘 싸운다 해도, 공화국의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하하하.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하하하.”
그렇게 어전회의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만 하고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 * *
3월 30일 정오.
소보렌그라드 관청.
로제와 야민 벤키시, 다리아 아시오게가 수정구슬을 앞에 두고 삼각 편대를 이룬 채 앉아 있었다.
“도대체 이 물건은 누가 만든 겁니까?”
야민 벤키시의 물음에 로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라버니가 저한테 주시면서 사용 방법만 알려 주셨지, 따로 그 이상의 것은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로제의 말에 다리아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구슬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근데, 아가씨하고 아딘 콘스탄틴하고는 무슨 관계에요?”
다리아의 물음에 로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주 가까운 관계예요.”
“그러니까, 가까운 무슨 관계냐구요.”
“그냥 그렇게만 아시면 돼요.”
로제의 시원찮은 대답에 다리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시선을 도로 수정구슬로 돌렸다.
그 순간, 수정구슬에서 빛이 일어났다.
그리곤 아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2군단. 모두 모여 있나?”
아딘의 물음에 로제가 대답했다.
“네, 오라버니.”
“시간이 촉박한 만큼,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어딘지 모르게 무뚝뚝한 아딘의 목소리에 순간 로제는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뭐…… 오라버니도 바쁘실 테니까.’
그렇게 로제가 생각하고 있을 때, 수정구슬에서는 계속해서 아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콘스탄티노바에 우리의 거병 소식이 알려졌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적들이 더 대비하기 전에 콘스탄티노바로 진격해야 한다.”
아딘의 말에 세 사람은 살짝 긴장했다.
“광명력 993년 3월 30일 저녁부터 1군단은 남하하여 콘스탄티노바 북부 외곽의 북방요새를 공격할 것이다. 2군단도 같은 시간에 서진하여 동방요새를 공격하라.”
“네, 그렇게 하겠어요, 오라버니.”
“동방요새에는 5천의 용병이 주둔 중이다. 모두가 게마인샤프트에서 고용한 비정규 용병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엄선한 전력이니 쉽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전략적으로 판단하여 움직이길 바란다. 특별히 동방요새 내에 자리한 민란 조직과 협동하라. 그러면 좀 더 전쟁이 쉬워질 것이다.”
“네.”
곧 통신이 끊겼다.
다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풀었다.
“5천이라. 이제야 전쟁다운 전쟁을 해 보겠네.”
로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로제의 주변으로 강력한 힘의 파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리아 아시오게. 그쪽이 상당한 실력의 소드 마스터란 이야기를 오라버니께 들었어요.”
로제의 말에 다리아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나도 그쪽이 굉장한 마법사란 말을 들었어요.”
로제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대마법사와 소드 마스터가 함께하는데, 병사들의 피해가 크다면 오라버니 보기에 굉장히 부끄럽겠죠?”
그 말에 다리아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대답했다.
“조상들 보기에 부끄럽겠죠.”
그리고 야민 벤키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눈치를 살폈다.
‘이럴 때 족장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렇게 2군단 지도부는 전의를 불태웠다.
같은 시간, 콘스탄티노바 매음굴.
손님보다는 매음굴의 치안을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깡패들과 그들 속에 섞여든 체르노비치 조직원들로 붐비는 왕할멈의 거처.
그곳 다락방에 안톤과 빅토르 다비도프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곧 전하께서 콘스탄티노바로 오실 겁니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도프 백작의 도움으로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전하께서 콘스탄티노바로 오시기만 한다면, 작전은 곧장 실행 가능합니다.”
안톤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7천 대 5만…… 엄청난 차이지만…… 결국 그 차이는 훌륭한 전략과 전술로 충분히 좁힐 수 있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전쟁사에 어떻게 보면 길이 남을 역사가 이번에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안톤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가 피식 웃었다.
“명목상으로야 우리 쪽 전력은 쿠만인 용병 7천에 불과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는 이 나라의 억압받은 민중 전체와 하나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결코 7천 대 5만의 싸움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의 억압받는 백성 전부와 5만의 싸움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안톤은 동의하진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그 이상 말을 하진 않았다.
‘쓸데없이 논쟁할 이유는 없겠지.’
과거, 각각 아딘 콘스탄틴과 드미트리 콘스탄틴의 편에 서서 대적하고 있을 때, 종종 둘은 설전을 벌이곤 했다.
‘어쩔 땐 내가 이기고 또 어쩔 땐 다비도프 백작이 이겼지. 뭐, 이제 와 그 승패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안톤은 미소를 지으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런 안톤을 바라보며 빅토르 다비도프가 물었다.
“르보프 경께서는…… 여전히 전하께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고 계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 물음에 안톤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히 기사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지 않겠습니까?”
안톤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또 물었다.
“예전부터, 그러니까 우리가 겨울궁전에서 두 전하를 각각 모실 때부터 궁금했던 건데…… 르보프 경께서는 전하 개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나라 왕실에 그 충성을 다하는 겁니까?”
안톤은 살짝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봤다.
“기사의 덕목은 왕실과 주군을 목숨을 다하여 섬기는 것 아닙니까? 전하 개인께도 당연히 충성을 바치지만 동시에 왕실 그 자체에도 충성을 다하는 것, 그게 기사 본연의 자세 아닙니까?”
안톤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하께서 만드시려는 세상은…… 그러니까, 혁명의 대의는…… 어찌보면 르보프 경이 신조로 삼고 있는 기사의 덕목과 배치되는 것이라는 생각…… 한 번도 안 해보셨습니까?”
순간 안톤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가만히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를 예전의 벨로디나 왕국처럼 만드시려는 게 아닙니다. 민중이 노예가 되지 않는 세상, 누군가가 권력을 독점하여 전횡을 떨치지 않는 세상. 그것이 전하께서 세우려는 새로운 벨로디나의 이상입니다.”
“…….”
“전하께서는 여전히 국왕으로 남으시겠지만, 그 국왕의 자리는 여태껏 르보프 경께서 충성을 다짐해왔던 그런 자리가 아닐 겁니다. 그저 이 나라 통합의 상징일 뿐일 겁니다. 이건 전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겁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다비도프 백작.”
“저는 다만…… 르보프 경이 걱정되는 것뿐입니다.”
“걱정?”
“자칫 르보프경께서 지닌 기사의 신념과 전하께서 꿈꾸는 새 벨로디나의 이상이 충돌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안톤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찻잔을 들었다.
그리곤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그대로 목구멍으로 털어 넘겼다.
[탁-!]
다소 세게 잔을 내려놓고 안톤은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이야기했다.
“기사의 신념은 주군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입니다. 나의 주군은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 전하시고, 그분께서 가시는 길이 곧 내가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행입니다.”
빅토르 다비도프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자 이번엔 안톤이 물었다.
“그러는 다비도프 백작의 신념은 무엇입니까? 보아하니 기사의 신념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물음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기사였던 적도 없으니, 당연히 기사의 신념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빅토르 다비도프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곤 그 내용물을 한 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넘긴 후 여전히 찻잔을 손에 쥔 채 안톤에게 이야기했다.
“제 신념은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민중을 위해 사는 것. 그게 제 신념입니다.”
그 말에 안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